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산초 개교100주년 기념 추억-파주위키
2026년 신산초교100주년 기념관련한 추억의 스토리이다. 신산초등학교는 1926.4.7일 개교하여 2026년에는 100주년이 된다.
신산초교 100주년 기념사업 추진위원회는 다양햔 사업을 준비하고 있으며 그 중 힉교와 지역에 대한 100년 역사를 담은 100년사 출판한다.
- 신산초등학교에서의 축구 지도 - 용관중 교사(1977~1979재직)
- 나의 초등 6년사 - 51회 안덕기
- 기억나는 그때 - 53회 김미자
- 담임 김기원선생님과 함께~ 53회 조미경
- 용관중 선생님 많이 보고 싶어요~ 52회 경은주
- 나에게 신산이란? -41회 안재형
- 고맙고, 그리운 그 시절 - 41회 홍종숙
신산초등학교에서의 축구 지도 - 용관중 교사(1977~1979재직)
이 글은 2005년 홍천군 삼생초등학교에서 테니스를 지도하며 “테니스 레슨 카페”를 만들면서 작성했던 『신산초등학교에서의 축구 지도』라는 글을, 이번 신산초등학교 개교 100주년 기념 원고 모집에 글을 올리고자, 취지에 맞게 고쳐서 작성했습니다.
기억을 되살리기에는 너무 까마득한 일이라 제대로 기억해낼까 하는 걱정이 앞섭니다.
1977년 초임으로 3학년2반 담임을 맡게 되었는데(신산51회 졸업생들)
지금은 말도 안되는 얘기지만 그 당시에는 아이들 성적 올린다는 이유로 손바닥 때려가면서 열심히 가르쳤습니다. 초임 교사라 아이들을 하교시키면, 다음 날 아침 아이들을 볼 때까지 그리워지고, 아침까지의 시간이 너무 길게 느껴질 정도로 아이들한테 정도, 애착도 많이 가던 그런 시절이었습니다.
당시에는 각 학교마다 육성종목을 지정하여 학교 운동부를 지도하는 것을 굉장히 중요시 여겼고, 따라서 젊은 남자 선생님이라면 한 종목씩 맡아, 방과후면 운동장에 나가서 아이들 운동 지도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겨졌습니다.
지금보다 의복이나 난방 시설이 굉장히 열악한 중에도, 한겨울 혹한기에 운동장에 트랙을 그려 눈 치우는 것은 당연하고(그렇지 않으면 서슬 퍼렇던 교육청 장학사의 질책을 엄청 받음), 좀 심하게 나가는 학교에서는 트랙을 빙 돌아가면서 비닐하우스를 만들어 전천후로 운동부를 지도하도록 하였습니다.
당시 젊은 남자 선생님으로는 전주교대(전주인지 목포인지 정확하지 않음)를 저보다 한 해 먼저 졸업한 P 선생님과 인천교대를 저보다 한 해 뒤에 졸업한 K 선생님, 그리고 저, 이렇게 3명이었습니다. 그래서 축구부는 P, 남자 배구부는 제가, 여자 배구부는 K, 그리고 육상부는 우리보다 10세 정도 연상이고 체육주임을 맡고 있던 김용직 선생님이 맡았습니다.
저는 남자 배구부를 지도하면서 당시 신산초등학교는 축구부 위주로 운영되기도 하였고, 중고등학교나 교육대학 시절에 운동을 좋아하다 보니 반대표로 뛸 정도의 실력만 있었지 배구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어서, 그저 그렇게 나름대로 열심히 지도하는 형편이었습니다.
파주군은 축구군이라 불릴 정도로 축구에 대해 열기가 높아 1978년 군 체육대회가 열렸을 때에는 6학년부 16팀, 5학년부 15팀이 참가할 정도였습니다. 현재 국가대표 트레이닝 센터가 파주군에 위치한 것이 아마 그런 열기가 이어져 그렇게 되지 않았나 추측해 봅니다.
축구부는 6학년을 중심으로 저와 연배가 비슷한 C 코치가 지도하고 있었는데, 가을이 되자 광탄중학교를 졸업하고 당시 해외 파견이 인기가 있던 시절이라 중동 지방으로 해외근로자로 일하러 나가기 위해 준비 중이던 정해영(이름은 정확하지 않음)코치가 4학년을 지도하게 되었습니다. 지금부터의 이야기는 정해영 코치와 4학년 축구부를 중심으로 이어집니다.
정해영 코치는 신산초등학교와 광탄중학교 축구부 주장 출신으로 후배 학생들을 지도한다는 입장으로, 지도 방식은 스파르타식이었지만 굉장히 열심히 지도하였습니다.
지금으로서는 축구 실력이 가늠이 안 되지만, 당시 파주군의 축구 실력과 축구 지도 능력으로 보아 뛰어났을 거라고 생각됩니다. 더구나 그 정해영 코치를 신산초등학교에서 지도한 코치 선생님이 부천에서 축구를 가르치고 있었는데, 아주 뛰어난 지도자로 그 분이 가르친 골키퍼 최인영 선수, 수비에 전종선 선수 등이 몇 년 후에 국가대표가 될 정도였습니다.
그 밖에 파주군에는 각 면마다 국가대표 축구 선수를 적어도 2~3명이 배출될 정도로 축구에 대한 열기나 실력이 뛰어났습니다. 그래서 면 대항 축구시합이 열리면 11명 중에는 지금으로 말하면 프로 선수인 실업 선수가 한두 명 낄 정도로 대단하였습니다.
해가 짧아지는 가을부터 4학년 중에서 선발하여 지도하는데 아침 7시 반까지 오라고 합니다. 처음에는 아이들이 늦게 와서 제대로 훈련이 되질 않더니, 며칠이 지나자 아이들이 새벽안개를 헤치며 학교에 오고, 훈련을 제대로 합니다. 코치가 우리가 보는 데서는 별로 무섭게 하지 않는데도 아이들이 무척 열심히 합니다.
나중에는 아침 훈련에 코치가 없는 데도 코치가 있을 때보다 더 열심히 합니다. 실력도 쑥쑥 늘어갑니다. 한두 달이 지나자 기본기가 잡히고, 서너 달이 지나자 5~6학년과 연습 게임을 해도 덩치에서 밀리지 기술은 더 뛰어나게 되었고, 시합을 대등하게 합니다.
정해영 코치 자신이 배운 대로 기본 기술, 운동 감각, 게임 운영 능력을 길러주는 데, 매섭게 가르치고 배우다 보니 실력이 쑥쑥 늘어갑니다. 그래서 하루는 술자리에서 그런 비결을 물어보았습니다.
“어떻게 아이들을 때리지도 않고 욕도 하지 않는데, 아이들이 정코치만 보면 무서워서 쩔쩔매고 그렇게 열심히 축구를 하느냐?” 그랬더니, 아이들이 훈련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여러 사람이 보는 곳에서는 욕도 별로 하지 않고 때리지도 않지만, 체육창고 뒤로 끌고 가서 혼을 내준다고 합니다. “그러면, 코치가 없을 때 주장을 중심으로 코치가 있을 때보다 더 열심히 하는 것은 어떻게 된 거냐?” 이렇게 물었더니 다음과 같이 대답합니다.
개인 사정으로 코치가 아침 훈련에 참가하지 못할 일이 생기면 며칠 전부터 습관을 들인다고 합니다. “내일은 코치 선생님이 서울 갈 일이 있어 아침에 나오지 못하니까, 주장 한걸이를 중심으로 연습해라.” 하고는 연습할 내용을 알려준다고 합니다. 그러고는 다음 날 훈련할 시간에 학교 숲 뒤에 와서 몰래 지켜본다고 합니다.
초등학교 4학년 아이들이니까 당연히 지각하는 놈에, 그 무섭던 코치 선생님이 없으니까 장난치며, 시시덕거리고, 말 안 해도 상황을 눈으로 보지 않아도 뻔해 보입니다. 이 때 코치 선생님이 나타납니다. 물론 창고 뒤로 끌려가서 벌어질 상황은 알고도 남습니다. 이런 일을 몇 번 한다고 합니다. 이렇게 되면 말 그대로 코치 선생님이 없으면 주장을 중심으로, 코치 선생님이 있을 때보다 더 무섭게 합니다.
코치 선생님이 언제 튀어나올지 모릅니다. 주장은 주장대로 코치 선생님이 없을 때 제대로 하지 않으면 엄청 혼나니까 더 쥐 잡듯이 하고, 아이들도 열심히 따르고, 주장의 권위도 점점 세어집니다. 이렇게 되면 주장이 코치 선생님보다 더 무섭습니다. 훈련 강도는 세어지고, 집중력도 높아집니다. 실력은 말 그대로 일취월장합니다.
그런데 사건이 터졌습니다.
다음 해인 1978년 봄, 6학년 한 학생이 파주군 축구대표 골키퍼로 선발되었습니다. 그런데 선발된 어린이가 학교에는 오지 않고 종종 중간에 새는 겁니다. 그런 일이 반복되자 5일장을 돌아다니며 노점상을 하는 아이 아버지가 학교로 찾아와서, 파주군 대표로 선발도 되었는데 중간치기를 자주하고 공부와 훈련은 안하니 아이를 혼을 내서라도 가르쳐 달랬다고 합니다. 그런데 아이가 또 중간치기를 한 겁니다.
아이 입장에서야 군 대표로 선발될 정도로 운동신경은 뛰어났겠지만, 반강제 스파르타식으로 훈련을 하니 그럴 만도 하겠지만, 담당 선생님이나 코치 입장에서는 군 대표로 선발된 마당에 더 열심히 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고 아이 아버지도 부탁한 일이 있어, 본보기를 보이려고 아이를 때려주었습니다.
먼저 C 코치가 엉덩이를 때렸습니다. 다음에는 P 선생님이 혼내주었습니다. 그런데 아이가 매를 맞다가 선생님한테 욕을 했다고 합니다. 당시로서는 상상도 못할 일이 벌어지자 더 때렸겠지요.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 당시 현장에 정해영 코치는 타지에 가 있어 자리를 같이 하지 않았습니다.(제가 현장을 보지 않고 들은 이야기로 다소 차이가 있을 수 있음)
상황은 다음 날 크게 벌어졌습니다.
아침에 출근하니, 아이 아버지가 아이를 리어카에 싣고, 광탄 삼거리 지서 앞에서 난리를 쳐, 학부형들이 학교로 쳐들어온다고 합니다. 그러자 연세 지긋하시던 여자 선배 선생님이 교무실에 있으면 일이 크게 벌어질 것 같아, 운동 지도하는 젊은 남자 선생님들은 모두 피하라는 겁니다. 그래서 피해 있다가 상황이 종료되어서야 교실로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 일로 P 선생님과 C 코치는 의정부 경찰서 유치장에 있다가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육본에서 근무하던 P 선생님의 형 덕분에 사흘만에야 학교로 복귀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당시에는 군인이 득세하던 시절로 더군다나 육군사관학교 출신이면 무소불위의 힘이 있었음)
이제 P선생님은 축구부를 담당할 수 없게 되었고, C 코치도 축구를 지도할 수 없었고, 정해영 코치도 중동으로 떠나게 되어 오롯이 저 혼자 축구부를 떠맡게 되었습니다. 축구부를 떠맡았을 때, 아이들이 저보다 기능도 훨씬 뛰어나고, 축구나 운동에 대한 식견도 부족하여 망막하였습니다.
지금으로서는 너무 세월이 흘러 그 당시 어떤 지도 방향이나 방침을 가지고 지도하였는지 기억할 수 없지만, 아이들을 인간적으로 대하고, 아이들에게 의견을 구하고 합의를 통하여 훈련 프로그램이나 일정을 계획하여 축구부를 지도하였습니다. 지금도 기억에 특히 남는 것은 어릴 적에 운동 감각을 익히는 것이 중요하다고 여겨 기본 기능을 중시하고 또 감각을 키우는 데 중점을 두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마무리 훈련에 볼 리프팅을 많이 하였습니다.
1978년 5월경에 축구부를 떠맡아 지도한 후, 1979년 9월 1일 신산초등학교를 떠날 즈음에는 볼 리프팅을 3,000개 이상 하는 어린이가 5~6명이나 되었고 나머지 어린이도 1000번을 넘게 하였습니다. 볼 리프팅 3000번을 한다는 것은 30분 동안 볼을 한 번도 떨어뜨리지 않아야 합니다.
제기차기는 그만 차라고 할 때까지 하루 종일 찹니다. 그것도 오른발 한 번, 왼 발 한 번, 번갈아 하는 것으로 핸디를 주어하였으므로, 이 정도면 기능이나 감각 면에서는 초등학교 수준에서는 당시 대한민국 최고의 실력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지금도 기억에 남는 것은 어려웠던 가정 살림에도 불구하고 5월 15일 스승의 날에 주장 한걸이를 비롯한 몇몇 축구부원들이 자신들의 용돈을 모아 치킨 2마리를 사가지고 저에게 와, 대접을 받은 것입니다. 1년 5개월이 채 안 되는 짧은 기간 동안 아이들이 따르고 훌륭한 성장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은, 스파르타식 훈련과 강압적인 훈련에 익숙했던 아이들에게, 인간적으로 대하고 아이들 의견을 존중한 것이 가장 큰 요인이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1979년 9월 1일, 저는 저의 고향인 강원도로 전출을 희망하여 홍천에서 출퇴근이 가능한 횡성군 창봉초등학교로 오게 됩니다. 1988년에는 한걸이와 선민이가 홍천읍에서도 버스로 두 시간 이상 걸리는 오대산 골짜기에 있는 명개분교를 방문하여 좋은 인연이 이어지게 되고, 화계초등학교에 근무하던 1998년 여름에는 10여명의 제자들이 신부나 여자 친구들을 대동하고 찾아와 천렵도 하고, 밤새 고스톱도 치고, 새벽같이 일어나 홍천조기축구클럽과 친선 축구경기를 하는 등 사제간의 정도 나누었습니다.
지금은 연락이 소원하지만, 2000년 여름방학에는 제자들의 초청으로 오랜만에 신산초등학교를 방문하여 제자들이 선물한 유니폼과 축구화를 갖춰, 축구도 즐기고 이야기꽃을 피우기도 하였습니다.
세월이 흘러 이제는 50대 후반이 된 제자들. 모두의 이름을 기억할 수는 없지만 지금도 그리운 얼굴들이 떠오릅니다.
이한걸, 이안성, 정운찬, 박용성, 안선민, 이성철, 안선명….
여기까지는 2005년 작성한 글을 조금 고쳐 쓴 글입니다.
안덕기 님이 보내온,
당시 4학년 2반 제자인 경은주 님이 투고한 『용관중 선생님 많이 보고 싶어요』라는 글을 읽고, 그동안 보관하고 있던 60여 통의 편지를 다시 읽으며, 당시에 제자들이 보여준 따뜻한 감정을 느낄 수 있는 귀한 시간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이름을 열거하여 보면
강창숙, 강정원, 경은주, 구정모, 김광자, 김광태, 김명보, 김명숙, 김숙이, 김원례, 김은정, 김정숙, 김하정, 노선화, 백미경, 서정민, 손문희, ○순화(배구부), 안순옥, ○영희, 우경혜, 이경자, 이용미, 이지숙, 이한걸, 임기정, 임인정, 정영애, 정진성, ○정해, 조경찬, 조은혜, 주현정, 최경옥, 최옥희 그 외 많은 제자들이 있으나 이름이 가물가물합니다.
올해 제 나이 71세에 제자들의 이름을 일일이 기억하지 못해 아쉽지만 신산초교에 가면 혹시나 옛 기억이 되살아 날지 기대해 봅니다.
끝으로 신신초교 개교 100주년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나의 초등 6년사 - 51회 안덕기
2026년 신산초교 100주년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나의 어머니(17회), 큰형님(41회), 작은형님(48회) 그리고 저는 51회를 졸업한 명문초교 신산가족입니다.
나에게는 두 분의 교장선생님이 계십니다.
유병주 교장선생님 과 78년(4학년)9월에 부임하신 박응수 교장선생님이 아직도 눈에 선합니다.
1975년 1학년1반 (박인영 선생님)
유치원도 안 나온 내가 글씨도 모르고 입학한 코흘리개는 학교적응하기 참 어려운 걸로 기억합니다.
손수건을 세로로 펴서 옷핀을 가슴에 달고 다닌 유년시절, 지금 생각하면 웃음이 절러 나옵니다. 소령원 소풍 단체사진을 보면 지금 연로하신 어머니가 그때는 참 젊었었구나 하는 생각이듭니다.
1976년 2학년1반(성호석 선생님)
나의 초딩시절 최고령 담임선생님이십니다.
그 당시 학습 부적응시기라 구구단암기가 왜 그리 어려웠는지....
"나리 나리 개나리 입에 따라 물고요."만 주구장창 노래했던 기억이 납니다.
1977년 3학년3반(김인순 선생님)
반편성시 공부 잘하는 친구들을 그룹으로 나누어서 등급이 나뉘던 시절, 참 어려웠지요.
그 당시에는 공부 잘 하는 사람이 반장, 부반장이 되었으니 물론 저는 장을 못 했지요.
담임선생님이 서울 홍제초교로 전근을 가시고, 몇몇 친구와 홍제동을 갔어요. 선생님께서 중국집에서 짬봉을 사 주신 기억이 나는 데, 그렇게 짬봉이 맛있는지 몰랐습니다. 선생님 댁 화장실 안에서 문이 안 열려 공포감을 느낀 기억도 나네요. 그 후로 미국으로 이민 가신걸로 알고 있습니다.
보이스카웃을 1년 했는 데, 자연농원에(에버랜드)가서 동전시계 차고 요술의집에 들어가서 80원 잃어버리고, 도마산초교에서 캠프화이어 한 기억도 나네요. 보이스카웃 단장이셨던 김용직선생님도 보고 싶습니다. 6학년때 저에게 전교회장 추천도 해주셨는데, 수줍어서 사양을 한 기억도 나네요. 그래서 민경태 친구가 했답니다.
1978년 4학년3반(김승하 선생님)
엄격하신 아버님하에 짧은머리로 초등3년을 보냈었는 데, 4학년때부터 머리를 길러(상고머리) 다니게 되었고 그 후 부터 학습능력이 좋아졌습니다. 짧은머리로 공부한 시절은 성적이 안 좋은 징크스가 있어요.
2학기 처음 반장도 하고 선생님이 참 이뻐해 주셨습니다. 떠든 아이이름 칠판적기의 쾌감은 아직도 생생합니다. 2반에 종관이 친구는 예방접종주사 맞고 기절도하고, 1반 선생님의 별세소식도 아른아른합니다.
TV는 선생님을 찾고를 하면 찾고 싶은 선생님은 4학년 때 김승하 선생님 입니다.
1979년 5학년3반 (곽인자 선생님)
신산초교는 파주시에서 축구로 유명한 학교입니다. 국가대표 출신도 있고, 미래의 축구인으로 도전도 많이 했지요.
용관중 선생님이 축구담당이셔서 축구부로 들어가 학교대표를 하였습니다. 호화멤버인 6학년 1년 선배와 같이 훈련하면서 선착순 뺑뺑이로 엄청 시달렸고, 같이 연습경기하면 우리 후배는 무참히 깨졌었지요.
지금 나이에도 1년 선배를 이길 수가 없습니다. 운동장이 넓어 파주시 대회를 모교에서 개최했는데, 6학년 1년 선배는 준결승에서 탈락하고, 우리 5학년대표가 연풍초 0:0(승부차기3:0),천연초1:1(승부차기4:3) 힘겹게 결승 올라가 파주초를 3:0 승리하여 유일무이한 우승메달을 목에 걸었습니다.
이제야 자랑인 데, 소년체전을 위한 경기도대표선발을 위한 파주군 대표로 뽑혀 신산우승학교에서 40일간 합숙훈련( 교실하나를 메트리스 깔고 합숙)을 해야 하는 데, 여건이 안 돼 봉일천 초교에서 파주군내 타초교 선발과 함께 40일간 수업 없이 훈련했었습니다.
지도 선생님은 봉일촌초교 선생님이시고, 고양교육청에 근무하시고 정년퇴임 하시지 않나 생각됩니다. 파주군 대표로 선발된 이유를 유추한 결과, 지구력은 잼병이어서 선발이 안 될 줄 알았는 데, 상대방 오른발 대상으로 왼쪽접기 개인기가 유일한 특기인 데, 그게 먹힌 거 같습니다.
이영표의 헛다리짚기 기술을 미리 알았다면 신산의 메시가 되지 않았을까 합니다.
경기도선발을 위해 인천에서 안양군 대표와 첫 경기 무승부로 끝나 승부차기 패배하여 경기도대표 소년체전출전 꿈이 날아갔습니다.
40일 무수업의 공백으로, 곽인자선생님의 거주지에서 따로 저의 보충수업을 해주셔서 그 이후로 순조로운 학교생활을 하게 되어 고마움을 느낍니다.
용관중선생님의 짝궁 공덕환선생님,곽인자선생님의 짝궁 백영숙선생님 두분이 학교때 예사롭지 않다고 생각했는 데, 부부가 되셨다는 얘기를 먼훗날 들은 거 같습니다.
1980년 6학년2반(우국환 선생님)
일산 가좌초등학교 교장선생님으로 퇴임하시고 아직도 광탄 소식을 물어보시고, 지금도 소통하고 있는 친구같은 선생님이십니다.
아직도 학년별 학교생활이 새록새록 합니다.
모교인 신산초교의 100주년을 축하드리며, 아울러 신산초교 전,현직 선생님과 동문선후배님들의 건강을 기원합니다.
기억나는 그때 - 53회 김미자
-4학년2학기 파주로 이사를해서 전학간 곳이 신산국민학교-
내가 졸업한 국민학교의 역사가 100년이 되었다니 정말 놀랍고 상투적이지만 정말 괜찮았던 학교였구나 싶다.
내가 4학년2학기 분수리로 이사를 하게되고 새롭게 다니게 된 학교가 신산국민학교이다.
나의 첫 절친 양정화!! 그아이는 분수리에는 부대가 있었는데 그 부대의 대대장이었던 아빠와 예쁜 엄마가 있는 집의 첫째로 동그란 눈에 까무잡잡한 피부 길게 땋아내린 머리에 여리
여리한 여자아이였다.정화도 전학을 다녀서 일까 집이 같은 방향이어서였을까 나랑 금방 친해졌다.
학교 갔다오면 늘 부대에 있는 정화네 집(관사)에 가서 숙제도 하고 놀고 매일 붙어다녔다.
우리가 한참 재밌게 놀던 겨울날이었다.지금 생각해보면 새앙쥐였는데 아주 쬐끄매서 그당시에는 쥐인줄도 모르고 얼어 죽은게 불쌍하다고 땅을 파서 묻어주고 기도까지 해주며 울었던 기억! 지금 돌이켜보니 참 순수했다.
나의 첫 담임 선생님부터 떠올려보면 군대를 갓 제대하고 부임했다던 담임 김기원선생님 그래서 일까... 모든 것에 단체기합이었다 ㅠㅠ
전학가서 젤루 무서웠던 기억(?)
그전까지 맞아본 기억은 숙제가 있는지도 몰라서 못해 맞았던 기억말곤 학교에서건 집에서던 맞아본 기억이 없는데다 너무 무서워 1분단 맞을때 4분단에 있던 나는 미리부터 울고있어서 특히 남자아이들이 나를 이상하게 봤던 기억이 난다.
5학년담임 이희재 선생님은 시험기간 대비해서는 숙제나 수업 시간에 늘 스스로 문제를 만들어오게 하셨다. 그리고 6학년담임 경상도 사투리가 심했던 최응재선생님! 아들 형제를 두었던 자상한 아빠의 잔상으로 기억된다. 우리를 참 이뻐하셨다.
수업 방식을 떠올려보니 4학년 담임선생님은 발표를 많이 시키고, 5학년 담임 선생님은 문제를 스스로 만들어 오게 하고, 6학년 담임 선생님은 경상도 사나이 답게 많이 뛰어놀게 하셨던것 같다.
지금 돌이켜보니 신산초등학교만의 장점으로 시범학교라 하여 노트에 필기를 하지 않고 다른 학교에서는 선생님들이 지도자료로 쓰는 책을 우리가 노트 대신 썼던 신선함!
가을이면 엄청 넓은 운동장에서 운동회가 열리면 내가 기억하는 우리 학교의 축구 스타 이승호,이세종.이경호.이정호 4인방!!
지금의 손흥민 기성용을 능가하는 여학생들의 인기남이 아니었나 싶다.
또 계주를 월등히 잘했던 우리 일년 선배 언니 방앗간집 딸, 정말 스타였다.그들이 운동회의 스타로 청군백군 어디로 가느냐에 따라 약간 덩달아 어깨에 뽕이 들어갔던 듯하다.
하지만 이또한 나만의 조작된 기억일 가능성도 크다...
여름이면 여름부터 연습해서 가을에 다른 학교와 경쟁을 했던 신산 국민학교만의 또다른 큰 행사! 합창대회!
난 수줍음도 많고 중간에 전학가서 그 합창단에는 명함도 못내밀어봤지만 합창단에 선발돼서 활동하던 아이들은 그당시 KBS어린이 합창단 못지않게 연습을 엄청 열심히 했던것 같다. 그 아이들을 담당했던 이수경 선생님은 나의 담임을 맞진 않았지만 그당시 기억의 제일 여성스럽고 이뻤던 선생님으로 기억된다.
나의 국민학교시절을 되돌아보며 다시금 선생님들도 떠올려보고 같은반이었던 아이들과 내가 전학가서 젤루 처음 절친이 되었던 양정화, 그 이후 친구 사인방 박순재,박희정,김윤희, 나 서로 티격태격 하고 몰려 다니기도 했던 기억, 나의 첫 짝사랑 이 아무개~~
50중반에 와서 내가 다녔던 국민학교의 역사가 어느덧 100주년이라는 사실을 마주하며 내어린시절의 기억을 떠올려 볼 수 있는 기회가 돼서 너무 행복하다.
울 동창뿐만 아니라 울 선배님들 후배님들 기억속의 우리 초등학교는 어떤 학교로 기억되는지 궁금하다. 내 초등시절의 소소한 기록들이 남아 있는 내 추억의 저장소!
신산 국민(초등)학교 100번째 생일 축하해~~
담임 김기원선생님과 함께~ 53회 조미경
우리 학교 합창단이 파주시 합창대회에서 좋은 성적으로 수상을 하였다.
대회전 합창대회 수상을 하면 선생님댁에 데리고 놀러가신다는 약속을 지켜주셨다. 어린맘에 집밖에서 잠을 잔다는건 상상을 못했던 시대라 오롯이 우리끼리만의 시간이 주워진것에 설렘과 기대에 부풀어 선생님댁에서 밤새 떠들고, 웃고, 울고, 싸우고, 시끄럽다 혼나고 좌충우돌 일박을 보냈던 우리들...
40여년이상이 지나 다시 보니 너무나 예쁘고 귀엽네.
이사진은 선생님댁에서 요란법석 하루를 보내고, 다음날 집으로 오기전 인천 자유공원 맥아더장군상 앞에서 찍은 기념사진이다.
돌이켜보면 이때가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 아니었나 싶다.
그당시 사진을 누가 찍었을까....맥아더 장군님은 어디로 가시고...ㅎㅎㅎ
용관중 선생님 많이 보고 싶어요~ 52회 경은주
4학년때 우리반 담임이셨던 선생님께서 이듬해 타교로 전근을 가셨습니다. 그시절 저를 자식처럼 업어주시고 용돈도 주시며 정말 예뻐해 주셨던 선생님을 그리워하며 편지를 썼던 것 같습니다.
때로는 엄하시고 때로는 다정하게 우리반을 아껴주셨던 선생님을 늘 잊을 수가 없었습니다.
찾으려고도 애썼으나 맘처럼 되지않을때 친구의 도움으로 연락이 닿아 얼마나 기뻤는지 모릅니다.
아직도 그때의 편지들을 간직하고 계시단 말씀에 가슴이 뭉클해지는 감동을 받았습니다.
이편지 또한 선생님께서 고히 보관중이신 편지중에 하나로 그당시 저의 선생님에 대한 존경과 사랑이 고스란히 베어 있는 것 같아 어른이 경은주가 어린이 경은주에게 애정의 박수를 보냅니다.
이렇게 소중하고 귀한 추억을 간직하게 해주신 선생님께 다시한번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을 전하고 싶고, 시간이 더 흐르기전에 찾아 뵈야겠습니다.
나에게 신산이란? -41회 안재형
국민학교 졸업 전에 약 1년간 축구 선수 생활을 하였다. 어느날 축구부 김선정 선생님께서 축구공을 주며 차보라고 하셔서 냅다 질렀는데 공이 떠서 좀 날아갔나 보다. 그리고 졸지에 학교 대표 축구선수가 된 것이다.
당시 김선정 선생님께서는 저학년 담임을 맡으셨는데 학부모들이 자녀를 선생님 반으로 넣고 싶어한다는 소문을 들은 적이 있다. 키가 작으셨음에도 축구를 잘 하셨었고 엄격하게 지도하셔서 좀 무섭기도 하였지만 졸업할 때까지 잘 견뎌낸 듯 하다.
선생님 연락처는 스마트폰 주소록에 잘 보관되어 있으며, 몇 년 전 전화통화에서 아직 축구를 하시는데 공격 보다는 센터백을 맡는다고 하셨다. 그 어린 시절 금촌에서 있었던 파주 대회에서 승부차기(난 3번째) 끝에 우승으로 돼지를 선물로 받은 것이 제일 기억에 남고, 한 번은 문산국민학교 키 큰 선수의 왼발 슛을 막아내지 못해 아쉬움을 삼키기도 했었다.
축구를 처음에는 작은 운동장에서, 나중에는 큰 운동장에서 하였는데 축구장 두 개를 만들 수 있을 정도로 크고, 여름방학 중에는 서울에서 전지 훈련을 와서 같이 경기를 치르기도 하였다.
그 때 서울 선수들은 덩치도 크고 콧대가 셌는데, 우리 신산 친구들은 끈질기게 맞서 경기를 대등하게 했었다. 친구 석순이는 골아웃이 될 뻔한 공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킥을 하여 골을 만들어 낸 것이 좋은 추억으로 남아 있다.
신산 국민학교에서의 축구생활은 나에게 인생의 주춧돌이라 여겨진다. 특출나지도 않았고 사교성이 없었던 내가 대학생활을 원만히 할 수 있었던 것은 축구 때문이었다.
축구 동아리에서의 맹활약은 친구 및 선후배들과의 교류를 원활하게 해 주었고, 나 혼자만의 힘은 아니지만 서울시 의과대학 축구대회에서 2회 연속 우승한 것은 대학생활을 잘 하는데 적지 않은 도움이 된 것이다.
그 후 군대와 병원에서도 축구는 내 생활에서 빼 놓을 수 없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축구를 좋아하지만, 나는 그 중에서도 축구를 찐하게 좋아하는 사람들과 많은 인연을 맺고 있다.
여러 축구 대회에서 우승 트로피도 들어 봤고, 개인상도 더러 받아보았다. 외국 여행은 한국을 대표하여 세계의사축구대회에 참석하는 축구투어로 하기도 하였다.
나이가 들어 무릅에 이상이 생겨 축구를 중단하였지만, 어렸을 적에 신산 국민학교에서 축구를 같이 한 친구들과 아직도 정기적으로 만나 소주를 기울이고 있다.
철학자 쇼펜하우어는 행복의 90%는 건강에 좌우된다고 하였는데, 축구를 통해 건강을 유지하는 방법을 터득하였으니 이보다 더 큰 행운이 어찌 있으랴. 축구와 함께 한 반백년이 넘는 인생길이다.
어느날 한글 호를 만들고 싶었는데, 新山국민학교 그리고 廣灘중학교에서 한자씩 그 뜻을 차용하여 뫼여울이라 지었다. 인생 후반부에 어린 시절을 생각하니 신산, 너에게 참 많은 빚을 지었네 그려. 고맙고 사랑한다.
고맙고, 그리운 그 시절 - 41회 홍종숙
내가 졸업한 신산초등학교가 100번째 생일을 맞이한다. 41회 졸업생이니 내 나이도 고희를 바라본다. 수없이 많은 세월을 흘려보낸 작금에 내면 깊숙한 곳에 자리잡고 있던 초등학교 시절의 나를 끄집어 내려니 6년의 긴시간 동안 어떤 모습으로 무엇을 하며 보냈는지 아련하기만 하다.
기나긴 세월이 지나 들쳐 본 사진첩 속의 어린 내가 머리를 질끈 묶고 친구와 어깨동무를 하고 천진스레 웃고있다.
기억을 더듬어 본다. 두근두근 입학식, 만국기 휘날리는 운동회, 소령원으로의 소풍, 보광사 수학여행, 졸업식이 있기까지 수많은 추억들이 켜켜이 쌓여있다.
그 기억 속에 또렷이 떠오르는 것은 3학년 담임선생님이 군입대로 떠나시던 날, 난 무엇이 그리도 서러워 펑펑 울었던지 아직도 생생하다. 6학년이 되어서는 시험이 끝나면 내 차지가 되었던 채점. 담임선생님의 믿음과 사랑을 받고 있다는 생각에 얼마나 신바람나게 열심이었던지…
훗날 내가 교직에 있울 때 그때의 채점심부름이 밑거름이 되어 채점은 정말이지 끝내주게 잘 했던 것 같다. 과거의 시간들이 차곡차곡 쌓여 오늘의 내가 있기까지 함께한 선생님들과 친구들이 무척이나 고맙고 그립다. 오랫만에 어린 날의 나를 돌아보며 모교의 100년을 축하하고 찬란하게 빛나기를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