내가 쓴 용상골 역사-김태회
-김태회 향토연구가-
월롱면 용상골에서 태어나고 성장하면서 알았던 용상골에 대한 이야기이다.
월롱산과 월롱산성은 파주의 역사
용상골은 행정명칭으로 경기도 파주시 월롱면 덕은1리이다. 우선 월롱(月籠)이라는 명칭에 대하여 두 가지 설이 있다. 월롱의 ‘월(月)’은 우리말 ‘달’을 한자화한 것이고, 롱(籠)은 락-랑-롱으로 음이 변화한 것이라고 한다. 즉 높은 지대라는 ‘다락’을 한자화한 것이 된다. 또 한 가지 설은 월롱산 모양이 초승달과 대바구니와 같이 생겼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월롱면이라는 명칭도 월롱산 이름을 따서 칭하게 되었다.
용상골 하면 월롱산성(月籠山城)과 용상사(龍床寺)를 떼어놓고 이야기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최근 월롱산성에 대하여 육군사관학교 육군 박물관(1994년), 경기도 박물관(2004년)과 한양대학교 문화재연구소(2007년)가 학술연구를 위한 유적 지표조사를 실시한 결과 월롱산성, 용상사 및 용상골이 깊이 연관되어 있음이 보고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파주시상수도 배수지를 월롱산에 설치하기 위하여 문화재 시·발굴조사 결과 원래 용상사지의 위치와 시대까지 많은 부분을 뒷받침하고 있다. 그러나 용상골의 역사가 여러 갈래로 와전되어 기술 또는 구전된 역사자료를 수집하여 하나로 만드는 게 필요하다. 이런 뜻에서 이 마을 출신인 필자가 우선 몇 가지 열거하고자 한다.
월롱산은 해발 229미터로 전체적으로 보면 월롱면 덕은리, 검산동, 야동동, 탄현면 금승리가 사방으로 빙 둘러 있다. 마치 지리산이 3개도 5개 시군에 걸쳐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지금의 월롱산을 파주 월롱산이라 하고, 기간봉을 교하 월롱산이라 부른다. 왜냐하면 과거에는 행정구역이 파주군과 교하군이 따로 있어 그 경계가 월롱산과 기간봉 사이 골짜기이기 때문이다.
월롱산은 그리 높지 않으나 사면이 모두 험준한 지형을 이루고 있다. 월롱산 주변으로 반경 10킬로미터 내에서는 서쪽으로 기간봉으로 인해 시야가 일부 가린 것을 제외하고는 낮은 구릉과 평야지대가 위치하고 있어, 사방을 조망할 수 있는 지형적 · 지리적 특성을 가지고 있다. 즉 북쪽으로는 임진강과 휴전선을 넘어 개성과 송악산, 서쪽으로는 한강과 오두산, 남쪽으로는 공릉천과 교하평야 또 멀리 고봉산과 북한산, 동쪽으로는 문산천과 파주평야와 봉서산까지 관망된다. 그러니 주변의 기간봉 산성, 오두산성, 장명산 보루, 봉서산성 같은 관방유적과 함께 가장 중요한 위치에 있는 월롱산과 일정한 연결 형태를 이루는 산성을 구축한 것이다. 임진강을 건너 남진하는 세력과 한강을 통해 육지로 진입하는 세력을 동시에 장악할 수 있는 요충지임이 틀림없다.
월롱산성 전체 둘레는 1,315미터이고, 내부면적은 약 1만 평으로 경기도 지역 산성으로는 규모가 큰 편이다. 축성 시기는 출토 유물과 성벽의 축성 방법 등을 고려할 때 백제산성일 가능성이 매우 크다. 특히 백제의 융성시기인 근초고왕 때로 추정하는 학자들이 많다. 산성의 형태는 자연 절벽을 이용한 테뫼식 산성으로 문지는 동문지, 동남문지, 서남문지, 서북문지, 북문지가 확인되고, 치성지(성벽 일부를 외부로 돌출시켜 쌓은 부분)는 서북치성지와 동북치성지가 있다. 우물터도 볼 수 있다.
그러나 1970년대 말에서 1980년 말까지 십여 년 이상 석재채취업자에 의해 ‘용머리’라고 부르던 산성 남쪽상당부분이 훼손될 때가지 지키지 못한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너무 많은 부분이 없어져 흉측하다. 부끄러운 부분이기도 하다. 훼손하는 과정에서 전복사고로 또는 진폐증 등으로 희생된 분들이 발생하기도 했다. 그 중 내가 아는 분도 있어서 더욱 가슴이 아프다.
이제라도 지키고 정비해야 한다. 그래서 나온 보고서가 경기도 박물관과 한양대학교 문화재연구소에서 보고한 월롱산성 장기 종합정비 계획이다. 그 내용을 보면 우선 성벽훼손구간을 메꾸고 복원하는 것이고, 박물관, 전시관을 설립하는 것이다. 그 외 식생복원, 유적지 내 환경을 정비하는 것으로 2014년까지 300억 이상의 예산이 소요되는 것으로 보고되었다. 하지만 보고된 지 이십여 년이 되어도 월롱산성을 정비하자는 여론이 형성되었거나 구체적으로 예산이 수립된 적은 없다.
파주는 임진강과 한강이 접해 있고 산성이나 보루가 많이 있다. 이는 고대 삼국 간 영유권을 두고 쟁탈전이 끊임없이 벌어졌다는 증거이며, 그 후 북방민족이 침입할 때 이 산성이나 보루를 사용했다고 입증하는 것이다.
고려 현종도 거란족이 침입했을 때 월롱산성의 유용성을 믿고 용상골로 피신했다. 그 관방유적들은 적성 육계토성을 비롯하여 연천의 호로고루성과 덕진산성, 탄현의 오두산성과 월롱산성에 이르기까지 15개나 된다. 특히 월롱산성은 한강과 임진강을 조망(월롱산 앞에 있는 기간봉이 1차 척후역할)하면서 뒤로는 용주서원 뒷산인 바래미산과 용상골 서남쪽에 위치한 검바위산, 용상골 앞산인 안산 등에서 세밀히 조망하여 문산천과 파주벌판, 공릉천과 교하벌판을 훤히 내다볼 수 있는 천혜의 요충지다.
아마 조선시대 교하천도설이 제기되었을 때 수도가 교하로 천도되었다면 월롱산이 풍수지리상 배산임수의 역할을 톡톡히 하지 않았을까.
용상사와 거란전쟁
*사진 : 용상사 대웅전 2013.12.15일 / 파주위키-
다음은 용상사에 대하여 이야기를 이어가고자 한다. 용상사를 언급하려면 먼저 고려와 거란전쟁을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고려와 거란 사이 세 차례에 걸쳐 벌어진 전쟁이다.
제1차 고려와 거란전쟁은 993년(성종 12년) 거란(요나라)의 소손녕이 약 80만 명의 대군을 이끌고 고려를 침공하였다. 그러나 서희의 담판으로 오히려 강동 6주를 회복 설치하고 그 영토를 압록강까지 확장하였다. 이 전쟁은 고려와 송나라와의 관계를 단절시키고 요가 고려와 교류하려는 목적이 깔려있었다. 물론 요가 송을 치려는데 고려를 크게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려는 요나라와 약조한 것과는 달리 비공식적으로 송나라와 계속 교류하여 재침략의 빌미가 되었다.
제2차 전쟁은 1010년(현종 1년) 요의 성왕이 직접 40만 대군을 이끌고 고려를 침략했다. 강조의 정변에 그 잘못을 묻는다는 구실로 침공해왔으나, 고려와 송나라와의 교류를 완전히 끊고 고려와 요와의 관계를 재확인시키면서 강동 6주를 되찾으려는 목적이 있었다. 거란은 개경까지 점령하여 항복론까지 거세졌으나 강감찬의 반대로 현종은 나주로 피신했다. 그 후 화친을 요구하여 고려 현종이 친조한다는 조건으로 거란은 물러갔다.
제3차 전쟁은 개경에 돌아온 현종이 요에 친조하지 않았음은 물론 강동 6주 반환 요청에도 응하지 않고, 도리어 1013년 거란과의 국교를 끊고 송나라와 다시 교류함으로써 1018년 소배압이 이끄는 10만 대군으로 다시 고려를 침공하였다. 소배압은 개경 인근까지 접근했으나 강감찬의 귀주대첩 등 승전으로 몇 천 명의 생존자만을 데리고 물러갔다. (고려 – 거란 제1, 2, 3차 전쟁은 위키백과를 참조함)
세 차례에 걸친 고려와 거란의 전쟁을 통하여 현종은 나주로 피신하였고 그 전후에도 피신하였는데 그 때 잠시 머물던 곳이 월롱산성이 위치하고 개경에서 가까운 용상골이었다. 당시 피란하여 임시 거처로 추정되는 ‘궁밭’이라는 지명이 지금까지도 구전된다.
용상사에 대하여는 일단 사찰 내에 있는 현판 내용을 그대로 쓴다. 용상사는 월롱산 남쪽 사면 중턱에 위치한다. 성종 12년(993년), 현종 1년(1010년), 현종 9년(1018년)에 소배압이 거느린 40만의 거란군이 개경까지 쳐들어오게 되자 현종은 민간인 차림으로 이곳 월롱산까지 피신하게 되었다. 다행히 강감찬이 귀주에서 승리하면서 나라 안이 평정되자 현종은 환궁하면서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절을 짓게 하고는 임금이 머물렀다는 뜻으로 용상사라 이름 지었다고 한다.
그 뒤 덕은화주(德隱化主)가 세종 27년(1445년)에 중건하였으며, 이때 소불석상(小佛石像)을 인근 벽장굴에 조성해 봉안하였다. 임진왜란 때는 승병의 도량이 되었는데, 왜군의 시체가 근처 골짜기에 가득하여 한때는 ‘무덤골’이라 불리기도 했다.
이후 조선 후기까지의 연혁은 전해지지 않으나, 1530년 편찬한 『신증동국여지승람 新增東國輿地勝覽』에 절 이름이 보이고 있고, 1799년에 편찬한 『범우고』에 보면 ‘절이 지금은 없어졌다’라는 말이 있어 임진왜란 이후 어느 때인가 폐사된 것으로 생각된다. 근대에는 1926년에 정염스님이 폐허가 된 절터에 사찰을 중건하였으나, 한국전쟁으로 폐허가 되었다.
현재의 용상사는 옛터에서 약간 아래쪽에 터를 닦아 해방 전에 중건되었고, 벽장굴에 있던 석불을 대웅전에 모시게 되었다. 1967년 대웅전을 다시 개축하면서 서쪽에 삼성각(三聖閣)을 신축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는데, 소속은 대한불교 일승종(一乘宗)이다.
정통십년명석불좌상 (正統十年銘石佛坐像)은 높이 61센티미터에 폭이 50센티미터 정도인 소형불좌상이다. 석불의 전면에는 회칠이 되어 있어 세부적인 특징을 자세히 관찰하기는 어려우나 목이 짧고 직사각형의 모난 얼굴에 육계가 두툼하다. 바닥에는‘正統十年 乙丑五月oo德隱’이라 새겨져 있어 덕은에 의해 용상사가 중창될 때 조성된 것으로 보이며 이 조성연대는 1445년으로 조선 초기의 불상양식을 이해하는데 귀중한 자료이다.
여기서 ‘절이 없어졌다’라고 기술되어 있는데 고려 현종과 관련하여 이룩한 사찰인 용상사는 현재의 위치가 아님을 몇 가지로 확인 할 수 있다. 첫 번째는 필자가 직접 겪은 일을 피력해 보겠다. 1980년대 초 현 용상사에서 동남쪽으로 400여 미터 지점에 박모씨 가족이 살았다.
그의 부친이 돌아가셔서 현 배수지자리에 묘를 쓰기 위하여 땅을 팠는데, 돌약탕관과 청호리병이 각각 한 점씩 발굴되었다. 그 물건이 역사적 자료가 되지 않을까 해서 파주군 공보실을 거쳐 당시 문화재관리국에 보고했다. 얼마 후에 결과통지문을 받아보았는데, ‘고려시대 유물로서 특히 돌약탕관은 사찰에서 차를 끓일 때 쓰는 다관이며 청호리병은 당시 물을 담는 용기로 쓰였으나 질은 좀 떨어지는 물건’이라는 내용이었다.
*사진 : 용상골의 배수지 전경
두 번째는 2010년 월롱산 배수지를 설치하면서 국방문화재연구원에서 문화재시굴조사를 한 결과 고려시대의 유물이 출토되면서 절터라고 보고된 바 있다. 이 외는 ‘빈대가 많아 폐사’되었다고 하는 설과 ‘유생들이 못살게 굴어 폐사하였다’는 설이 전해 내려오기도 한다. 어쨌든 월롱산 배수지 자리가 현종이 환궁하면서 기념으로 짓도록 한 절터로 추정된다.
현판에 용상사가 승병의 도량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용상사 바로 뒤 월롱산성 정상에서 LG디스플레이 쪽으로는 지형이 약간 비스듬하게 펼쳐져 있어서 옛날에는 승병들의 훈련장이었다고 한다. 말을 타고 훈련하기도 했는데, 사망자가 발생하면 무덤골에 매장했다. 또 임진왜란 당시 왜군의 시체가 많았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몇 십 년 전만 하더라도 월롱산과 기간봉 사이로 난 길을 따라 금승리 쪽으로 가다 보면 오른편에 낙엽송이 무성하게 자라 숲을 이룬 것을 볼 수 있었다.
무덤골이라는 명칭과 무관하지 않은 듯하다. 승병의 지휘본부는 현재는 채석으로 절벽이 되었지만, 바래미산 뒤쪽에 있던 병무관(兵武館)이라고 한다.
내가 월롱국민학교 다닐 때인 1960년 초 부터 친구들과 병무관을 여러 번 다녔다. 약수도 있고, 산중턱에 부처님이 모셔져 있어서 많은 사람들이 불공을 드리러 오는 걸 자주 보았다. 나는 떡이나 과일을 얻어먹고 바로 산 넘어 용상사 쪽으로 해서 집에 오곤 했는데, 지금 생각해도 병무관이라는 명칭에서나 규모 등으로 봐서 승병 도량으로 활용하기에 충분하다.
용상골은 옛 파주 천정구현의 관아
세 번째는 용상골에 대하여 이야기 하고자 한다. 용상골 마을의 명칭은 당연히 용상사의 명칭에서와 같이 임금이 머물던 곳이기 때문에 용상(龍床)골이라고 하는데 용산(龍山)골이라고도 한다. 임금이 머물던 산이니 틀린 말은 아니다. 용상골에는 몇 가지 지명이 전해져 내려온다.
o ‘용상골’은 고구려 때 천정구현(泉井口縣) 관아가 있던 곳이다. 옥터골, 향교골, 도장골 같은 지명이 우연히 생긴 명칭이 아니다. 천정구(泉井口)가 샘이 나오는 우물이라는 현(縣) 명칭도 솥우물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본다. 더욱이 월롱산 줄기중 하나인 응봉산 자락 풀무골에 농기구와 병장기를 만들기 위해 큰 풀무를 설치한 대규모 대장간이 있다는 것은 지역을 다스리는 관아가 있고 산성을 지키고 훈련시켜야 하는 병사가 많기 때문이다. 또한 대장간에서 반드시 필요한 쇠를 조달했던 지명인 금촌 지역의 쇠재와 쇠곶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사진은 굴화현의 천전구현 관아터-
고려 현종이 피신할 때 당연히 기존 천정구현 관아를 임시 궁으로 정했을 것이다. 천정구현 관아이면서 궁이기에 지금까지도 ‘궁밭’이라고 불려온 곳이 있다. 용상골과 관련한 군현 행정구역 창설 및 고을 명칭과 변경 연대, 관아소재지가 기록되어 있다.
‘서기 146년 고구려 7대 차대왕 때 용상골 산10번지에 천정구현(泉井口縣)을 두었다.’
‘서기 371년 백제 13대 근초고왕 때 용상골 산140번지로 관아를 이전하고 굴화현(屈火縣)으로 변경하였다.’
‘서기 475년 고구려 20대 장수왕 때 관아를 용상골 산140번지에 그대로 두고 굴화현을 천정현(泉井縣)으로 변경하였다.'
‘서기 551년 신라 24대 진흥왕 때 관아를 용상골 산140번지에 그대로 두고 천정현을 선성현(宣城縣)으로 변경하였다.’
‘서기 1460년 조선조 7대 세조 때 관아를 아동면 아동리 175번지로 이전하고 선성현을 교하현으로(交河縣)으로 변경하였다.’
ㅇ ‘궁밭’은 현재 9사단 28연대 3대대 후문 쪽 평화농원 자리를 ‘궁밭(과거 용상골 김oo 소유 田)’이라 불려왔다. 지금은 하천 직강공사 등으로 약간 변형되긴 했으나 크게 변하진 않았다.
* 사진은 궁밭이라고 전해오는 곳으로 천정구현 관아로 추정됨
ㅇ ‘옥터골’은 용상사에서 아랫마을로 내려오는 첫 번째 골짜기로 옥(獄)이 있었다고 한다. 천정구현 관아가 있던 자리와 일치한다.
* 사진은 공장지대가 된 도장골-월롱산 자락에서 두 갈래로 갈라져 아늑함*
ㅇ ‘도장골’은 그린 전원주택이 있는 골짜기로 두 가지 설이 있다. 일설은 부녀자가 거처하는 방(규, 閨)을 도장이라 한다. 이는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안방처럼 아늑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는 설이 있다.
다른 설은 도자기를 굽던 골이라는 설이다. 이는 경기도 박물관에서 2004년 조사 보고한 월롱산성 유적보고서 덕은리 유물산포지 7(보고서 P451-452)에서 백제 토기로써 이를 뒷받침할 수 있고, 이 유물산포지에서 남서쪽으로 100미터쯤에 군부대로 넘어가는 고개가 황토고개로 여기서 토취하여 도자기를 구웠을 것이다.
ㅇ ‘향교골’은 용상사에 아랫마을로 내려오는 두 번째 골짜기로 향교가 있던 곳이다. 지금은 군부대 사격장이다.
ㅇ ‘큰골과 작은골’은 용상사에서 마을로 내려오는 향교골과 같은 곳이다.
ㅇ ‘괭이산’은 용상사 바로 아래 위 보고서 덕은리 고분 2(보고서 P338-350)가 있는 조그만 산으로 고양이 산이라고 한다.
o ‘굿당골’은 괭이산 기슭에 있었는데 굿을 하는 이름난 만신이 살았다고 한다.
ㅇ ‘참의골’은 용상사에서 아랫마을로 내려오면서 군부대 사격지휘부 바로 옆 골짜기로 ‘차만이골’이라고도 하는데 육조에 둔 정3품 벼슬인 참의가 살았던 곳이라 한다.
ㅇ ‘마당바위’는 월롱산 정상에 가장 너른 바위 중간에 있다. 어떤 장사가 오줌을 누어 구멍이 뚫렸다 하는데, 지금도 홈이 파인 곳을 확인할 수 있다.
ㅇ ‘벽장굴’은 마당바위에서 정 동쪽으로 10여 미터 앞 절벽 중간에 있다. 규모가 작은 굴로 벽장과 같이 생겼다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조선조 초 덕은화주께서 소불석상을 조성하여 벽장굴에 모셨다 한다.
*사진은 솥우물 전경
ㅇ‘솥우물’은 몇 가지 설이 있다. 소도가 있던 우물이라고 하여 소도물이라 하기도 하고, 샘에서 물이 솟는다 하여 솟우물이라는 설이 있으며, 우물이 셋이 있다하여 셋우물(서두물)이라 증언하는 분도 있는 반면, 솥에서 바가지로 물을 뜨듯이 쉽게 뜨는 물이라 하여 솥우물이라는 설 등이 있다.
파주군지에는 ‘솟우물’이라고 되어 있다. 몇 십 년 전만 하더라도 이 우물 뒤편으로 조그만 동산이 있었는데 동산 마루에는 신성시한 노송이 몇 그루 있었고, 그 소나무 주위에서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는 도당굿이 행해졌다. 어렸을 때 부모님과 참견한 일이 있는데, 어머니는 밤을 새우셨다. 바로 이 자리가 무속신앙을 숭앙해 내려왔던 것으로 봐서 제의가 행해지는 신성한 구역인 소도라는 말에도 신빙성이 있다.
그 옆으로 솥우물에서 안마을로 넘어가는 고개를 솥우물 고개라고 불렀고, 마루턱쯤에는 서낭당이 있었다. 아무튼 2008년 솥우물 정비사업 완료 후 ‘솥우물’로 최종 결정하여 현 표지석을 세웠다. 과거 1980년대까지만 하더라고 솥우물에서 나오는 물의 양이 엄청나서 파주군이 상수원으로 제안하였으나 거절한 적이 있다.
지금은 공장 등에서 쓰는 물이 상당한데도 여전히 뿜어져 나오는 물량이 많아 인근 주민이 샘물을 먹고도 남아돈다. 그러니 앞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옛 천정구현(泉井口縣)이라는 지명이 예사롭지 않다. 이제 솥우물은 파주시에서는 하나 밖에 없는 간이상수도로 남아 있으나, 2024년부터는 이를 폐쇄하고 광역상수도로 교체한다고 한다.
ㅇ ‘검바위산’은 용상골 남서쪽에 우뚝 솟아있는 산으로 월롱산성과 함께 관망대 역할을 한 것으로 추정된다. 북쪽 일부 검은 바위는 거지바위, 쥐산이라고도 했다. 지금은 공장지대로 없어졌다.
ㅇ ‘가살미’는 솥우물, 용상골 어귀에서 금촌 방향으로 나 있던 논둑길로 논가생이길이라는 뜻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미’는 ‘배미’와 같이 논을 일컫는 단위로 본다. 용상골 사람들은 주로 가살미로 해서 생활권인 금촌을 나들었다.
ㅇ ‘구랫자리’는 가살미의 한 부분으로 고래자리 즉 고래 논이 변형된 것으로 추정된다. 실제로 바닥이 깊고 물길이 좋아 기름진 논이라는 고래 논의 뜻에 부합되었다.
ㅇ‘동지미’는 솥우물에서 정 동쪽 영태리로 넘어가는 작은 골짜기로 동쪽에 있는 촌(村)이나 후미진 곳(凹)을 뜻한다.(이돈주의 지명의 자료와 우리말 연구 참고)
ㅇ ‘정지미’는 솥우물에서 700여 미터 서북쪽 후미진 곳으로 전지미, 경지미라고도 하는데 정확히는 아는 사람이 없다. 다만 전국에 전지미라고 부르는 곳은 많다. 마을 앞 후미진 골짜기를 가리키는 것으로 추정된다.
ㅇ ‘쟁골’은 솥우물에서 300여 미터 북쪽으로 옹기 등을 굽는 ‘장이’가 사는 골짜기라는 뜻이다. 장이가 쟁에서 재∼앵으로 변형되어 발음한다.(울산 동구 문화원 지역연구소 장세동 소장 참고)
*사진은 공장지대가 된 쟁골
옛 어르신들의 말씀을 들으면 맨 먼저 안씨가 들어와 살기 시작하여 안동김씨, 연일정씨, 고성이씨, 청해이씨 등이 속속 들어와 사십여 호의 촌락을 이루며 살아왔다고 한다. 우리 안동김씨는 12 · 3 호 정도 정착해 살았다.
현재 5대조께서 선산에 모셔져 있고 그 윗대 일부는 실전 된 것으로 봐서 19세기 초반에 문산 칠정면에서 용상골로 세거지를 옮겨왔다고 본다. 지금의 文山(문산) 이천리인 배내는 배가 드나들 정도로 번화하였으나 물이 좋지 않아 용상골로 오셨다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고 있다.
아버지가 들려주신 이야기를 하나 해야겠다. “할아버지께서 용상골로 오신 얼마 후 곰을 잡으셨다고 해. 어떻게 잡으셨냐 하면 두 가지 방법으로 잡으셨는데, 첫 번째 방법은 이렇게 말씀하시는 거야. 커다란 돌을 동아줄로 묶은 다음 느티나무에 매달아 놓으면 곰이 와서 그 돌을 툭 건드린대. 그러면 흔들거리는 돌이 돌아서 가려는 곰의 뒤통수를 치니까 화가 난 곰이 그 돌을 힘껏 치면 돌이 공중으로 치솟는다네. 곰탱이가 내려오는 그 돌을 머리로 맞받으니 박살이 날 수밖에.
두 번째 방법은 고목나무에서 겨울잠을 자던 곰이 봄이 되어 세상에 나갈 수 있나하고 손가락을 밖으로 내밀어 본대. 그러면 그 손가락을 도끼로 잘랐는데 그것도 모르고 이번에는 다른 손가락을 또 내민대. 그 다음에는 발가락을, 또 다음에는 다른 발가락을 내밀어 모두 잘라 잡으셨대.” 재미있자고 하신 이야기다. 19세기 초반 용상골 뒷산인 월롱산에 숲이 우거졌기에 곰이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용상골에 전기가 처음 들어온 것이 1968년 12월 1일이니 그럴 만도 하다.
용상골은 여느 농촌마을과 크게 다르지 않지만 6.25 이후 피란 온 분이나, 타 지역에서 이곳 농촌마을로 이사와 살다가 뿌리를 내리기도 하였다. 앞에 언급한 대로 안씨 등이 마을을 일구고 살았다고 하는데, 그 전에는 다른 성씨들이 살지 않았겠는가.
지명에서도 알 수 있듯이 고려조 현종이 피란할 때 사람이 전혀 살지 않았거나 적절치 않은 지역으로 올 수 있었겠는가. 또 대중이 없는 월롱산에 절을 지을 수 있었겠는가. 현급 관아와 규모가 큰 산성이 있고, 유적·유물조사보고서의 유물산포지인 도장골과 굿당골에서 백제시대의 토기와 석곽총이 발견된 것은 나름대로 하나의 지역문화를 꽃피우고 살았음을 알 수 있다.
2000년도 중반에는 용상골 입구 솥우물을 말끔히 정비하고 월롱산 등산로를 개설함으로써 파주 시민들의 이용이 급격히 늘어남에 따라 관심이 증가하게 되었다. 더욱이 최근에는 전원주택이 들어서면서 마을 규모가 커져 이에 따라 인구도 늘어난다.
국가 또는 나라라는 큰 단위의 공동체도 생겨났다 사라지면서 역사가 엉뚱하게 기록되기도 한다. 하물며 도·시·군·읍·면·동 단위도 아닌 자연마을 단위에서야 어떠하겠는가. 더욱이 지명 등은 우리 고유어를 한자화 하는 과정에서 엄청나게 와전되었을 것이며,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자연히 다르게 발음도 하였을 것이다. 기록되어 있는 역사도 다양하게 또는 왜곡되게 해석하는데 기록되지 않은 역사야 말해 무엇 하랴. 용상골은 작은 자연마을에 불과하지만 이제라도 누군가는 기록해 나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고향이란 무엇인가? 사전에는 ‘자기가 태어나서 자란 곳’, ‘조상 대대로 살아 온 곳’, ‘마음속에 깊이 간직한 그립고 정든 곳’ 이렇게 세 가지 뜻이 적혀 있다. 국어 학자들이 정의한 것이니 모두 맞을 것이다. 그런데 그 셋 중에서 왠지 세 번째가 늘 내 가슴에 웅크리고 있다.
이 글을 쓰는 나는 고향을 나왔다고 해야 엎어지면 코 닿을 데지만, 그럼에도 고향에 대하여 항상 목이 마르다. 그러니 수몰로, 군 훈련장 수용(적성면 무건리, 법원읍 오현리, 직천리 등)으로 고향이 없어져 떠날 수밖에 없는 분들의 심정은 어떠하겠는가?
6.25전란으로 고향을 떠나온 실향민들, 나라를 잃고 가난으로 낯선 타지 타국으로 유랑하는 조선의 디아스포라를 떠올리면 고향은 ‘그립고 정든 곳…’이기 전에 슬프고 아프고 쓰리고 아린 그 무엇이 아닐까. 심지어 겨우 정착했던 연해주에서 카자흐스탄 등 척박한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 당했던 고려인들을 생각하면 어떻게 표현할 방법이 없다.
수구초심首丘初心(여우도 죽을 때는 태어난 곳으로 고개를 돌린다)이라는 말이 있듯이 이런저런 이유로 세계 각국으로 뿔뿔이 흩어져 입양되었던 이들이 혹 자기를 버렸던 부모와 고국을 찾아 왜 다시 돌아올까요. 그래서 고향은 그런 곳이구나 하는 생각에 공글리는 마음에서 이 글을 쓰게 되었다.
지금까지 쓴 것이 주먹구구식 또는 견강부회(牽强附會)라는 비판을 받을 수도 있다. 틀린 부분이 있거나 다른 의견을 가지신 분들이 있다면 주저 없이 개진하여 올바르게 고쳐나가야 하지 않을까. 내 고향 용상골이 역사를 간직한 풍요롭고 아름다운 고을로 발전하기만을 바랄 뿐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