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산초 개교100주년 기념 추억-파주위키
2026년 신산초교100주년 기념관련한 추억의 스토리이다. 신산초등학교는 1926.4.7일 개교하여 2026년에는 100주년이 된다.
신산초교 100주년 기념사업 추진위원회는 다양햔 사업을 준비하고 있으며 그 중 힉교와 지역에 대한 100년 역사를 담은 100년사 출판한다.
- 작지만 작지 않은 광탄면장의 꿈-신산초 42회 이건희
- 무꽃 향기가 가득했던 그 시절 -42회 이영희
- 신산에서 피어난 추억의 조각들-48회 조원식
- 45년 전 사진 2장의 추억 - 55회 양성천
- 1984년 대운동회 보고서 -59회 이승철
- 그때 그곳엔... - 53회 안지미
- 전쟁 속에서 피어난 추억들 - 24회 서영우
- 윤관장군묘에서 보낸 국민학교 시절 - 22회 오수영
- 신산초등학교에서의 축구 지도 - 용관중 교사(1977~1979재직)
- 나의 초등 6년사 - 51회 안덕기
- 기억나는 그때 - 53회 김미자
- 담임 김기원선생님과 함께~ 53회 조미경
- 용관중 선생님 많이 보고 싶어요~ 52회 경은주
- 나에게 신산이란? -41회 안재형
- 고맙고, 그리운 그 시절 - 41회 홍종숙
작지만 작지 않은 광탄면장의 꿈-신산초 42회 이건희
나는 광탄면 창만리 송라동에서 5남매중 3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가 6.25사변 때 피난 가다가 기차에서 떨어져 다리 부분이 불구가 되어 일을 전혀 할 수가 없었다,
아버지는 병을 고치기 위해 오직 하나님께 매달리며 기도만 하셨고 어머니 혼자서 가정을 이끌어 가려고 날품팔이와 궂은 일을 밤늦게 까지 하셨으나 끼니를 때울 수 없을 정도로 어렵게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부모님은 막내인 동생보다 체구가 작고 몸이 약한 나를 다른 친구들과의 경쟁에서 뒤쳐지지 않게 하기 위해 9살에 초등학교를 입학시켰다. 집에서 학교까지는 뒷동산을 넘어 논밭길을 지나 쓰레기장 고갯길로 40분정도를 걸어서 다녔다.
초등학교 3학년때로 기억된다. 그 당시 육성회비가 150원 정도였으나 하루 벌어 하루를 살아가는 가정에서는 육성회비를 제때 못내는 학생이 많이 있었다. 선생님은 육성회비 납부를 독촉하였고 심지어 수업을 안 시키고 집에 가서 육성회비를 가져 오라고 돌려 보내곤 하였다.
그럴때마다 나는 많이 위축이 되었고 육성회비를 밀리지 않고 공부를 할 수 있는 친구들을 부러워 했다.
나는 도시락 대신에 등굣길에 딴 아카시아꽃으로 점심을 때우기도 하였고 귀갓길에는 산을 돌아 다니며 새 둥지를 찾아 새알로 끼니를 때운적도 있었다.
현재 양천한의원 앞에 미군부대와 병원에서 배출한 쓰레기장이 있었다 그곳에서 깨진 유리병 조각과 캔 꼭지, 주사기바늘 등을 주워 팔기도 하였고, 광탄삼거리에 위치한 아이스케키 공장에서 아이스케키를 받아다가 "아이스케키, 하~드"라고 외치며 광탄시가지를 돌며 장사를 하였다. 당시 나무로 짠 아이스케키 통에 얼음주머니와 아이스케키 20개를 담아주어 1개를 5원에 팔면 2원이 남았다.
더운 여름철 뙤약볕에 앉아 광탄5일장에서 야채 노점상을 하는 어머니에게 제일 먼저 달려가 시원한 아이스케키를 드렸고 돈 대신 감자나 옥수수 등 야채를 받고 아이스케키를 쉽게 팔았다.
체구가 작은 초등학생이 아이스케키 통을 질질 끌고 다니면서도 장사를 잘하자 공장에서 다른 학생들을 데리고 오라 하여 선생님 아들인 우리동네 덩치가 큰 친구를 데려갔으나 그친구는 팔지도 못하고 아이스케키가 녹으니까 통에 걸터앉아 혼자서 다 먹어 치웠다고 한다.
어느날 꼬마 여자 아이가 100원짜리 지폐를 주면서 아이스케키 2개를 달라고 하여 팔고 거스름돈을 바꿔 가지고 그 자리에 와보니 꼬마 아이가 없었다. 그뒤로는 꼬마 아이 부모님에게 혼 날까봐 아이스케키장사를 그만두었다.
겨울철에는 어머니가 솔잎나무를 머리에 이고 광탄시장에 가서 팔았다. 쓰레기장 고개를 넘어갈 때 한번 쉬고 다시 머리에 일 때 나무를 들어주는 역할을 하기 위해 내가 따라 다녔고 나무 한 단에 120원을 받으면 우선적으로 육성희비를 달라하여 밀리지 않고 납부하였다.
집에오면 소먹이용 꼴을 베거나 등거지나무를 하는 등 부지런하게 움직여서 그런지 우리 반에서 팔씨름은 나를 당할 친구가 없었고 뜀박질도 잘하여 운동회때마다 1등을하여 공책3권을 탔으며 반대표 육상선수로 출전 하기도 하였다.
1978년 나는 당시 파주군 공무원이 되었고 2012년 광탄면장으로 발령 받으면서 작지만 작지 않은 꿈을 펼칠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신산초교의 기억들이 나의 인생을 알차게 하는 원동력이 된 것 같다.
무꽃 향기가 가득했던 그 시절 -42회 이영희
추억은 아려도 아름답고
그리움은 괴로워도 행복하다고
어디선가 읽었던 구절이 새삼 떠오릅니다.
낼모레면 어언 나이 70을 바라보니
이젠 초등학교 시절의 순수했고
아름다웠던 추억들이 점점 희미해 짐에
가슴은 철렁해지고
눈시울은 뜨거워지기만 합니다.
조각조각 흩어진 추억들의 잔재가
이토록 가슴을 울리는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초등학교를 입학했을 때는
지금 교무실동이 있는 곳 복도에는
외부와 차단되는 담이나 창문이 없는
기둥으로만 되어있었습니다.
그때는
오전반과 오후반이 있어
한주는 오전반, 다시 또 한주는 오후반으로
다니면서 공부한 적이 있지요.
당시 저는 조리면 오산리에 살았지만
아버지가 그래도 조리면 덕암초등학교보다는
좀 더 큰물인 광탄에 신산 초등학교를 다니라고 해서
어떤 때는 걸어서도 다니고
또 어떤 때는 지금의 오백원 은색동전만 한 크기의
5원을 내고 버스를 타고 다니기도 했었습니다.
걸어 다닐 때는 지금은 없어진 미군부대( 그 당시 사사부대) 뒷길
논두렁을 걸어 다녔던 기억이 있습니다.
봄이면 무꽃이 노랗게 피어서
나비들이 많이 날아들었는데
하루는 노랑나비 한 마리가 꿀 따는 것보다는
학교 가는 저랑 놀고 싶다고 얼마나 보채던지...
그만, 어린 나이에 그 유혹에 넘어가
학교를 땡땡이 친 날도 있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어떻게 그 시절에
그런 땡땡이 칠 생각을 했는지
도무지 이해가 안 되지만
영화처럼 아름다운 영상 속의
주인공이었던 저를 생각하면
그리 나쁘지는 않았다는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
지금은 개근상의 의미가 없겠지만
6년 개근에 그날 하루 빠진 정근상을
졸업식날에 학년대표로 나가 상을 받은 적이 있는데
우등상도 아니고 정근상대표가
왜 그리도 부끄러웠던지...
그렇잖아도 아주 내성적인 내가
상 받으러 나간 단상에서 고개도 한번 못 들고
그냥 상만 받고 내려온 기억이
몽실몽실 피어올라 입꼬리가 실실 올라갑니다.
봄가을로 가는 소풍날은 또 어땠게요?
소풍 며칠 전부터 잠 못 이루며
제발 비야 오지 말아라...
하느님 비 오지 말게 해 주세요....
하며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하면서 자기도 했었는데
해님 방긋 웃어주던 소령원 소풍날엔
차 한 대만 지나면 먼지가 연기처럼 폴폴 날리고
플라타너스 나무들이 길 양옆으로 줄지어 있는
신작로를 따라 마장리 고개를 넘어
먼지구댕이 속으로 걸으면서도
그저 좋다고 하하 호호 친구들과 함께 웃던
그날이 최고의 날로 행복했던 일들.......
지금 생각해 보면 어찌 그리 먼 길을
힘들다는 생각이 단 1도 없이
그리 잘 걸어서 다녀왔는지
참으로 신통방통하기만 합니다.
그리고 또
월요일마다 하는 조회시간!
운동장에 전교생이 모여 함께 목청껏
불렀던 애국가와 교가의 제창!
특히 교가를 부를 때는 애국가보다 훨씬
가슴이 벅차오르는 학교사랑의 애교심을
담뿍 담아 부른 적이 많기도 했지요.
지금도 교가를 입속에서 웅얼거리면
가슴이 뭉클해지며 가슴이 벅차오릅니다.
팔십 리 수도 서울 등에 지고서 ♪
푸른 산 맑은 내를 가슴에 안고 ~♬
아름다운 우리 고장 향기 마시며 ♪
몸과 마음 닦고 가는 우리의 신산 ~♬
그때 함께 입모아 부르던 친구들 중에는
벌써 하늘에 별이 된 친구들도 있어서
가슴이 메어져 오기도 하네요.
노트 수십 쪽을 쓰고도 남을
많은 추억들은 내 친구들 추억과 동일함에
많은 공감을 할 것 같습니다.
그 원초적 추억의 화수분이고
내 인격을 형성해 주었던
유년시절의 추억 되새김은
세월이 이렇게 흘러도 내 가슴에
행복이라는 이름으로
따듯하게 각인되어 있습니다.
그런 여러 잊지 못할 추억들을 간직하고 있는
자랑스러운 나의 모교 신산초등학교가
벌써 100주년이 된다 하니
너무나 자랑스럽기 그지없습니다.
나날이 발전하는 학교의 모습을 볼 때면
자긍심도 생기고 저절로 가슴이 쫙 펴지고
어깨가 으쓱으쓱입니다..
앞으로도 더욱 발전하는 신산이 되길 바라면서
많은 후배들에게도 꿈과 희망의 학교
자랑스럽게 빛나는 신산이 되길
진심의 마음으로 기원합니다.
영원하라 신산이여~~~~!!!
신산에서 피어난 추억의 조각들-48회 조원식
신산초등학교 시절을 떠올리면, 여러 가지 생생한 기억들이 스쳐 지나갑니다.
저는 어릴 적 수줍음이 많고 평범한 초등학생이었어요. 코흘리개 시절을 지나며 친구들과 함께 웃고 뛰놀던 시간은 제게 큰 의미로 남아 있습니다.
정확히 몇 학년 때였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내 짝꿍은 신동민이었고, 담임 선생님은 홍 00 선생님이었습니다.
어느 날 사소한 말다툼이 싸움으로 번져 혼이 났지만, 선생님께서는 우리 둘을 똑같이 공정하게 혼내 주셨습니다. 그때의 기억은 아직도 선명합니다.
또 다른 추억 하나는, 수업 시간에 선생님 눈을 마주치거나 발표를 해야 할 때면 숨고 싶을 정도로 수줍음이 많았다는 것입니다. 책을 읽으라는 말 한마디에도 심장이 떨렸고, 지금 생각하면 왜 그리도 내성적이었는지 스스로도 웃음이 납니다.
운동회 때마다 달리기를 해야 했는데, 달리기가 싫어서 도망 다니고 피하려고 했던 기억도 떠오릅니다. 그럼에도 결국은 운동회에 참여하며 그 순간들을 함께했던 나날들이 소중한 기억이네요.
4학년 때 짝꿍이었던 김종선과는 책상에 선을 그어 서로 넘지 말자고 경계를 했던 일도 있었네요. 왜 그랬는지 지금 생각하면 별것 아닌 일인데, 입가에 웃음이 절로나네요.
그당시에는 전과 같은 참고서를 사본 적도 없었지만, 공부는 뒷전이고 감성 지수로 나름대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당시 감성충만은 신산초등학교 운동장이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넓고 웅장하게 느껴졌던 운동장.
파주시에서 가장 큰 운동장이라 경기도 단위 행사도 우리 학교에서 열렸던 기억이 납니다. 그 모든 것이 정말 소중한 추억으로 남아 있네요.
그렇게 신산초등학교에서 보낸 날들은 하나하나 소중한 추억으로 자리 잡았어요.
지금 돌이켜보면 그때의 시간들이 저를 건강하고 밝게 자라게 해준 것 같아요.
돌이켜보면, 내성적이었던 어린 시절을 지나 지금은 외향적으로 변한 나 자신을 돌아보며, 그 시절의 모든 순간이 내게 추억의 한페이지로 남아 있음을 느낍니다.
그리고 제가 다녔던 신산초등학교가 100주년을 맞이했다는 소식은 정말 큰 기쁨으로 다가왔습니다.
이렇게 소중한 추억을 다시 떠올릴 수 있어 행복하고, 신산초등학교의 100주년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앞으로도 신산초등학교가 더욱 빛나고, 많은 이들의 마음속에 따뜻한 기억으로 남기를 바랍니다.
45년 전 사진 2장의 추억 - 55회 양성천
그 때의 사진 2장을 기억하며
신산55회 양성천
두근 거리는 1979년 입학식
1979년 3월 신산국민학교 1학년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입학을 합니다.
좌측부터 친구 창희,선희, 나, 그리고 종구
선희야!! 울엄마가 사진 찍어주시는데 왜이렇게 째려본다니...!!ㅎㅎ
카메라가 너무도 낯설은 우리의 어릴적 그때...이해하고도 남을 표정이다.
명찰도 정식으로 이름을 새기기전 부모님 자필?로쓴 임시명찰인듯하다...
창희는 어머님이 가재손수건도 챙겨 주셨네^^
독수리 오형제들
1984년 6학년 1반 조성숙 담임선생님과 그당시 나름 독수리오형제로 동네 지킴이
활약을 했던 병철,원일,교칠,재성,그리고 나
학생수가 늘어나면서 교실증축공사가 한창이었지만, 신축교실에서 생활은 전혀 못해보고 졸업....
1984년 대운동회 보고서 -59회 이승철
1984년 신산초등학교 가을 대운동회
1984년 가을, 신산초등학교는 매년 기다리던 대운동회를 맞이하고 있었다. 파주에서 가장 큰 학교 운동장은 다양한 색으로 물든 가을의 정취를 한껏 담고 있었고, 만국기로 하늘을 가득 채웠다. 울긋불긋한 단풍이 나뭇가지에 걸려 있는 모습은 마치 그 자체가 그림 같았다. 아이들은 운동회 날을 손꼽아 기다렸고, 모두가 한껏 들떠 있었다. 아이들의 얼굴에는 떨리는 기대와 설렘이 가득했다.
59회 4학년 1반 이승철
청군 대 백군 응원전과 전통의 향기
1984년 가을, 신산초등학교의 운동회는 그 어느 해보다 특별했다. 가을 햇살이 운동장을 따뜻하게 감싸고, 운동회 준비가 한창인 가운데 학생들은 모두 설레는 마음으로 아침부터 분주하게 움직였다. 그러나 올해 운동회는 다른 해와 달랐다. 바로 청군과 백군으로 나누어져 펼쳐지는 응원전과 전통적인 민속놀이들이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운동회는 단순한 경기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었고, 그것은 바로 친목과 단결을 다지는 중요한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응원전의 시작
아침이 밝고, 운동회가 시작되자마자 모든 학생들은 자신이 속한 팀인 청군과 백군으로 나뉘어 운동장에 모였다. 각 팀은 티셔츠와 바지에 팀 색깔에 맞는 리본과 깃발을 달고 있었다. 운동회는 첫 번째로 펼쳐지는 응원전으로 분위기가 달아올랐다.
청군은 “청군 화이팅!”을 외치며 자신들의 응원단이 펼칠 화려한 춤과 구호를 준비했고, 백군은 “백군은 못 이긴다!”를 외치며 자신만의 리듬과 구호로 맞섰다. 각 팀의 응원단들은 가슴 속 깊은 열정을 다해 구호를 외쳤고, 그 소리는 운동장 가득 울려 퍼졌다. 아이들의 얼굴에는 경쟁의 열정과 함께, 서로를 응원하는 훈훈한 미소가 떠올랐다.
군화 신고 달리기
운동회에서 빠질 수 없는 경기가 바로 군화 신고 달리기였다. 이 경기는 매우 특별한데, 평소에 신지 않는 딱딱한 군화를 신고 달려야 하기 때문이다. 처음엔 군화의 무게와 딱딱한 발끝에 학생들이 당황하기도 했지만, 곧 그들은 스스로의 한계를 넘어서는 도전을 시작했다. 특히 이 경기는 청군과 백군의 승패를 가를 중요한 순간이었기 때문에 더욱 치열하게 펼쳐졌다. 어느 팀이든 최선을 다해 달리며 응원단의 구호에 맞춰 기운을 내며 결승선을 향해 달렸다. 운동장에서는 아이들의 웃음과 함께 구슬땀이 흘렀다.
태극기 행진
응원전이 끝난 후, 이른 아침부터 준비했던 태극기 행진이 시작되었다. 모든 학생들은 대열을 맞춰 한 줄로 서고, 체육관에서 준비한 태극기를 조심스럽게 들고 운동장을 한 바퀴 돌았다. 태극기 아래 모든 학생들은 차분한 마음으로 나라에 대한 자부심을 느끼며 행진을 했다. 그들의 발걸음이 잔잔하게 울리는 운동장 위에서, 대한민국의 자랑스러운 역사를 되새기며 느꼈던 그 감동은 시간이 지나도 잊을 수 없을 정도로 강렬했다.
공굴리기
이어서 열린 공굴리기는 운동회의 전통적인 놀이였다. 학생들은 공을 양손으로 굴려 목표 지점까지 가장 빨리 보낼 수 있는 팀을 뽑는 경기였다. 물론 공이 굴러가는 동안 제멋대로 방향을 틀기 때문에 각 팀의 전략이 중요했다. 청군과 백군 모두 치열하게 공을 밀어내며, 그 과정에서 아이들은 서로 협력하고, 때로는 실수에 웃음을 터뜨리며 이 경기를 즐겼다. 목표 지점에 공을 놓고서 승리를 쟁취한 팀은 큰 환호를 받았고, 결과와 관계없이 모두가 함께 기뻐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부채춤
이후, 학생들은 부채춤 공연을 선보였다. 부채를 손에 쥔 아이들은 그 부채를 가볍게 흔들며 아름다운 춤을 추기 시작했다. 운동장 한가운데서 그들의 움직임은 마치 가을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처럼 우아하고 정교했다. 부채가 휘날릴 때마다 친구들은 환호성을 질렀고, 공연이 끝날 때마다 아이들은 서로를 격려하며 손뼉을 쳤다.
차전놀이
마지막으로 열린 차전놀이는 학생들이 가장 즐거워했던 민속 놀이였다. 차전놀이는 대개 두 팀으로 나누어 서로를 밀어내는 경기였는데, 운동회에서는 청군과 백군이 한 팀이 되어 상대방을 밀어내기 위해 힘과 전략을 겨루었다. 경기장 한가운데서 서로 밀고 당기며, 웃음과 함께 아이들의 힘이 합쳐졌다. 그들의 얼굴에 떠오른 웃음은 운동회의 최고의 하이라이트였다.
운동회의 끝과 교훈
1984년 신산초등학교 가을 운동회는 단순한 경쟁을 넘어서, 아이들에게 협력과 단결의 중요성을 일깨워준 특별한 시간이었다. 청군과 백군은 물론 승패를 떠나 모두 함께 즐겼고, 그들의 마음 속에는 ‘함께하는 즐거움’이 깊게 새겨졌다. 운동회가 끝난 후, 아이들은 서로의 손을 잡고 운동장을 돌며 웃으며 이야기했다.
“내년엔 우리 팀이 더 잘할 거야!”
“그래, 모두 힘을 합치면 뭐든지 할 수 있어!”
이렇게 1984년 신산초등학교 가을 운동회는 그 어느 때보다 기억에 남을 추억으로 남았다.
운동회 사진
그때 그곳엔... - 53회 안지미
산수유 꽃이 벌써 피는가 싶더니 엄마네 목련이 하얗게 옷을
갈아입고 우아하게 나풀댄다.
성질 급한 개나리는 계절을 무시하고 내렸던 눈을 비집고
노오랗게 피었다.
노랑 병아리 색 개나리를 보니 갑자기 생각난 신산초등학교..
그 땐 국민 학교였던 운동장 주변에 봄을 색칠하며 피었던 개나리와 진달래가 생각났다.
세월을 건너 오십을 넘긴 나이는 어린 시절 친구들과 뛰놀았던 국민 학교 운동장에 머무는 듯 청춘이다.
어릴 적 나에게 한없이 넓었던 운동장이 이리도 작았나 싶다.
그 넓은 운동장에서 손수레를 끌고 밀며 삐라도 줍고 작은 돌멩이도 치워가며 돌았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봄이면 정문 옆 뽕나무 밭을 기준삼아 잡초도 뽑았는데,
몰래 따먹은 달달한 오디 덕에 한껏 까매진 입술을 하고 안 먹은 척 하는 말썽꾸러기를 보며
“너!! 잡초 뽑으랬더니 뽕 따먹었냐?”
하시는 쌤의 귀신같은 신통력에 순진하게 놀라기도 했다.
학교가 끝나면 운동장 한 켠에 가방과 신주머니 쌓아놓고,
친구들과 옹기종기 무리지어 놀기도 했다.
공기놀이, 고무줄놀이, 땅따먹기, 사방치기, 딱지치기,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체력이 무럭무럭 자라나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그 추억의 운동장엔 놀이를 하는 무리, 놀이를 방해하는
무리들이 뒤엉켜 왁자지껄 소란스럽다.
말괄량이들 고무줄 끊고 도망치다 잡힌 개구쟁이는 등짝 한대 맞고 씩씩대다 언제 그랬냐는 듯 또 방해하는 그들만의 놀이를 즐긴다.
지금은 작게 보이지만, 넓디넓게만 보였던 운동장은
말썽꾸러기, 말괄량이, 개구쟁이들을 정겹게 품어주었다.
그 뿐인가. 교실 안 풍경도 가관이고 웃겼다.
수업 중에 누군가
“우웩!! 방귀냄새!!!” 하면
“수색!!!”
한마디에 주변 친구들 엉덩이에 코를 대고 킁킁대던 그 친구 얼굴은 아직도 잊을 수 없다. 다들 누군지 알지? 난 아는데~~
초등학교의 최고참 6학년... 강렬한 태양아래 줄긋고
발야구 할 땐 콧잔등이며, 이마와 목 뒷덜미가 빤질빤질
그을리든 말든 즐겁기만 했다.
6학년엔 별관이었던 1반과 2반쪽의 추억도 생생하다.
그때 그 곳 지금은 없어진 작고 예쁜 연못이 학교의
상징과도 같았다.
그 커다란 플라타너스 나무에서 떨어져 복도를 기어 다니던
송충이를 참 많이도 잡아댔다.
편지봉투 떠질듯 모아낸 코스모스 씨앗을 들고 길거리를
줄지어 다니며 뿌리고 싹이 트면 뭉텅이로 난 싹을 속가서
빈곳에 심고 가꿔 시내 길가엔 코스모스도 하늘하늘 예뻤었다.
잔디 씨도 모아냈었는데 그땐 어디다 쓰려고 했는지 알지 못했지만, 숙제 검사하듯 내기도 했다.
맞다!! 지금은 사라진 폐품수집도 있었지~
집집마다 묵은 신문지, 공병 치우는 날이 그 날이었다.
그때 그 시절.....
요란하게 뛰놀던 많은 개구쟁이, 말괄량이들아
다들 어디서 무얼 하고 있니~~ㅠㅠ
까무잡~잡~한 추억의 녀석들이 운동장에 있다.
지금은 소식이 끊겨버린 장꾸 선생님과 친구들아 보고싶다~
전쟁 속에서 피어난 추억들 - 24회 서영우
해방 후에 신산초등학교에 입학했는데, 당시 초등학교는 일제 시대부터 있던 만장산 아래 지금의 광탄중·고등학교 자리에 위치해 있었다.
6.25 전쟁이 발발하자 초등학교에 인민군들이 주둔하게 되어, 우리 3학년만 면사무소 뒤 과거 양조장 터에 있던 광탄면사무소 소유의 일자형 창고로 옮겨 휴전될 때까지 공부했다.
그 후 다른 학년이 천막을 치고 재실에서 공부하고 있던 윤관장군 묘로 옮긴 후, 몇 년 후 다시 광탄농업협동조합 하나로 마트 쪽으로 학교를 옮긴 후 졸업했다.
휴전이 되고 일정 기간이 지난 후 미군의 도움으로 지금의 신산초등학교 자리로 학교를 옮기게 되었다. 6학년 때는 오후에 광탄삼거리를 지나 새롭게 학교를 신축하는 장소까지 걸어가서 흙과 자갈과 벽돌을 나르는 등 공사현장에 투입되어 많은 일을 했다.
6.25 전쟁 후 만장산 아래 초등학교에 인민군들이 거주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아침 우리나라 전투기가 만장산 넘어서 날아와 인민군들을 공격하기 위해 일자형 건물인 초등학교 건물 양쪽에 휘발유 통 2개를 떨어뜨려 순식간에 학교 건물이 불에 타는 것을 목격했다. 그 당시 학교는 학생도 없고 선생님들도 모두 피난 가고 인민군들만 있어서 불을 끌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소풍 갈 때 친구들과 줄을 서서 걸어가고 있었는데 미군들이 키우던 큰 개가 달려들어 우리를 공격하려고 했다. 주변에서 지켜보던 어른이 뛰어서 도망가면 위험하니 가만히 있으라고 했다. 친구들은 모두 도망갔으나 나만 서 있었는데 개가 나를 물었고 동시에 놀라서 넘어졌다. 넘어지며 나무 꼬챙이에 엉덩이를 찔려 몇 달간 고생했던 초등학교 시절의 힘들고 안 좋은 추억이 생각난다.
초등학교 때는 왜 그랬는지 모르지만 동네끼리 패싸움을 심하게 했다. 특히 신산리, 새술막, 화산 3동네 학생들끼리 학교 가는 길목을 막아놓고 많이 싸웠다. 그 당시에는 남의 동네도 함부로 가지 못했다. 자기 동네에 타 동네 아이들이 오면 함께 혼내 주었던 안 좋은 문화가 있었던 것 같다.
선생님들은 열악한 교육환경 속에서도 열심히 가르쳐 주셨는데, 한 가지 안타까운 것은 그 당시 어린 학생들이 감당하기 버거울 정도로 체벌이 심했다. 학생 인권을 중요시하지 않았던 시대였지만, 소래울쪽에 살고 계셨던 이○○ 선생님이 보리수나무 회초리를 여러 개 가지고 다니면서 머리에서 피가 날 정도로 지나치게 체벌을 하여 지금까지도 우리 24회 동창들이 만나면 그 선생님을 잊지 않고 많이 아쉬워한다.
6.25 전쟁 기간에는 인민군이 이북으로 올라가면 수업하고 다시 내려오면 수업을 못하는 상황이 반복되었다. 교실은 천막을 치고, 책상은 탄피 상자, 책가방은 보자기를 사용했다. 겨울에는 학생들이 반별로 집에서 장작을 가져다 난로를 때며 어렵게 학교생활을 하여 24회는 40명이 졸업했다.
윤관장군묘에서 보낸 국민학교 시절 - 22회 오수영
나는 서울에서 태어나 생활하다가 일제의 탄압이 심해지자 해방 전에 온 가족이 분수3리로 이사를 왔다. 초등학교 때 이름은 태랑이었고 호적에는 수영으로 되어 있지만, 동창들 사이에서는 지금도 태랑이라고 부른다.
8.15 해방 후 만장산 아래 지금의 광탄중·고등학교 자리에 일제 시대부터 있었던 신산초등학교에 입학했다. 당시에는 풍금, 운동장, 책상과 교실이 있어 지금의 교육환경에 비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교육환경이 좋았다.
6.25 전쟁이 발발하자 학교에 인민군들이 주둔하게 되어 학교를 윤관 장군 묘로 이전했다. 포대에 흙을 담아 낮은 담을 치고 가운데 천막을 쳤으며, 천막 안에는 탄피 상자를 책상처럼 놓고 공부했다. 일부 학생들은 재실에서 공부하기도 했다.
저학년 학생들은 처음에는 윤관장군묘로 오지 않고 면사무소 뒤 과거 양조장 터에 있던 광탄면사무소 소유의 일자형 창고에서 공부했다. 휴전 후 몇 달이 지나자 저학년들도 윤관장군묘로 옮겨와 전교생이 함께 공부했다. 우리는 21회 선배들의 뒤를 이어 다음 해 윤관장군묘에서 졸업했다.
초등학교 입학 당시에는 여학생들도 있었지만, 전쟁 중이라 위험한 상황이 많아 여학생들이 등하교하기에 안전하지 못했다. 졸업 시에는 30명이 졸업했으나 여학생은 한 명도 없었다.
어려운 여건 속에서 학교를 다녔어도 친구들과 친숙하게 화합하며 가족적인 분위기 속에서 즐겁게 생활했다. 공부를 열심히 할 수 있는 환경은 아니었고, 공부는 각자 알아서 해야 했다. 공부를 못하면 1년간 낙제하는 제도가 있었지만, 학교를 7년 다니면 무조건 졸업장을 받았다. 그래서 초등학교를 졸업해도 구구단과 한글을 모르는 친구들이 많았다.
배고프고 힘들었지만 윤관장군 묘에서 공부 대신 함께 어울려 놀기만 했던 시절이었다. 당시 선생님은 엄하셨던 이수열 선생님, 송라동에 사셨던 안도승 선생님, 방축리에 사셨던 심영택 선생님이 계셨고, 후원회 선생님으로 사청에 사셨던 김성해 선생님이 계셨다. 후원회 선생님은 등록금으로 내는 쌀과 보리를 걷는 지금의 행정실 업무를 담당하셨다.
후배들에게는 미 군정에서 분유를 제공해 주어 크게 배고프지 않았으나, 우리는 전쟁 중이라 모두가 배고픈 시기였기에 도시락을 가져오는 학생이 많지 않았다. 그래도 겨울에 우리들이 가져온 장작으로 난로를 피우면 난로 위에 도시락을 올려놓고 데워 먹었던 기억이 난다.
교실, 운동장, 책상도 없고 풍금도 없는 윤관장군묘 시절, 초등학교 생활을 마무리하는 졸업식은 새끼줄을 걸어놓고 사진 찍는 것으로 대신했다.
윤관장군 묘의 재실에서 계속 공부할 수 없어서 후배들은 지금의 광탄농업협동조합과 하나로 마트가 있는 자리(과거 경남기업에서 운영하던 세탁소 자리)에 미군들이 중장비를 이용해 터를 닦아주고 군용 텐트를 제공해주어 학교를 옮겨 공부를 계속했다.
신산초등학교에서의 축구 지도 - 용관중 교사(1977~1979재직)
이 글은 2005년 홍천군 삼생초등학교에서 테니스를 지도하며 “테니스 레슨 카페”를 만들면서 작성했던 『신산초등학교에서의 축구 지도』라는 글을, 이번 신산초등학교 개교 100주년 기념 원고 모집에 글을 올리고자, 취지에 맞게 고쳐서 작성했습니다.
기억을 되살리기에는 너무 까마득한 일이라 제대로 기억해낼까 하는 걱정이 앞섭니다.
1977년 초임으로 3학년2반 담임을 맡게 되었는데(신산51회 졸업생들)
지금은 말도 안되는 얘기지만 그 당시에는 아이들 성적 올린다는 이유로 손바닥 때려가면서 열심히 가르쳤습니다. 초임 교사라 아이들을 하교시키면, 다음 날 아침 아이들을 볼 때까지 그리워지고, 아침까지의 시간이 너무 길게 느껴질 정도로 아이들한테 정도, 애착도 많이 가던 그런 시절이었습니다.
당시에는 각 학교마다 육성종목을 지정하여 학교 운동부를 지도하는 것을 굉장히 중요시 여겼고, 따라서 젊은 남자 선생님이라면 한 종목씩 맡아, 방과후면 운동장에 나가서 아이들 운동 지도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겨졌습니다.
지금보다 의복이나 난방 시설이 굉장히 열악한 중에도, 한겨울 혹한기에 운동장에 트랙을 그려 눈 치우는 것은 당연하고(그렇지 않으면 서슬 퍼렇던 교육청 장학사의 질책을 엄청 받음), 좀 심하게 나가는 학교에서는 트랙을 빙 돌아가면서 비닐하우스를 만들어 전천후로 운동부를 지도하도록 하였습니다.
당시 젊은 남자 선생님으로는 전주교대(전주인지 목포인지 정확하지 않음)를 저보다 한 해 먼저 졸업한 P 선생님과 인천교대를 저보다 한 해 뒤에 졸업한 K 선생님, 그리고 저, 이렇게 3명이었습니다. 그래서 축구부는 P, 남자 배구부는 제가, 여자 배구부는 K, 그리고 육상부는 우리보다 10세 정도 연상이고 체육주임을 맡고 있던 김용직 선생님이 맡았습니다.
저는 남자 배구부를 지도하면서 당시 신산초등학교는 축구부 위주로 운영되기도 하였고, 중고등학교나 교육대학 시절에 운동을 좋아하다 보니 반대표로 뛸 정도의 실력만 있었지 배구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어서, 그저 그렇게 나름대로 열심히 지도하는 형편이었습니다.
파주군은 축구군이라 불릴 정도로 축구에 대해 열기가 높아 1978년 군 체육대회가 열렸을 때에는 6학년부 16팀, 5학년부 15팀이 참가할 정도였습니다. 현재 국가대표 트레이닝 센터가 파주군에 위치한 것이 아마 그런 열기가 이어져 그렇게 되지 않았나 추측해 봅니다.
축구부는 6학년을 중심으로 저와 연배가 비슷한 C 코치가 지도하고 있었는데, 가을이 되자 광탄중학교를 졸업하고 당시 해외 파견이 인기가 있던 시절이라 중동 지방으로 해외근로자로 일하러 나가기 위해 준비 중이던 정해영(이름은 정확하지 않음)코치가 4학년을 지도하게 되었습니다. 지금부터의 이야기는 정해영 코치와 4학년 축구부를 중심으로 이어집니다.
정해영 코치는 신산초등학교와 광탄중학교 축구부 주장 출신으로 후배 학생들을 지도한다는 입장으로, 지도 방식은 스파르타식이었지만 굉장히 열심히 지도하였습니다.
지금으로서는 축구 실력이 가늠이 안 되지만, 당시 파주군의 축구 실력과 축구 지도 능력으로 보아 뛰어났을 거라고 생각됩니다. 더구나 그 정해영 코치를 신산초등학교에서 지도한 코치 선생님이 부천에서 축구를 가르치고 있었는데, 아주 뛰어난 지도자로 그 분이 가르친 골키퍼 최인영 선수, 수비에 전종선 선수 등이 몇 년 후에 국가대표가 될 정도였습니다.
그 밖에 파주군에는 각 면마다 국가대표 축구 선수를 적어도 2~3명이 배출될 정도로 축구에 대한 열기나 실력이 뛰어났습니다. 그래서 면 대항 축구시합이 열리면 11명 중에는 지금으로 말하면 프로 선수인 실업 선수가 한두 명 낄 정도로 대단하였습니다.
해가 짧아지는 가을부터 4학년 중에서 선발하여 지도하는데 아침 7시 반까지 오라고 합니다. 처음에는 아이들이 늦게 와서 제대로 훈련이 되질 않더니, 며칠이 지나자 아이들이 새벽안개를 헤치며 학교에 오고, 훈련을 제대로 합니다. 코치가 우리가 보는 데서는 별로 무섭게 하지 않는데도 아이들이 무척 열심히 합니다.
나중에는 아침 훈련에 코치가 없는 데도 코치가 있을 때보다 더 열심히 합니다. 실력도 쑥쑥 늘어갑니다. 한두 달이 지나자 기본기가 잡히고, 서너 달이 지나자 5~6학년과 연습 게임을 해도 덩치에서 밀리지 기술은 더 뛰어나게 되었고, 시합을 대등하게 합니다.
정해영 코치 자신이 배운 대로 기본 기술, 운동 감각, 게임 운영 능력을 길러주는 데, 매섭게 가르치고 배우다 보니 실력이 쑥쑥 늘어갑니다. 그래서 하루는 술자리에서 그런 비결을 물어보았습니다.
“어떻게 아이들을 때리지도 않고 욕도 하지 않는데, 아이들이 정코치만 보면 무서워서 쩔쩔매고 그렇게 열심히 축구를 하느냐?” 그랬더니, 아이들이 훈련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여러 사람이 보는 곳에서는 욕도 별로 하지 않고 때리지도 않지만, 체육창고 뒤로 끌고 가서 혼을 내준다고 합니다. “그러면, 코치가 없을 때 주장을 중심으로 코치가 있을 때보다 더 열심히 하는 것은 어떻게 된 거냐?” 이렇게 물었더니 다음과 같이 대답합니다.
개인 사정으로 코치가 아침 훈련에 참가하지 못할 일이 생기면 며칠 전부터 습관을 들인다고 합니다. “내일은 코치 선생님이 서울 갈 일이 있어 아침에 나오지 못하니까, 주장 한걸이를 중심으로 연습해라.” 하고는 연습할 내용을 알려준다고 합니다. 그러고는 다음 날 훈련할 시간에 학교 숲 뒤에 와서 몰래 지켜본다고 합니다.
초등학교 4학년 아이들이니까 당연히 지각하는 놈에, 그 무섭던 코치 선생님이 없으니까 장난치며, 시시덕거리고, 말 안 해도 상황을 눈으로 보지 않아도 뻔해 보입니다. 이 때 코치 선생님이 나타납니다. 물론 창고 뒤로 끌려가서 벌어질 상황은 알고도 남습니다. 이런 일을 몇 번 한다고 합니다. 이렇게 되면 말 그대로 코치 선생님이 없으면 주장을 중심으로, 코치 선생님이 있을 때보다 더 무섭게 합니다.
코치 선생님이 언제 튀어나올지 모릅니다. 주장은 주장대로 코치 선생님이 없을 때 제대로 하지 않으면 엄청 혼나니까 더 쥐 잡듯이 하고, 아이들도 열심히 따르고, 주장의 권위도 점점 세어집니다. 이렇게 되면 주장이 코치 선생님보다 더 무섭습니다. 훈련 강도는 세어지고, 집중력도 높아집니다. 실력은 말 그대로 일취월장합니다.
그런데 사건이 터졌습니다.
다음 해인 1978년 봄, 6학년 한 학생이 파주군 축구대표 골키퍼로 선발되었습니다. 그런데 선발된 어린이가 학교에는 오지 않고 종종 중간에 새는 겁니다. 그런 일이 반복되자 5일장을 돌아다니며 노점상을 하는 아이 아버지가 학교로 찾아와서, 파주군 대표로 선발도 되었는데 중간치기를 자주하고 공부와 훈련은 안하니 아이를 혼을 내서라도 가르쳐 달랬다고 합니다. 그런데 아이가 또 중간치기를 한 겁니다.
아이 입장에서야 군 대표로 선발될 정도로 운동신경은 뛰어났겠지만, 반강제 스파르타식으로 훈련을 하니 그럴 만도 하겠지만, 담당 선생님이나 코치 입장에서는 군 대표로 선발된 마당에 더 열심히 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고 아이 아버지도 부탁한 일이 있어, 본보기를 보이려고 아이를 때려주었습니다.
먼저 C 코치가 엉덩이를 때렸습니다. 다음에는 P 선생님이 혼내주었습니다. 그런데 아이가 매를 맞다가 선생님한테 욕을 했다고 합니다. 당시로서는 상상도 못할 일이 벌어지자 더 때렸겠지요.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 당시 현장에 정해영 코치는 타지에 가 있어 자리를 같이 하지 않았습니다.(제가 현장을 보지 않고 들은 이야기로 다소 차이가 있을 수 있음)
상황은 다음 날 크게 벌어졌습니다.
아침에 출근하니, 아이 아버지가 아이를 리어카에 싣고, 광탄 삼거리 지서 앞에서 난리를 쳐, 학부형들이 학교로 쳐들어온다고 합니다. 그러자 연세 지긋하시던 여자 선배 선생님이 교무실에 있으면 일이 크게 벌어질 것 같아, 운동 지도하는 젊은 남자 선생님들은 모두 피하라는 겁니다. 그래서 피해 있다가 상황이 종료되어서야 교실로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 일로 P 선생님과 C 코치는 의정부 경찰서 유치장에 있다가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육본에서 근무하던 P 선생님의 형 덕분에 사흘만에야 학교로 복귀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당시에는 군인이 득세하던 시절로 더군다나 육군사관학교 출신이면 무소불위의 힘이 있었음)
이제 P선생님은 축구부를 담당할 수 없게 되었고, C 코치도 축구를 지도할 수 없었고, 정해영 코치도 중동으로 떠나게 되어 오롯이 저 혼자 축구부를 떠맡게 되었습니다. 축구부를 떠맡았을 때, 아이들이 저보다 기능도 훨씬 뛰어나고, 축구나 운동에 대한 식견도 부족하여 망막하였습니다.
지금으로서는 너무 세월이 흘러 그 당시 어떤 지도 방향이나 방침을 가지고 지도하였는지 기억할 수 없지만, 아이들을 인간적으로 대하고, 아이들에게 의견을 구하고 합의를 통하여 훈련 프로그램이나 일정을 계획하여 축구부를 지도하였습니다. 지금도 기억에 특히 남는 것은 어릴 적에 운동 감각을 익히는 것이 중요하다고 여겨 기본 기능을 중시하고 또 감각을 키우는 데 중점을 두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마무리 훈련에 볼 리프팅을 많이 하였습니다.
1978년 5월경에 축구부를 떠맡아 지도한 후, 1979년 9월 1일 신산초등학교를 떠날 즈음에는 볼 리프팅을 3,000개 이상 하는 어린이가 5~6명이나 되었고 나머지 어린이도 1000번을 넘게 하였습니다. 볼 리프팅 3000번을 한다는 것은 30분 동안 볼을 한 번도 떨어뜨리지 않아야 합니다.
제기차기는 그만 차라고 할 때까지 하루 종일 찹니다. 그것도 오른발 한 번, 왼 발 한 번, 번갈아 하는 것으로 핸디를 주어하였으므로, 이 정도면 기능이나 감각 면에서는 초등학교 수준에서는 당시 대한민국 최고의 실력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지금도 기억에 남는 것은 어려웠던 가정 살림에도 불구하고 5월 15일 스승의 날에 주장 한걸이를 비롯한 몇몇 축구부원들이 자신들의 용돈을 모아 치킨 2마리를 사가지고 저에게 와, 대접을 받은 것입니다. 1년 5개월이 채 안 되는 짧은 기간 동안 아이들이 따르고 훌륭한 성장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은, 스파르타식 훈련과 강압적인 훈련에 익숙했던 아이들에게, 인간적으로 대하고 아이들 의견을 존중한 것이 가장 큰 요인이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1979년 9월 1일, 저는 저의 고향인 강원도로 전출을 희망하여 홍천에서 출퇴근이 가능한 횡성군 창봉초등학교로 오게 됩니다. 1988년에는 한걸이와 선민이가 홍천읍에서도 버스로 두 시간 이상 걸리는 오대산 골짜기에 있는 명개분교를 방문하여 좋은 인연이 이어지게 되고, 화계초등학교에 근무하던 1998년 여름에는 10여명의 제자들이 신부나 여자 친구들을 대동하고 찾아와 천렵도 하고, 밤새 고스톱도 치고, 새벽같이 일어나 홍천조기축구클럽과 친선 축구경기를 하는 등 사제간의 정도 나누었습니다.
지금은 연락이 소원하지만, 2000년 여름방학에는 제자들의 초청으로 오랜만에 신산초등학교를 방문하여 제자들이 선물한 유니폼과 축구화를 갖춰, 축구도 즐기고 이야기꽃을 피우기도 하였습니다.
세월이 흘러 이제는 50대 후반이 된 제자들. 모두의 이름을 기억할 수는 없지만 지금도 그리운 얼굴들이 떠오릅니다.
이한걸, 이안성, 정운찬, 박용성, 안선민, 이성철, 안선명….
여기까지는 2005년 작성한 글을 조금 고쳐 쓴 글입니다.
안덕기 님이 보내온,
당시 4학년 2반 제자인 경은주 님이 투고한 『용관중 선생님 많이 보고 싶어요』라는 글을 읽고, 그동안 보관하고 있던 60여 통의 편지를 다시 읽으며, 당시에 제자들이 보여준 따뜻한 감정을 느낄 수 있는 귀한 시간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이름을 열거하여 보면
강창숙, 강정원, 경은주, 구정모, 김광자, 김광태, 김명보, 김명숙, 김숙이, 김원례, 김은정, 김정숙, 김하정, 노선화, 백미경, 서정민, 손문희, ○순화(배구부), 안순옥, ○영희, 우경혜, 이경자, 이용미, 이지숙, 이한걸, 임기정, 임인정, 정영애, 정진성, ○정해, 조경찬, 조은혜, 주현정, 최경옥, 최옥희 그 외 많은 제자들이 있으나 이름이 가물가물합니다.
올해 제 나이 71세에 제자들의 이름을 일일이 기억하지 못해 아쉽지만 신산초교에 가면 혹시나 옛 기억이 되살아 날지 기대해 봅니다.
끝으로 신신초교 개교 100주년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나의 초등 6년사 - 51회 안덕기
2026년 신산초교 100주년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나의 어머니(17회), 큰형님(41회), 작은형님(48회) 그리고 저는 51회를 졸업한 명문초교 신산가족입니다.
나에게는 두 분의 교장선생님이 계십니다.
유병주 교장선생님 과 78년(4학년)9월에 부임하신 박응수 교장선생님이 아직도 눈에 선합니다.
1975년 1학년1반 (박인영 선생님)
유치원도 안 나온 내가 글씨도 모르고 입학한 코흘리개는 학교적응하기 참 어려운 걸로 기억합니다.
손수건을 세로로 펴서 옷핀을 가슴에 달고 다닌 유년시절, 지금 생각하면 웃음이 절러 나옵니다. 소령원 소풍 단체사진을 보면 지금 연로하신 어머니가 그때는 참 젊었었구나 하는 생각이듭니다.
1976년 2학년1반(성호석 선생님)
나의 초딩시절 최고령 담임선생님이십니다.
그 당시 학습 부적응시기라 구구단암기가 왜 그리 어려웠는지....
"나리 나리 개나리 입에 따라 물고요."만 주구장창 노래했던 기억이 납니다.
1977년 3학년3반(김인순 선생님)
반편성시 공부 잘하는 친구들을 그룹으로 나누어서 등급이 나뉘던 시절, 참 어려웠지요.
그 당시에는 공부 잘 하는 사람이 반장, 부반장이 되었으니 물론 저는 장을 못 했지요.
담임선생님이 서울 홍제초교로 전근을 가시고, 몇몇 친구와 홍제동을 갔어요. 선생님께서 중국집에서 짬봉을 사 주신 기억이 나는 데, 그렇게 짬봉이 맛있는지 몰랐습니다. 선생님 댁 화장실 안에서 문이 안 열려 공포감을 느낀 기억도 나네요. 그 후로 미국으로 이민 가신걸로 알고 있습니다.
보이스카웃을 1년 했는 데, 자연농원에(에버랜드)가서 동전시계 차고 요술의집에 들어가서 80원 잃어버리고, 도마산초교에서 캠프화이어 한 기억도 나네요. 보이스카웃 단장이셨던 김용직선생님도 보고 싶습니다. 6학년때 저에게 전교회장 추천도 해주셨는데, 수줍어서 사양을 한 기억도 나네요. 그래서 민경태 친구가 했답니다.
1978년 4학년3반(김승하 선생님)
엄격하신 아버님하에 짧은머리로 초등3년을 보냈었는 데, 4학년때부터 머리를 길러(상고머리) 다니게 되었고 그 후 부터 학습능력이 좋아졌습니다. 짧은머리로 공부한 시절은 성적이 안 좋은 징크스가 있어요.
2학기 처음 반장도 하고 선생님이 참 이뻐해 주셨습니다. 떠든 아이이름 칠판적기의 쾌감은 아직도 생생합니다. 2반에 종관이 친구는 예방접종주사 맞고 기절도하고, 1반 선생님의 별세소식도 아른아른합니다.
TV는 선생님을 찾고를 하면 찾고 싶은 선생님은 4학년 때 김승하 선생님 입니다.
1979년 5학년3반 (곽인자 선생님)
신산초교는 파주시에서 축구로 유명한 학교입니다. 국가대표 출신도 있고, 미래의 축구인으로 도전도 많이 했지요.
용관중 선생님이 축구담당이셔서 축구부로 들어가 학교대표를 하였습니다. 호화멤버인 6학년 1년 선배와 같이 훈련하면서 선착순 뺑뺑이로 엄청 시달렸고, 같이 연습경기하면 우리 후배는 무참히 깨졌었지요.
지금 나이에도 1년 선배를 이길 수가 없습니다. 운동장이 넓어 파주시 대회를 모교에서 개최했는데, 6학년 1년 선배는 준결승에서 탈락하고, 우리 5학년대표가 연풍초 0:0(승부차기3:0),천연초1:1(승부차기4:3) 힘겹게 결승 올라가 파주초를 3:0 승리하여 유일무이한 우승메달을 목에 걸었습니다.
이제야 자랑인 데, 소년체전을 위한 경기도대표선발을 위한 파주군 대표로 뽑혀 신산우승학교에서 40일간 합숙훈련( 교실하나를 메트리스 깔고 합숙)을 해야 하는 데, 여건이 안 돼 봉일천 초교에서 파주군내 타초교 선발과 함께 40일간 수업 없이 훈련했었습니다.
지도 선생님은 봉일촌초교 선생님이시고, 고양교육청에 근무하시고 정년퇴임 하시지 않나 생각됩니다. 파주군 대표로 선발된 이유를 유추한 결과, 지구력은 잼병이어서 선발이 안 될 줄 알았는 데, 상대방 오른발 대상으로 왼쪽접기 개인기가 유일한 특기인 데, 그게 먹힌 거 같습니다.
이영표의 헛다리짚기 기술을 미리 알았다면 신산의 메시가 되지 않았을까 합니다.
경기도선발을 위해 인천에서 안양군 대표와 첫 경기 무승부로 끝나 승부차기 패배하여 경기도대표 소년체전출전 꿈이 날아갔습니다.
40일 무수업의 공백으로, 곽인자선생님의 거주지에서 따로 저의 보충수업을 해주셔서 그 이후로 순조로운 학교생활을 하게 되어 고마움을 느낍니다.
용관중선생님의 짝궁 공덕환선생님,곽인자선생님의 짝궁 백영숙선생님 두분이 학교때 예사롭지 않다고 생각했는 데, 부부가 되셨다는 얘기를 먼훗날 들은 거 같습니다.
1980년 6학년2반(우국환 선생님)
일산 가좌초등학교 교장선생님으로 퇴임하시고 아직도 광탄 소식을 물어보시고, 지금도 소통하고 있는 친구같은 선생님이십니다.
아직도 학년별 학교생활이 새록새록 합니다.
모교인 신산초교의 100주년을 축하드리며, 아울러 신산초교 전,현직 선생님과 동문선후배님들의 건강을 기원합니다.
기억나는 그때 - 53회 김미자
-4학년2학기 파주로 이사를해서 전학간 곳이 신산국민학교-
내가 졸업한 국민학교의 역사가 100년이 되었다니 정말 놀랍고 상투적이지만 정말 괜찮았던 학교였구나 싶다.
내가 4학년2학기 분수리로 이사를 하게되고 새롭게 다니게 된 학교가 신산국민학교이다.
나의 첫 절친 양정화!! 그아이는 분수리에는 부대가 있었는데 그 부대의 대대장이었던 아빠와 예쁜 엄마가 있는 집의 첫째로 동그란 눈에 까무잡잡한 피부 길게 땋아내린 머리에 여리
여리한 여자아이였다.정화도 전학을 다녀서 일까 집이 같은 방향이어서였을까 나랑 금방 친해졌다.
학교 갔다오면 늘 부대에 있는 정화네 집(관사)에 가서 숙제도 하고 놀고 매일 붙어다녔다.
우리가 한참 재밌게 놀던 겨울날이었다.지금 생각해보면 새앙쥐였는데 아주 쬐끄매서 그당시에는 쥐인줄도 모르고 얼어 죽은게 불쌍하다고 땅을 파서 묻어주고 기도까지 해주며 울었던 기억! 지금 돌이켜보니 참 순수했다.
나의 첫 담임 선생님부터 떠올려보면 군대를 갓 제대하고 부임했다던 담임 김기원선생님 그래서 일까... 모든 것에 단체기합이었다 ㅠㅠ
전학가서 젤루 무서웠던 기억(?)
그전까지 맞아본 기억은 숙제가 있는지도 몰라서 못해 맞았던 기억말곤 학교에서건 집에서던 맞아본 기억이 없는데다 너무 무서워 1분단 맞을때 4분단에 있던 나는 미리부터 울고있어서 특히 남자아이들이 나를 이상하게 봤던 기억이 난다.
5학년담임 이희재 선생님은 시험기간 대비해서는 숙제나 수업 시간에 늘 스스로 문제를 만들어오게 하셨다. 그리고 6학년담임 경상도 사투리가 심했던 최응재선생님! 아들 형제를 두었던 자상한 아빠의 잔상으로 기억된다. 우리를 참 이뻐하셨다.
수업 방식을 떠올려보니 4학년 담임선생님은 발표를 많이 시키고, 5학년 담임 선생님은 문제를 스스로 만들어 오게 하고, 6학년 담임 선생님은 경상도 사나이 답게 많이 뛰어놀게 하셨던것 같다.
지금 돌이켜보니 신산초등학교만의 장점으로 시범학교라 하여 노트에 필기를 하지 않고 다른 학교에서는 선생님들이 지도자료로 쓰는 책을 우리가 노트 대신 썼던 신선함!
가을이면 엄청 넓은 운동장에서 운동회가 열리면 내가 기억하는 우리 학교의 축구 스타 이승호,이세종.이경호.이정호 4인방!!
지금의 손흥민 기성용을 능가하는 여학생들의 인기남이 아니었나 싶다.
또 계주를 월등히 잘했던 우리 일년 선배 언니 방앗간집 딸, 정말 스타였다.그들이 운동회의 스타로 청군백군 어디로 가느냐에 따라 약간 덩달아 어깨에 뽕이 들어갔던 듯하다.
하지만 이또한 나만의 조작된 기억일 가능성도 크다...
여름이면 여름부터 연습해서 가을에 다른 학교와 경쟁을 했던 신산 국민학교만의 또다른 큰 행사! 합창대회!
난 수줍음도 많고 중간에 전학가서 그 합창단에는 명함도 못내밀어봤지만 합창단에 선발돼서 활동하던 아이들은 그당시 KBS어린이 합창단 못지않게 연습을 엄청 열심히 했던것 같다. 그 아이들을 담당했던 이수경 선생님은 나의 담임을 맞진 않았지만 그당시 기억의 제일 여성스럽고 이뻤던 선생님으로 기억된다.
나의 국민학교시절을 되돌아보며 다시금 선생님들도 떠올려보고 같은반이었던 아이들과 내가 전학가서 젤루 처음 절친이 되었던 양정화, 그 이후 친구 사인방 박순재,박희정,김윤희, 나 서로 티격태격 하고 몰려 다니기도 했던 기억, 나의 첫 짝사랑 이 아무개~~
50중반에 와서 내가 다녔던 국민학교의 역사가 어느덧 100주년이라는 사실을 마주하며 내어린시절의 기억을 떠올려 볼 수 있는 기회가 돼서 너무 행복하다.
울 동창뿐만 아니라 울 선배님들 후배님들 기억속의 우리 초등학교는 어떤 학교로 기억되는지 궁금하다. 내 초등시절의 소소한 기록들이 남아 있는 내 추억의 저장소!
신산 국민(초등)학교 100번째 생일 축하해~~
담임 김기원선생님과 함께~ 53회 조미경
우리 학교 합창단이 파주시 합창대회에서 좋은 성적으로 수상을 하였다.
대회전 합창대회 수상을 하면 선생님댁에 데리고 놀러가신다는 약속을 지켜주셨다. 어린맘에 집밖에서 잠을 잔다는건 상상을 못했던 시대라 오롯이 우리끼리만의 시간이 주워진것에 설렘과 기대에 부풀어 선생님댁에서 밤새 떠들고, 웃고, 울고, 싸우고, 시끄럽다 혼나고 좌충우돌 일박을 보냈던 우리들...
40여년이상이 지나 다시 보니 너무나 예쁘고 귀엽네.
이사진은 선생님댁에서 요란법석 하루를 보내고, 다음날 집으로 오기전 인천 자유공원 맥아더장군상 앞에서 찍은 기념사진이다.
돌이켜보면 이때가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 아니었나 싶다.
그당시 사진을 누가 찍었을까....맥아더 장군님은 어디로 가시고...ㅎㅎㅎ
용관중 선생님 많이 보고 싶어요~ 52회 경은주
4학년때 우리반 담임이셨던 선생님께서 이듬해 타교로 전근을 가셨습니다. 그시절 저를 자식처럼 업어주시고 용돈도 주시며 정말 예뻐해 주셨던 선생님을 그리워하며 편지를 썼던 것 같습니다.
때로는 엄하시고 때로는 다정하게 우리반을 아껴주셨던 선생님을 늘 잊을 수가 없었습니다.
찾으려고도 애썼으나 맘처럼 되지않을때 친구의 도움으로 연락이 닿아 얼마나 기뻤는지 모릅니다.
아직도 그때의 편지들을 간직하고 계시단 말씀에 가슴이 뭉클해지는 감동을 받았습니다.
이편지 또한 선생님께서 고히 보관중이신 편지중에 하나로 그당시 저의 선생님에 대한 존경과 사랑이 고스란히 베어 있는 것 같아 어른이 경은주가 어린이 경은주에게 애정의 박수를 보냅니다.
이렇게 소중하고 귀한 추억을 간직하게 해주신 선생님께 다시한번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을 전하고 싶고, 시간이 더 흐르기전에 찾아 뵈야겠습니다.
나에게 신산이란? -41회 안재형
국민학교 졸업 전에 약 1년간 축구 선수 생활을 하였다. 어느날 축구부 김선정 선생님께서 축구공을 주며 차보라고 하셔서 냅다 질렀는데 공이 떠서 좀 날아갔나 보다. 그리고 졸지에 학교 대표 축구선수가 된 것이다.
당시 김선정 선생님께서는 저학년 담임을 맡으셨는데 학부모들이 자녀를 선생님 반으로 넣고 싶어한다는 소문을 들은 적이 있다. 키가 작으셨음에도 축구를 잘 하셨었고 엄격하게 지도하셔서 좀 무섭기도 하였지만 졸업할 때까지 잘 견뎌낸 듯 하다.
선생님 연락처는 스마트폰 주소록에 잘 보관되어 있으며, 몇 년 전 전화통화에서 아직 축구를 하시는데 공격 보다는 센터백을 맡는다고 하셨다. 그 어린 시절 금촌에서 있었던 파주 대회에서 승부차기(난 3번째) 끝에 우승으로 돼지를 선물로 받은 것이 제일 기억에 남고, 한 번은 문산국민학교 키 큰 선수의 왼발 슛을 막아내지 못해 아쉬움을 삼키기도 했었다.
축구를 처음에는 작은 운동장에서, 나중에는 큰 운동장에서 하였는데 축구장 두 개를 만들 수 있을 정도로 크고, 여름방학 중에는 서울에서 전지 훈련을 와서 같이 경기를 치르기도 하였다.
그 때 서울 선수들은 덩치도 크고 콧대가 셌는데, 우리 신산 친구들은 끈질기게 맞서 경기를 대등하게 했었다. 친구 석순이는 골아웃이 될 뻔한 공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킥을 하여 골을 만들어 낸 것이 좋은 추억으로 남아 있다.
신산 국민학교에서의 축구생활은 나에게 인생의 주춧돌이라 여겨진다. 특출나지도 않았고 사교성이 없었던 내가 대학생활을 원만히 할 수 있었던 것은 축구 때문이었다.
축구 동아리에서의 맹활약은 친구 및 선후배들과의 교류를 원활하게 해 주었고, 나 혼자만의 힘은 아니지만 서울시 의과대학 축구대회에서 2회 연속 우승한 것은 대학생활을 잘 하는데 적지 않은 도움이 된 것이다.
그 후 군대와 병원에서도 축구는 내 생활에서 빼 놓을 수 없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축구를 좋아하지만, 나는 그 중에서도 축구를 찐하게 좋아하는 사람들과 많은 인연을 맺고 있다.
여러 축구 대회에서 우승 트로피도 들어 봤고, 개인상도 더러 받아보았다. 외국 여행은 한국을 대표하여 세계의사축구대회에 참석하는 축구투어로 하기도 하였다.
나이가 들어 무릅에 이상이 생겨 축구를 중단하였지만, 어렸을 적에 신산 국민학교에서 축구를 같이 한 친구들과 아직도 정기적으로 만나 소주를 기울이고 있다.
철학자 쇼펜하우어는 행복의 90%는 건강에 좌우된다고 하였는데, 축구를 통해 건강을 유지하는 방법을 터득하였으니 이보다 더 큰 행운이 어찌 있으랴. 축구와 함께 한 반백년이 넘는 인생길이다.
어느날 한글 호를 만들고 싶었는데, 新山국민학교 그리고 廣灘중학교에서 한자씩 그 뜻을 차용하여 뫼여울이라 지었다. 인생 후반부에 어린 시절을 생각하니 신산, 너에게 참 많은 빚을 지었네 그려. 고맙고 사랑한다.
고맙고, 그리운 그 시절 - 41회 홍종숙
내가 졸업한 신산초등학교가 100번째 생일을 맞이한다. 41회 졸업생이니 내 나이도 고희를 바라본다. 수없이 많은 세월을 흘려보낸 작금에 내면 깊숙한 곳에 자리잡고 있던 초등학교 시절의 나를 끄집어 내려니 6년의 긴시간 동안 어떤 모습으로 무엇을 하며 보냈는지 아련하기만 하다.
기나긴 세월이 지나 들쳐 본 사진첩 속의 어린 내가 머리를 질끈 묶고 친구와 어깨동무를 하고 천진스레 웃고있다.
기억을 더듬어 본다. 두근두근 입학식, 만국기 휘날리는 운동회, 소령원으로의 소풍, 보광사 수학여행, 졸업식이 있기까지 수많은 추억들이 켜켜이 쌓여있다.
그 기억 속에 또렷이 떠오르는 것은 3학년 담임선생님이 군입대로 떠나시던 날, 난 무엇이 그리도 서러워 펑펑 울었던지 아직도 생생하다. 6학년이 되어서는 시험이 끝나면 내 차지가 되었던 채점. 담임선생님의 믿음과 사랑을 받고 있다는 생각에 얼마나 신바람나게 열심이었던지…
훗날 내가 교직에 있울 때 그때의 채점심부름이 밑거름이 되어 채점은 정말이지 끝내주게 잘 했던 것 같다. 과거의 시간들이 차곡차곡 쌓여 오늘의 내가 있기까지 함께한 선생님들과 친구들이 무척이나 고맙고 그립다. 오랫만에 어린 날의 나를 돌아보며 모교의 100년을 축하하고 찬란하게 빛나기를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