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주를 가다!

김태회 파주작가가 2025년.4월26일부터 5월3일 7박8일간 광복 80주년을 맞아 대련, 심양, 장춘, 연길, 훈춘 등 만주 동북지역을 답사한 기록이다.

저자는 홍산문화와 안시성 전투, 병자호란의 피로노정, 삼학사의 충절, 인조와 소현세자의 비극을 역사 현장에서 되짚는다. 또한 박지원의 『열하일기』 속 심양, 후금의 누르하치와 월롱산성, 청의 마지막 황제 부의의 삶, 간도 이주와 조선족의 현재, 봉오동·청산리 전투 현장을 생생하게 전한다. 여행 속에서 역사와 현재가 교차하며 만주는 한민족의 기억과 상처, 그리고 교훈을 품은 땅임을 보여준다.

만주에 대한 오랜 갈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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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평소 만주에 가고 싶다는 욕망이 있었다. 만주는 원래 한민족 고대국가의 활동 무대였다. 그런 고대사에서 또 독립운동사에서, 책에서 만주지방이 무대가 되는 경우가 많았다. 박지원의 열하일기에서는 지금의 심양인 성양盛陽이 나오고, 박경리의 소설 토지에서는 서희가 간도 용정으로 이주하여 활동하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또 황석영의 철도원 삼대에서는 지금의 장춘이 신경新京이라는 도시로 등장한다. 만주지역은 일제 강점기를 전후하여 우리 조선 동포들은 굶주림을 피하여 또는 독립이라는 웅대한 뜻을 품고 와서 정착해온 곳이다. 그런데 조상의 숨결이 아직도 숨 쉬고 있는 그곳을 한 번도 가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던 차 K기획사에서 ‘2025 광복 80주년 기념특집 동북기행이라는 주제로 만주 동북지방 일대를 답사하는 계획을 발표하여 안성맞춤으로 가게 되었다. 대련에서 출발하여 심양, 장춘, 연길, 훈춘, 방천, 도문, 통화, 환인을 거쳐 단동으로, 다시 대련에 이르는 여정을 일주일 남짓 하는 기간에 다녀오는 프로그램이었다. 더욱이 시인이자 독립운동가인 윤동주가 216일 순국 80주기를 맞아 일본 모교인 교토 도시샤 대학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받은 사실이 여러 언론에 보도되면서 시인의 생가 등을 가고 싶은 마음에 불을 질러 재촉하게 되었다.

중국을 몇 번 다녀온 일이 있지만 이번에는 정말 마음에 드는 여행이어서 그런지 가슴이 설렌다. 짐을 챙겨 떠나려 하는데 아내가 내 핸드폰을 보더니 미심쩍었는지 헝겊주머니를 내어주면서 핸드폰을 거기에 넣어 목에 걸고 가라고 한다. 그리고 걱정스런 말투로 상비약은 챙겼느냐고 채근한다. 초등학교 입학 때 어머니가 가슴에 콧수건을 달아주던 생각이 난다.

비룡호의 밤바다

인천 송도 국제여객터미널에서 수속을 마치고 기다리는데 붙임성이 좋은 중년 한 분이 능숙하게 여러 가지 출국절차도 미리 알려주고, 덧붙여 그동안 중국여행 경험담을 스스럼없이 이야기한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포천에 사는 S 선생이라고 하는데 그이는 주로 혼자 배낭여행을 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핸드폰 하나면 어디든 쉽게 여행할 수 있다고 말한다. 핸드폰의 기능과 앱 등도 잘 알고 능숙하다. 그럴듯하다.

배에 올라 동행한 H 선생과 예약된 211호를 찾아들어가니 6인실인데 4인만 배정되어 공간이 한결 여유가 있었다. 그러고 보니 조금 전에 만나 이야기하던 S 선생도 우리와 같은 방이다. 좀 늦게 들어온 목포의 Y 선생, H 선생과 나 이렇게 넷이 같은 방을 쓰게 되었다. 배로 떠나는 여행을 몇 차례 했더니 이제는 그리 지루한 걸 모르겠다. 아무튼 비룡호는 우리가 느긋하게 밤바다를 즐기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대련을 향해 굼벵이마냥 기어간다.

심심하여 바깥 구경을 나가는데 어디서 아기 울음소리가 들려온다. 우리 옆방 210호에서 나는 소리였다. 중국인이 입실한 방이었다. 얼마 만에 들어보는 소리인지 모르겠다. 태초의 소리, 갓난아기가 할 수 있는 언어, 그 소리는 한국, 중국, 일본, 서양 말도 아니고 그냥 세상을 향해 내는 고고呱呱의 성聲이다. 나 여기 있다고. 그런데 불편한지 자지러지더니 금방 잦아든다. 아마 소망이 이루어졌나보다. 그 아기는 우는 게 언어다.

 

입국, 안내원설명

대련에 입항하자마자 밖을 보니 비가 온다. 입국수속을 밟는 곳까지 그리 멀지도 않은데 버스에 타고 이동하란다. 불과 오십 미터도 안 되는 것 같은데. 그래도 고객의 편의를 위해서 그런 조치를 취한 것 같다. 어쨌든 고마운 일이다. 현지 안내원의 인솔하에 버스에 탑승하자 심양을 향해 떠난다. 대련은 마지막 날 들리기로 한 것이다. 심양을 향해 출발한 후 안내원은 자기소개와 몇 가지 참고사항을 일러두고는 중국, 만주와 관련한 여러 가지 현황과 역사적 사실들을 안내원답게 쏟아놓는다. 그중에서 홍산문화와 안시성 전투에 대한 언급이 특이했다.

 

앞선 홍산문화

기원전 오천년 중국 요녕성과 내몽골에 걸친 서요하 유역에 존재했던 신석기 시대 문화다. 황하문명을 비롯한 기존의 4대 문명보다 천년 이상 앞선 고대문명으로 평가받으며 요하문명의 핵심이다. 특징으로는 수렵과 채집이 주요 경제활동이었는데 청동기 시대로 들어서는 후기에는 기초적인 농경과 돼지, 양 등 가축 사육이 이루어졌다. 씨족사회를 넘어 여러 신분 계층이 존재하는 원시국가의 모습을 보이는데 특히 여성 우위의 사회적 구조를 보인다. 유적지는 우리가 가고 있는 심양지역의 요하 상류지역인 요녕성 능원시와 건평현 경계에 위치한 우하량牛河梁 유적지가 대표적으로 여신묘, 제단, 무덤 등 고대국가의 존재를 입증하는 유적들이 발견되었다. 유물로는 옥기와 빗살무늬 및 채문 토기, 타‧마‧세석기 등이 발견되었는데 홍산문화가 존재했음을 입증하는 유물들이다. 특히 옥기는 수암만족자치현인 요녕성 안산시 수암현에서 생산되는 옥玉으로 만든 그릇이라는고 한다. 유물이 나온 우하량 유적지가 수암에서 가깝고, 유물이 현재 수암에서 생산되는 옥과 같은 종류라고 하니 정확히 입증되는 것이다.

나는 십년 전후로 해서 몇 번 수암에 간 적이 있다. 오십만이 거주하는 수암은 분지 형태를 띠었는데, 옥과 관련한 산업으로 생활하는 지방이다. 도시 전체가 옥이다. 동행한 분은 많은 옥 관련 물품을 샀다. 나는 옥장신구를 산 일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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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암 옥공예품 매장

홍산문화의 유적과 유물이 한민족의 고대사와 밀접한 연관성이 있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토템 문화, 적성총 형태의 무덤, 빗살무늬 토기 등에서 고조선과의 유사성이 발견된다. 요동과 한반도 북부가 동일 문화권이었음을 나타내는 증거다. 홍산문화는 아직도 활발히 연구가 진행 중이라니 동아시아 고대사 연구에 중요한 전환점이 될 수도 있다. 허긴 우리가 배운 고조선, 고구려, 발해를 비롯한 고대사는 홍산문화가 발견된 지역이다. 지금 우리가 가고 있는 연길과 백두산, 두만강, 압록강 근처가 모두 홍산문화와 연결되어 있다고 보아야 한다.

안시성 전투와 심양 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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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시성 전투

안시성은 지금의 요녕성 해성시 팔리진 영성자촌에 위치한 영성자산성이라는 견해가 가장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다. 우리가 타고 가는 버스가 고속도로 표지판에 해성과 개주를 가리키고 있는 지점을 지나고 있어서 안시성은 어느 도시에 있느냐고 안내원에게 문의하였더니 개주라고 답한다. 아마 개주와 해성이 중국 행정구역상 상‧하위 개념이 아니면 두 도시가 연접한 것으로 추측된다.

안시성 전투는 서기 645년 당 태종이 직접 이끄는 삼십만의 군대가 고구려를 침공하여 안시성을 공격했다. 후방지원군까지 합하면 백만 이상의 대규모다. 그러나 끝까지 항전하여 이를 물리치고 고구려가 승리한 역사적인 싸움이다.

당 태종 이세민은 여러 성을 함락시키며 기세를 올렸으나, 안시성에서 강력한 저항에 부딪혔다. 안시성을 함락시키기 위하여 여러 가지 공성무기를 동원하고 심지어 성벽보다 높은 거대한 토산土山을 쌓아 공격하기도 했으나 고구려의 지략과 용맹에 토산까지 무너지고 역공까지 당하면서 당 태종은 물러갈 수밖에 없었다.

안시성 전투와 관련한 방어선이 되는 주요 거점은 다음 성들이다.

‧ 신성: 요녕성 무순시 순청구 고이산 고이산성으로 비정한다.

‧ 개모성: 요동성 동북쪽에 위치하는 요녕성 무순시 부근으로 추정한다.

‧ 백암성: 요동성에서 안시성으로 가는 길목에 위치하는 현재 요녕성 등탑시 부근으로 추정한다.

‧ 요동성: 요녕성 요양시 부근에 위치한다. 압록강을 건너 고구려 본토로 들어가는 길목에 있었던 가장 크고 중요한 성이다. 당 태종이 고구려 침공 시 가장 먼저 공격하고 점령한 대규모 성이다.

‧ 건안성: 요녕성 영구시 개주시 고려성자촌 동쪽 석성산에 위치한 산성으로 알려졌는데 현지에서는 고려성자산성 또는 청석관산성이라고도 한다.

‧ 오골성: 단동시 동북쪽에 위치한 봉황산성으로 비정한다.

‧ 비사성: 요녕성 대련시 금주구 대흑산의 대흑산산성으로 비정한다. 요동반도 끝에 위치해 있어 고구려 수군 방어에 중요한 거점 역할을 하였다.

당 태종은 안시성을 공략하기 전에 여러 성들을 점령하였다. 신성, 개모성, 백암성, 요동성 등을 점령하였으나 안시성에서 발목을 잡혀 패퇴하고 말았다. 이 전투에서 당 태종 이세민이 눈에 화살을 맞았다는 야사가 있으나 정사에는 없다. 그리고 안시성주는 양만춘으로 알고 있으나 실명은 알려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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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당 전투 개략도

나는 십년 전에 요동성이 있는 요양에 잠시 들린 적이 있었는데, 요양의 옛 지명은 양평壤平이라고 한다. 북한에 있는 평양平壤은 원래 요양이라고 하면서 거기에 사는 사람들은 그렇게 알고 있었다. 요양시 시내에 있는 유명사찰인 광우사 앞쪽에 조성한 공원 한편에 요양의 옛 명칭은 양평이라는 내용이 새겨진 검은 비석이 세워져 있었다. 양평을 거꾸로 부르면 평양이라고 한다. 믿기지는 않지만, 거기 사는 사람들은 얼핏 한국인과 비슷한 이미지가 느껴져 믿고 싶었다.

아무튼 당 태종 이세민이 공략한 고구려의 안시성 전투가 벌어졌던 곳이 우리가 대련부터 지금 가고 있는 이 코스인 것만은 맞다. 고구려의 주 활동무대였다는 것이다. 당 태종이 요하를 지나 이 곳 일부 방어선을 뚫고 안시성까지 공략했다는 것이 이를 증명하는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니 묘한 느낌이 든다.

심양 가는 길

요녕성 일대는 봄이 한국보다 한 달은 늦게 오는 것 같다. 초봄 같다. 이 너른 만주벌판은 이제 밭갈이를 마쳤다. 아주 고르게 땅을 갈아놔서 산뜻하게 보인다. 그런데 농경지 가운데 무슨 무더기 같은 것들이 있다. 아무래도 꽃이 놓여있는 것으로 봐서 묘지인 것이 틀림없다. H 선생도 자세히 보더니 묘지라고 확신을 한다. 농경지가 넓기도 하지만 하필 묘지를 농경지 가운데 모시나 했더니 주위가 모두 벌판이고 산이 거의 없기 때문인 것 같다.

우리가 지금 가는 심양은 어떤 도시인가. 중국 동북3성 중 하나인 요녕성의 성도이다. 심양시는 청조 때에 수도로 정하면서 한때 성경盛京으로 불렸다. 그러나 추후 청조가 다시 수도를 베이징으로 천도하면서 봉천奉天으로 지명이 바뀌었고, 1929년 중국공산당정부가 들어서면서 현재의 지명인 심양이라는 도시명으로 정착되었다. 심양이란 명칭은 도시 주변을 흐르고 있는 혼하渾河의 옛 이름 심수沈水강의 북쪽에 있다는 뜻인 '심수지양沈水之陽'에서 유래된 것이다. 심양시는 요녕성 관할의 지급 시이자 성청 소재지로 지정되어 있는 인구 천만이 넘는 큰 도시이다. 심양하면 먼저 병자호란을 떠올리게 된다.

병자호란과 피로인

임진왜란이 끝난 후 17세기 초 조선은 전통적인 우호관계를 맺어 온 명明과 신흥세력인 후금後金사이에서 외교적으로 매우 어려운 처지에 놓이게 된다. 1627년 정묘호란으로 후금은 조선과 형제관계를 맺은 후 조선에 조공을 바치는 신하의 예를 요구한다. 조선은 재조지은再造之恩(나라를 다시 세워준 은혜-임진왜란 당시 명의 원조를 뜻함)의 명분론적 틀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조정은 대립이 극심해져 결국 병자호란을 자초하게 된다.

보광사 범종

파주의 전통사찰 중의 하나인 보광사에는 숭정칠년명동종崇禎七年銘銅鐘(2023년 보물로 승격 지정. 명칭은 보광사 범종으로 변경됨)이 있다. 인조 121634, 그러니까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난 7년 후에 새겨진 종이다. 2년 후인 1636년 병자호란이 터졌다. 숭정은 명나라 연호다. 이렇게 연관지어 봤을 때 그 당시 화이관華夷觀(중화문명이 세계의 중심이고 그 외는 오랑캐로 간주하는 관념)의 뿌리가 얼마나 깊이 박혀 있었는지 알 수 있다. 정묘호란을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후금을 한낱 오랑캐로 치부하는 것이 화를 불러온 것이다. 당연히 자기 자신을 알았어야 하지 않았을까. 주전론을 폈으면 그 대비가 있어야 하는데 별로 없었다. 무모하기 짝이 없었다는 것은 금방 입증이 되었다.

병자호란 전후

1619년 명과 후금간의 중원 패권의 결정적 전투였던 사르흐전투 때, 명의 지원군 요청에 대한 광해군의 결정을 미루면서 정세를 관망하여 처신하라는 밀지 여부, 강홍립의 임전자세와 후금에 투항 미스터리 등은 지금도 논란이 되고 있다. 광해군의 국제 정세관이 옳았다는 것에 무게를 두고 싶다. 그러나 반정에 의해 광해군은 폐위되고 죄인으로 강화를 거쳐 제주에 유배된 몸이 되고 말았다.

163612월 청 태종이 만족, 몽골족, 한족으로 이루어진 혼성군 10만 대군을 이끌고 조선을 침공하였다. 남한산성을 포위했을 때 최명길을 중심으로 청나라와 화친해야 한다고 주장한 주화파와 김상헌을 중심으로 결사 항전을 주장한 주전파와 의견이 대립되었다. 모두 부질없는 일이 되고 말았다. 이듬해 인조가 남한산성 밖으로 나와 삼전도에서 홍타이지에게 삼배구고두례三拜九叩頭禮(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예법)라는 항복의례를 치르고서 전쟁은 끝났기 때문이다.

그러나 심양으로 끌려가는 백성들, 즉 피로인被擄人인 조선의 백성에게는 가혹한 고난이 기다리고 있었다. 백성들은 청의 수도인 심양으로 전쟁포로가 되어 끌려가야 했다. 왕세자인 소현세자는 강화조약에 따라 볼모로 세자빈 강씨, 왕자 봉림대군(후일 효종), 대신과 자제들을 비롯한 60여만 명의 백성들과 함께 가야만 했다. 후대인들은 이 길을 피로노정被虜路程(병자호란 후 조선 백성이 청나라군에 심양으로 끌려갔던 길)이라 불렀다.

소현세자의 행적을 기록한 「심양일기」와 「심양장계」에 의하면 청인들은 붙잡아온 조선인을 날마다 성 밖에 모아놓고 몸값을 치르고 데려가도록 했는데, 그들이 요구하는 값이 너무 비싸 조선인은 국가차원에서 속환贖還을 호소하였다고 한다. 속환이란 포로로 붙잡힌 조선 백성들을 노예시장에서 돈을 주고 다시 구해 오는 것을 말하는데, 공식적으로 60만이라고 하니 그 외 이렇게 저렇게 붙잡혀 온 백성은 얼마나 될까 가늠이 안 된다.

패배한 나라 백성의 참상은 어디나 비참하다. 그 폐해는 특히 여성에게 극심했다. 처첩이 되는 등 높은 가격으로 매매되었다. 탈출하다가 붙잡히면 발뒤꿈치를 잘리는 형인 월형刖刑을 당해야 했으니 대부분 체념했을 것이다. 포로에서 속환되어 귀국한 여성을 환향녀還鄕女라 불렀는데, 이들을 대하는 조선 사회는 매우 부정적 분위기로 문제가 심각했다. 저희들이 무능하고 잘못해서 끌려갔다가 천신만고 끝에 돌아왔는데 색안경을 끼고 보았다. 더하여 아직까지도 환향녀에 를 덧붙여 심한 욕으로 사용하는 경향이 있다.

지금도 요동지역 곳곳에는 당시 포로의 삶을 살았던 조선인 후예들이 살고 있다. 조선인의 후예를 상징하는 족보와 성씨, 동성통혼 금지 등 조선 민족의 문화를 유지하는 후손들이 요녕, 길림, 하북지역에 박가보’, ‘박보촌’, ‘김가촌과 같은 집성촌을 이루어 살고 있다.

 삼학사

삼학사는 청나라와 화친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 척화파의 강경론자인 홍익한윤집오달제 3인이다. 이들을 일컬어 척화삼학사斥和三學士라고도 한다. 이들 셋은 청나라를 오랑캐라 하여 시종일관 주전론主戰論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결국 인조가 항복한 후 척화신斥和臣으로 찍혀 청나라에 끌려가 심양에서 죽임을 당했다. 그들은 현실 인식 유무를 떠나 주자학의 입장에서 충군애국忠君愛國의 정신과 명나라에 대한 모화慕華(중국의 문물을 섬기며 따르려는 사상)사상이 밑바탕에 깔려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나중에 1639 청 태종이 즉위한 지 13주년이자 청나라 중건 3주년을 기념하여 숭덕제 홍타이지는 삼학사의 높은 절개를 기리기 위해 심양에 사당과 비석 건립을 명했다. 특히 비석에는 삼한산두三韓山斗라는 휘호를 내렸다고 한다삼학사의 절의가 태산 같고 북두칠성처럼 변함이 없다는 뜻이다. 1932 “삼한산두라고 새겨진 비액이 발견되면서 심양의 춘일공원에 삼학사 유적비가 복원되었다.

남한산성에는 삼학사를 모신 사당인 현절사가 설치되어 있다. 매년 음력 910에는 삼학사를 기리는 제례를 지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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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광주시 남한산성면에 있는 현절사

홍타이지는 그 시기에 왜 삼학사의 절개를 기리기 위한 사당과 비석 건립을 명했을까. 아직 중원을 장악하지 못한 홍타이지로서는 삼학사와 같은 충신이 절대 필요하지 않았을까. 마치 정몽주의 절개를 몇백 년이 지난 영조 시기에 국가적 차원에서 기리는 것과 다르지 않다. 후세 사람들은 현재를 살아가면서 시대적 상황과 필요에 따라 선현을 소환하여 재조명한다. 극진히 숭앙하기도 하고 또 비판하기도 한다. 공자가 죽었다 살았다 하지 않았던가.

인조와 슬픈 역사

파주시 탄현면 갈현리에는 조선 제 16대 비운의 임금인 인조와 왕비 인열왕후 한씨의 합장릉인 장릉이 있다. 처음에는 문산읍 운천리 대덕골에 있었으나 영조 7(1731) 석물 틈에 뱀들이 극성을 부려 지금의 위치로 옮겼다.

인조는 선조의 다섯째 아들인 정원군의 맏아들로 능양군에 봉해졌는데 광해군 15(1623) 반정을 통하여 왕위에 올랐다. 인조는 재위 27년 동안 많은 일을 겪었다. 이괄의 난, 정묘호란, 병자호란을 겪은 후 소현, 봉림 두 아들을 청에 인질로 보내야 하는 치욕을 당했다. 정치적으로도 당파싸움이 격화되어 대내외적으로 수많은 어려움을 겪다 164955세에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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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주시 탄현면 갈현리 소재 장릉

인조는 승하하기 전에 아들이며 세자인 소현과 그 후손들을 모질게 내쳤다. 삼전도의 굴욕, 청에 대한 트라우마가 얼마나 심했으면 그러했을까? 그래도 자기 자식과 며느리를 죽이고 손자들까지 죽게 한 비정한 왕이라는 생각은 떨칠 수가 없다청나라에 볼모로 끌려갔던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은 8년 뒤인 1645년에 돌아왔다.

 소현세자는 당시 청나라에서 서양인들과의 접촉을 통해 새로운 문물과 사상을 받아들였고봉림대군은 철저한 반청주의자가 되어버렸다인조는 고국으로 돌아온 소현세자와 강빈손자들을 전혀 반기지 않았다소현세자가 청나라의 내부 사정과 서양 문물 이야기를 하며 책과 기계를 보여주자 분개하여 벼루를 들어 얼굴에 내리치기까지 하였다. 가슴앓이하던 소현세자는 병석에 누운 지 두 달 만에 의문의 죽음을 맞는다이후 소현세자 주변 세력과 강빈의 친정어머니와 남자 형제들을 귀양보냈고세자빈 강씨에게 사약을 내려 죽게 한 뒤 그들 모두를 사사했다.

 그것도 모자라 소현세자의 세 아들 석철석린석견을 제주도로 보냈다열 살도 안 된 인조의 손자들은 어머니 죄로 유배를 가서 석철석린은 다음 해에 죽었고셋째 경안군 석견은 겨우 젖 떨어진 나이에 제주도와 함양현을 거쳐 강화 교동도까지 9년 귀양살이를 견디며 간신히 목숨을 부지했다그때 경안군 나이 겨우 열세 살이었다.

열하일기 속 심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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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하일기 속에 심양

세월이 흘러 호란을 겪은 후 한 세기가 훨씬 지난 어느 날 연암 박지원이 공식적으로 청나라를 다녀오면서 쓴 열하일기에 심양을 거친다.

정조 4(1780), 청나라 6대 황제 건륭제가 칠순을 맞이했다. 당시 조선에서는 이를 축하하기 위한 사행단을 보냈는데, 이때 정사正使 박명원의 팔촌동생 박지원이 이 대열에 합류, 4개월간 청나라를 다녀온 후 열하일기를 남겼다. 원래 사행단은 황제가 있는 지금의 북경인 연경까지 가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런데 당시 건륭제는 피서차 여름 별궁이 있는 열하에 머물러 있었다. 따라서 사행단도 연경 북동쪽 지금의 하북성 승덕시인 열하까지 육백여리나 더 가야했다.

열하일기는 크게 일곱 파트다. 1부 압록강을 건너서 요양까지 가는 길, 2부 심양을 지나는 길, 3부 산해관으로 가는 길, 4부 산해관에서 북경으로 가는 길, 5부 북경에서 열하로 가는 길, 6부 열하에서 건륭제를 알현, 7부 열하에서 북경으로 돌아오는 길이다. 사행단 여정도는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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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의 심양은 북경으로 수도를 이전하기까지의 수도였으므로 모든 것이 황제가 있는 수도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연암도 호기심이 나서 밤에는 나가 놀았던 모양이다. 열하일기에 이런 내용이 적혀있다. 711일자 일화다. “전날 밤에 연암은 비단가게인 가상루, 골동품 가게인 예속재를 돌아다니며 청나라 사람들과 날이 밝도록 놀았다. 그리고 다음 날 저녁에 또 다시 나가려고 하는데 어의 변계함이 연암을 따라 같이 밤 구경을 나가고 싶어 했다. 그리하여 변계함은 허락을 구하고자 수역(수석 통역관) 홍명복에게 물어보는데 이에 수역이 펄펄 뛰며 이렇게 말했다. ‘심양은 황성이나 다름없는 곳인데 밤출입이란 당치 않은 말씀이오!’ 이 말을 들은 연암은 마두 장복이에게 혹시 누가 나를 찾거든 뒷간에 갔다고 해라.’라고 일러두고는 수역 몰래 혼자 빠져나와 밤 구경을 즐겼다.

또 이런 내용도 적혀있다. “이날 사행단은 고려보高麗堡에 도착했다. 고려보는 병자호란 때 조선에서 청으로 붙들려간 사람들의 집단 정착 마을이다. 예전에는 조선의 사신이 이곳에 오면 고려보 사람들이 반가워하며 더러는 술값, 밥값도 받지 않았다. 또 고국 이야기에 눈물을 흘리며 슬퍼했다고 한다. 그러나 사행단에 속한 말꾼과 하인들이 이런 틈을 노려 술값을 떼어먹거나 그릇 같은 것을 억지로 가져가고 물건을 훔치기까지 했다. 그리하여 고려보 사람들은 사행단을 점차 싫어하게 되었으며 이후 사신 행차가 올 때 일부러 술과 음식을 감추고 팔지 않거나 팔더라도 비싼 값을 불러 팔았다. 이에 화가 난 하인들은 이곳을 지나칠 때마다 너네들은 조선 사람의 자손이면서 어찌 너희들 할아버지가 오시는데 나와 절도 하지 않느냐고 소리치며 욕을 했다. 고려보 사람들도 이 소리를 듣고는 나와서 하인들에게 똑같이 마주 대고 욕설을 퍼부었다. 같은 동포임에도 서로가 원수지간이 된 모습을 연암은 한심하게 여겼다.” 수백 년이 지났어도 참 낯부끄러운 일이다.

지금의 심양, 서탑가 코리아 타운

차창 밖은 이제 진달래와 개나리꽃이 보인다. 잘 다듬어진 너른 만주벌판을 보면서 안내원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몇 시간이 금세 지나간다. 아마 심양인가 보다. 인구 천백만 도시라니 엄청나게 클 수밖에. 여느 도시와 마찬가지로 들쭉날쭉한 빌딩이 여기저기 보이고 수많은 차들이 교통 혼잡을 이루는 번화한 도시에 도착하였다. 점심시간이 되었다. 한국 사람이 왔으니 한국과 인연이 있는 식당으로 안내한다. 마침 우리가 가는 식당 앞에 평양관이라는 식당이 보이고 입구에 한복을 입은 젊은 아가씨가 안내를 하는 게 보였다. 그런데 그 아가씨는 우리를 보자마자 식당 안으로 황급히 피한다. 왜인가 했더니 남한 사람들에 대한 콤플렉스가 있다고 한다. 그동안 남조선 사람들의 태도가 그들의 심기를 많이 건드린 것이다. 그 식당은 북조선 사람이 운영하는 국영식당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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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조선인이 운영하는 평양관 전경

점심을 한 후에 우리는 조선족이 많이 산다고 하는 서탑가와 그 시장을 가기로 했다. 대신 너무 복잡하여 짧은 시간에 들려야 하니 물건을 사거나 사진을 찍느라 지체할 시간이 없다고 주의를 준다. 나는 그래도 시장이 형성된 일반적인 거리를 한 컷 찍기는 했는데 기시감이 들었다. 심양의 코리아 타운이니 과거 우리네 전통시장과 크게 다르지 않은 곳이 있다. 한국은 지금 이런 시장 모습이 거의 없다. 언제부턴가 전통시장을 현대화한다고 전국이 똑같아졌으니 옛 모습은 볼 수가 없다. 좀 허름한 것 같으면서도 조선인만 느끼는 그런 모습이다. 짧은 순간이지만 여기서 느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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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양의 코리아타운인 서탑가 시장

심양 서탑가, 코리아타운은 중국 동북 지역의 대표적인 한인 밀집 지역으로 그 형성은 일제강점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20세기 초 가난과 억압을 피해 만주로 이주해 온 조선인들이 심양의 서쪽에 위치한 이 지역에 모여들기 시작했다. 당시 서탑은 구시가지와 가깝고 저렴한 주거 환경 때문에 한인들은 이곳에 교회와 학교 등 공동체 기반 시설을 만들며 정착했다. 이는 서탑 코리아타운의 역사적 뿌리가 된 것이다.

1980년대 중국의 개혁개방 정책과 1992년 한중 수교는 서탑가에 결정적인 전환점을 가져왔다. 한국 기업들의 중국 진출과 함께 한국 주재원 및 조선족 동포들이 심양으로 대거 유입되면서 서탑가는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한국 식당, 슈퍼마켓, 미용실 등 한국 관련 상점들이 폭발적으로 증가하며 한국 거리를 방불케 하는 모습으로 변모했다.

서탑가는 단순히 한인들의 거주지를 넘어, 한국과 중국 문화가 공존하는 이중문화의 장이 되었다. 이곳에서는 한국 전통 명절 행사와 함께 한국어 간판, 한국 음식을 쉽게 접할 수 있고, 조선 동포들의 고유한 문화도 엿볼 수 있다. 이제 서탑가는 심양의 중요한 관광 명소로 자리매김하여, 중국인들에게 한국 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비록 시대의 변화에 따른 새로운 도전도 있지만, 서탑가는 깊은 역사와 독특한 문화적 매력을 바탕으로 지속적인 발전을 이어가고 있다.

누르하치와 장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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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르하치와 후금탄생

아침에 호텔에서 일어나 동쪽을 바라보니 붉은 해가 시내 한복판을 비추고 있었다. 사백여 년 전 과거의 슬픈 역사가 여기서 있었는가. 어떻게 있었는지는 기록으로 남아 있을 뿐이다. 그런 역사가 있었는지 없었는지 심양은 오고 가는 사람들과 차량들로 붐비고 있었다. 그 사이를 비집고 심양 시내를 빠져나왔다. 장춘으로 향했다. 장춘은 대련에서 심양까지 온 것만큼 심양에서 비슷한 거리라고 한다. 끝없는 만주벌판을 가로질러 한없이 간다. 이 고속도로는 대련에서 하얼빈까지 놓였다고 한다. 이 도로를 몇 번 가 본 적이 있지만 휴게소를 들릴 때마다 그 모습이 매번 달랐다. 이제는 너무나 깨끗하다. 그만큼 쇄신한 것 같다.

마침 후금을 세운 누르하치의 고향이 고속도로 표지판에 보인다. 그는 1559년 중국 랴오닝성 무순撫順에서 태어났다. 그는 20대 초반 명나라와의 전쟁에서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사망한 사건을 계기로 복수를 다짐하며 세력을 확장하기 시작했다. 결국 여진족을 통일하는데 성공한다. 특히 건주, 해서, 야인 여진으로 분리되어 있던 부족을 통합하여 후금을 건국한다. 마치 고려가 후삼국을 통합하여 명실상부한 나라를 세운 것에 견주어 볼 수 있다.

후금을 건국하고 자신을 칸Khan으로 칭하면서 명나라에 대한 전쟁을 선포한다. 누루하치는 후금의 군사적 기반을 다지기 위해 팔기제라는 독특한 군사조직을 도입하여 청나라가 만주족 중심 국가로 발전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누르하치는 1619사르흐전투에서 명나라의 대군을 격파한 것은 후금의 역사에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이때 조선은 명의 지원 요청에 의하여 강홍립이 일만 삼천 명의 조선 병력을 이끌고 참전하였으나 누르하치에 투항한다. 누르하치는 명나라와의 영원성전투에서 패한 후 1626년 사망하지만 그 위업은 그의 아들 홍타이지에 의해 이루어진다. 홍타이지는 1636년 국호를 청淸으로 변경하면서 중국 본토로의 확장을 본격화하였다.

만주는 요녕, 길림, 흑룡강 등 중국 동북 3성만 하더라도 면적이 한반도의 네 배나 되고 외만주를 포함하면 무려 열 배에 이른다. 인구는 동북 3성만 구천만 명이다. 외만주를 포함하면 일억 삼천만 명이다.

만주는 수천 년간 다양한 민족이 살다 떠나고 정착한 혼종의 땅이다. 고조선과 부여, 고구려, 발해의 숨결이 살아 있는 공간으로 우리 한민족의 역사가 깊게 뿌리 내린 강역이다. 또한 청 제국의 근원이었고, 일본 제국의 그림자도 얼씬거리던 터이기도 하다. 현재 이 중국 땅이 누르하치로부터 시작되었다.

만주와 월롱산성

만주라는 지명은 만주족에서 비롯했다. 만주족滿洲族이라 말하지 않아도 만족滿族은 중국어로 그 자체가 만족manzu이니 만족이라고도 한다. 명칭은 1635년 청 숭덕제 홍타이지가 자신의 민족인 여진족을 만주滿洲라고 개칭하여 부른 것이 시초다. 그 후 건륭제는 1777흠정만주원류고를 편찬하면서 만주라는 명칭은 문수보살의 원 명칭인 범어 만주사리manjusri에서 유래했다고 규정했다. 여기서 문수보살과 홍타이지의 아버지 누르하치는 어떤 관련이 있을까. 2015년 일간지에 게재한 조용헌의 청 태종과 월롱산성이라는 글 중 원문 일부를 싣는다.

을미년 새해를 맞아 파주 월롱산성月籠山城에 올라갔다. 해발 246m 밖에 안 되는 낮은 산성이지만 주변 일대의 풍광이 한눈에 들어오는 전략 요충지다. 가난에 시달리면서도 항상 수불석권手不釋卷(손에서 책을 놓지 않음)의 풍모를 지니고 있는 묵개默介 선생이 한번 올라가 보기를 권유했기 때문이다.

월롱산성은 1636년 병자호란 때 청 태종인 홍타이지가 서울 입성을 앞에 두고 3일간 머물며 제단을 쌓고 제사를 올렸던 터이다. 왜 서울을 코앞에 두고 한가하게 3일간이나 머물렀을까? 홍타이지는 월롱산성에서 북한산을 바라보다가 죽은 아버지인 누르하치의 모습을 보았다. 북한산 모습이 아버지 문수보살文殊菩薩로 보였던 것이다. ! 문수보살이 여기에 계시는구나! 누르하치는 생전에 자신을 문수보살의 화신이라고 주장했다. 홍타이지는 조선을 치러 왔다가 전혀 생각지도 않게 월롱산성에서 죽은 아버지 얼굴을 발견하고 문수개념을 체득한 것이다.

누르하치는 왜 문수보살을 강조했을까? 그때까지만 해도 여진족은 건주, 해서, 야인으로 분열돼 있었다. 민족을 통합하자면 문수보살이 필요하다. 문수는 지혜를 상징한다. 문수는 화엄사상의 지혜를 상징하는 보살이다. 화엄華嚴은 일즉다一卽多 다즉일多卽一'이 핵심이다. 문수는 통합을 상징하는 인격이다. 여진족 발음으로 '만주滿洲''문수文殊'라는 뜻이라고 한다. 백두산은 문수보살이 상주하는 산이라고 여겼다.

당시 30만 인구에 불과했던 여진족이 1억이 넘는 명나라를 먹기 위해서는 인력 보충과 함께 조선·몽골과 연대하는 일이 당면 과제였던 것이다. 전쟁을 하더라도 상대방이 항복만 하면 죽이지 않고 살려주는 것이 문수보살의 지혜로운 무력행사 방식이었다. 이렇게 해서 여진은 몽골도 통합했다. 남한산성에서 항복한 인조가 큰절 몇 번 했다고 해서 목을 치지 않고 살려준 것도 이런 맥락이다. 당시 조선은 주자 성리학의 화이관華夷觀에 사로잡혀 있었다. 화이관에 따르면 여진족은 천박한 오랑캐였다. 병자호란은 문수 화엄주자 성리학의 대결이기도 하였다. 월롱산성에 올라가 만주의 의미를 되새겨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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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롱산 정상에서 바라본 북한산

장춘과 철도원 삼대

세계의 근대는 철도 개척의 역사로 시작되었다. 한반도에서 대륙으로 이어지던 철도는 식민지 근대와 제국주의 상징물이다. 황석영이 지은 철도원 삼대에 일제 식민지 시대의 철도와 관련된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철도 기관수인 이일철이 아내와 아들 지산을 데리고 지금의 장춘인 신경에 사는 고모댁을 가는 여정이다. 장춘은 경성에서 경의선을 따라 신의주까지 간 다음 압록강 건너 단동을 거쳐 만주벌판을 종단하여 밤새도록 달려 지금의 심양인 봉천에 도착한다. 봉천에서 북동쪽으로 신의주에서 온 거 만큼 달리면 신경에 도착한다. 신경에 도착한 장면과 일철의 아내와 고모 사이에서 이런 대화가 오고간다.

어째서 그맘때 주위의 몇몇 아는 사람들이 사라질 때마다 찾아보면 모두 만주로 가버렸을까.

신경역에 내리니 이미 저녁때가 되었다. 플랫폼에는 마중 나온 이들이 가득했고….

, 여기선 일본말이 아니면 대접받지 못한다. 시장에 가면 중국말이 대접받지만 호테루나 까페나 차부에선 일본말을 써야 고분고분해.’

조선말은요?’

마차나 택시를 타려고 마부나 운전수에게 조선옷 입고 조선말 하면 못 알아듣는 척하구, 아니면 그냥 걸어가라며 안 태워준다. 그러군 만주족 한족 것들이 우리 보구 쑥덕거린다. 망국노라구 그래.’

여기선 그런다더라. 일본인 일등국민, 조선인 이등국민, 만주족 한족 몽골족은 삼등국민이야.’”

위만황궁과 마지막 황제 부의

청나라는 심양에서 나라를 세우고 장춘에서 멸망했다. 그곳으로 가는 것이다. 장춘하면 먼저 청의 마지막 황제 부의溥儀가 떠오를 것이다. 위만황궁은 부의가 1932년부터 일제가 패망한 1945년까지 만주국 황제로 직무를 보며 생활하던 곳이다. 현재는 위만황궁 박물관으로 당시를 보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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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의의 위만황궁 집무실

20세기 초반 동아시아는 제국주의와 민족주의가 충돌하던 시기였다. 구체제는 붕괴되고 신체제가 자리 잡기 전의 혼란 속에서 한 인물은 역사 속 거대한 변곡점의 상징이 되었다.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이자, '허수아비 황제'로 불렸던 부의다. 그는 두 차례 황제의 자리에 올랐지만, 단 한 번도 온전한 주권을 행사하지 못한 비운의 군주였다. 그의 두 번째 제국인 만주국은 오직 일본의 군국주의 욕망에서 탄생한 인공적인 국가였고, 부의는 그 정점에 앉은 꼭두각시였다.

부의는 1906년 청나라 황족 누르하치 후손으로 태어나 불과 세 살의 나이에 황위에 올랐다. 하지만 청나라는 이미 내외부의 압력에 흔들리고 있었고, 그가 즉위한 지 불과 3년 만에 신해혁명이 발발하여 제국은 종말을 고했다. 1912년 선통제가 퇴위하면서 수천 년 이어진 중국 황제제도는 막을 내렸다. 이후 부의는 북경 자금성에 머물며 황제의 형식을 갖춘 유폐된 군주로 살아갔다.

하지만 그에게 황제의 자리는 1931년 일본 관동군의 만주사변과 함께 다시 돌아왔다. 일본은 만주를 점령한 후 이듬해인 1932년 만주국이라는 괴뢰국가를 수립하고 부의를 집정으로 옹립했다. 그가 황제로 재등극한 것은 1934년으로 이때부터 '강덕제康德帝'라는 칭호를 사용했다.

겉으로는 만주국은 독립된 자주국가를 표방했다. 수도 신경(지금의 장춘)을 중심으로 법과 행정을 갖추고 국기와 국가도 있었으며 황제도 존재했다. 그러나 정치·군사·외교의 모든 결정권은 일본 관동군이 쥐고 있었다. 부의는 일본의 계획에 따라 움직이는 허수아비에 불과했다.

일본은 부의를 앞세워 만주국을 중국인, 일본인, 만주인, 조선인, 몽골인 등 5개 민족이 서로 협력하며 화합한다는 ‘5족협화의 이상국가로 선전했지만, 실상은 일본인은 대륙 침략의 전초기지로 삼았다. 만주는 풍부한 자원과 전략적 요충지로 일본은 이를 이용해 중국 본토로의 진출을 꾀했던 것이다.

일본은 부의에게 상징적 권위만을 부여한 채, 모든 실권을 박탈했다. 그는 만주국 궁전에서 일본 군인과 고문들의 감시 아래 고립된 생활을 해야 했고, 황제의 권위는 사라진 지 오래였다.

1945년 일본의 패전과 함께 만주국은 붕괴됐다. 부의는 소련에 의해 포로로 붙잡혀 시베리아로 압송되었고, 이후 1950년 중국으로 송환되어 전범 재교육소에 수감되었다.

1959년 마오쩌둥 정권은 부의를 사면하고, 그는 일반 시민으로서 북경 식물원의 정원사로 일하게 되었다. 붉은 중국의 백성으로 전환된 이 마지막 황제는 그제야 비로소 자신의 의지대로 살아갈 수 있는 삶을 살기 시작했다. 그리고 1967년 문화대혁명의 소용돌이가 일던 시기에 조용히 생을 마감했다.

결론적으로 만주국과 부의의 관계는 주권을 잃은 군주의 비극이자, 침략자의 도구로 이용당한 국가의 허상이다. 부의는 분명한 역사적 책임에서 자유롭지 않지만, 동시에 역사의 거대한 파도에 휘말린 20세기 동아시아가 겪은 고통과 혼란을 대변하고 있다.

간도에 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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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가 간도!

장춘에서는 위만황궁만 관람하고 연변 조선족 자치주가 있는 연길로 향했다. 연변 조선족 자치주는 길림성 동북부 지역에 자리 잡고 있다. 연길시, 도문시, 돈화시, 훈춘시, 용정시, 화룡시, 왕청현, 안도현의 행정구역을 관할하며 조선 민족이 자치권을 갖고 있는 곳이다. 다만 1992년 한중수교 이후 조선동포 한국 방문이 시작되면서 이젠 육할 이상이 한국에 정착하여 원래 연길 자치구에 거주하였던 약 팔십이만 명의 조선 동포 중 이곳에 남은 이들은 칠십만 명 정도로 줄어들어 현재는 한족이 더 많이 거주하는 곳이 되었다.

조금 늦게 연길에 도착하여 연변 특색요리라고 하는 식당으로 안내한다. 냉면인데 맛이 독특하면서 맛이 참 좋고 양도 많다. 함경도 냉면을 생각하면 된다고 한다. 맛있게 먹었다고 인사하고 나오니 그 식당 간판 앞에 열군속㤠軍屬이라는 표지판이 붙어있다. 그 뜻이 뭔가 알아보니 우리나라로 치면 국가유공자. 국가유공자가 운영하는 식당…. 호텔에 도착하니 해란강호텔이다. 많이 들어본 이름이다. 연길시에 속하지만 용정시에서 매우 가까운 곳이다. ‘여기가 간도로구나!’ 라고 느끼는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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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란강 호텔

간도란?

압록강 상류와 두만강 북쪽 조선인 거주 지역을 일컫는 말로 현재는 연변 조선족 자치주 지역을 가리킨다. 두만강 북쪽 연변지역을 북간도또는 동간도’, 그 서쪽 압록강 너머 지역을 서간도라 부른다.

청나라는 명나라를 정복한 후 청나라의 발흥지인 만주를 보호하기 위하여 한인들의 만주 이주를 금지한 법령과 정책인 봉금령封禁令을 시행했다. 이는 만주족의 풍속과 본거지를 지키기 위한 방편이었지만 만주로의 이주는 계속되었다. 이를 틈관동闖關東(산해관 동쪽 즉 만주를 가리킨다)이라고 한다. 봉금령 지역은 동북 3성에 이르는 엄청난 범위다.

사람이 살지 않는 지역이 되었는데 조선의 법에서는 이를 어길 시 사형에 처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족뿐만 아니라 조선의 북부지방 백성들도 기근과 각종 자연재해로 인하여 살길을 찾아 몰래 만주로 넘나 들었다. 이를 범월인犯越人이라고 했는데 죽음을 각오하고 범월을 택했을 때 그들은 어떤 처지였겠는가?

윤동주의 증조부도 19세기 중후반 간도로 이주했다고 한다. 범월을 하려면 두만강, 압록강을 건너야 한다. 그러다 발각되면 그들은 강 건너가 아니라 두만강에 있는 섬에 다녀왔다.’라고 둘러댔다. 두만강에 있는 섬들 중 우리가 아는 녹둔도가 일백이십만 평이라니 물론 거기서도 농사를 지었을 것이지만 대부분은 강을 건너 지금의 간도지방에서 농사를 지은 것이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붙여진 이름이 사이 간間자 간도가 된 것이다.

또 다른 한자로 개간할 간墾자 간도인데 이는 농사를 지으려면 개간을 했을 터 상당한 설득력이 있다. 그리고 괘이름간艮자도 쓰는데 조선의 정북正北과 정동正東 사이 즉. 간艮방에 위치한 지역이라는 의미에서 간艮자 간도를 쓰기도 한다. 결과적으로 간도는 말 그대로 강 가운데 퇴적물이 쌓여 육지와 육지 사이인 강에 형성된 섬이다.

임진강의 오십삼만 평 정도 되는 초평도와 같은 섬에 비유할 수 있다. 처음에는 조선 북부지방 함경도, 평안도에 거주하던 백성들이 건너가서 농사를 짓던 작은 섬에 불과하였으나 이주자가 급격히 늘어나면서 간도의 범위가 강 건너 육지로 엄청나게 확대된 것이다.

 

북간도로 가는 월이

-리찬-

 가구야 말려느냐 가구야 말어 너는 너는 참 정말 가구야 말려느냐

이민이라 낼 아침 첫차에 실려 아아 가없고 황막한 그 땅 네 얼마나 쓸쓸하랴

철철 추위 혹독한 그 땅 네 얼마나 괴로우랴

사시장장 가여운 네 생각 내 어찌 견디리 자나깨나 그리운 네 생각 어찌 배기리

위 시는 1932년 일본이 괴뢰 만주국을 건국한 후 소위 국책이민시대의 만주 북간도로 떠나는 1930년대의 무수한 농민들의 한 모습으로 조선의 어디에 가든지 매일 같이 볼 수 있는 현상을 그린 것이다. ‘상서로운 도시라는 의미의 연길延吉은 연길자치주의 주도로서 이 땅으로 이주해 온 수많은 조선족들이 우리 말과 글, 전통과 풍습을 그대로 이어받아 중국 내 독특한 소수민족 도시로 발전한 곳이다.

봉오동과 청산리 전투를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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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오동 전투

아침 일찍 우리는 두만강이 흐르는 조··러 국경지대인 훈춘 방천으로 향했다. 가는 도중 봉오동 전투가 벌어졌던 봉오동 골짜기가 있는 산을 가리키는데 정확하게는 알 수가 없다. 한번 가보고 싶었지만 그냥 지나치면서, 봉오동 전투와 함께 청산리 전투에 대하여 짧게 이야기로 들을 수밖에 없었다.

 

봉오동 전투는 19206월 만주 지역에서 활동하던 독립군이 일본 정규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둔 역사적인 사건이다. 이 전투는 3·1운동 이후 무장 독립 투쟁의 실마리가 되면서 독립운동에 큰 자신감을 불어넣었다.

19193·1운동 이후 만주로 건너간 수많은 독립투사들은 무장 독립군을 조직하며 항일 투쟁을 이어가자, 이에 일제는 독립군을 소탕하고자 대대적인 토벌 작전을 계획했다. 19205월에는 일본군 헌병이 독립군에 의해 사살되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본격적인 정규군을 동원하기에 이르렀다. 당시 대한독립군, 군무도독부, 대한신민단 등 여러 독립군 부대는 홍범도를 총사령관으로 추대하고 대한군북로독군부라는 연합 부대를 결성하여 일본군의 공격에 대비했다.

독립군은 봉오동 계곡의 지형이 길고 좁아 매복에 유리한 걸 알고, 소규모 병력으로 일본군을 유인했다. 이에 일본군은 독립군을 추격하여 봉오동 계곡 깊숙이 들어서면서 독립군의 계책에 말려들었다.

192067일 정오 봉오동 계곡으로 완전히 들어온 일본군을 향해 계곡의 유리한 고지에 매복해 있던 독립군 부대는 일제히 총공격을 개시했다. 사방에서 쏟아지는 독립군의 집중 사격에 일본군은 속수무책으로 4시간여의 치열한 전투 끝에 수많은 사상자를 내며 퇴각했다. 이 전투에서 독립군은 단 4명의 전사자와 2명의 부상자만 발생한 반면, 일본군은 무려 157명이 전사하고 300명이 넘는 부상자를 내면서 압도적인 패배를 당했다.

봉오동 전투의 승리는 단순한 군사적 승리를 넘어, 독립군은 일본군 정규 부대와 싸워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었다. 이는 국내외 한민족에게 독립에 대한 확고한 희망을 심어주었다. 또한 이후 청산리 전투의 성공적 수행에 결정적 디딤돌이 되면서, 독립 전쟁의 서막을 열어젖힌 역사적인 사건으로 평가받고 있다.

청산리 전투

192010월 만주 간도 화룡현, 안도현 일대에서 벌어진 청산리 전투는 한국 독립운동사에 있어 가장 빛나는 승리 중 하나로 기록되어 있다. 이 전투는 봉오동 전투에서 독립군에게 패배를 당한 일본군이 대규모 보복 작전을 감행하면서 시작되었다. 일본군은 훈춘 사건을 조작하여 이를 빌미로 약 2만여 명의 대병력을 만주에 파견하여 독립군을 완전히 소탕하고 한인 사회를 초토화하려 했다. 이러한 일본의 대대적인 공세에 맞서 김좌진이 이끄는 북로군정서군과 홍범도가 이끄는 대한독립군을 중심으로 여러 독립군 부대가 연합하여 청산리 일대에서 치열한 항전을 벌였다.

청산리 전투의 전개 과정은 크게 10여 차례에 걸친 게릴라전으로 이루어졌다. 김좌진 장군은 일본군의 병력 우세를 정면으로 맞서기보다는 청산리의 험준한 지형을 활용한 매복과 기습 공격을 주요 전술로 삼았다. 일본군이 독립군을 추격해 청산리 계곡으로 들어오자, 독립군은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고 있다가 좁은 골짜기에 들어선 일본군을 사방에서 공격했다. 이 첫 전투인 백운평 전투에서 독립군은 일본군을 크게 격파했다.

이후에도 천수평, 완루구, 어랑촌 등 청산리 일대에서 약 엿새 동안 독립군의 기습 작전은 계속되었다. 홍범도 장군의 대한독립군은 후방에서 일본군의 퇴로를 차단하고 측면을 공격하며 승리를 뒷받침했다. 특히 어랑촌 전투에서는 일본군을 독립군으로 오인하여 자기들끼리 교전하는 일까지 발생할 만큼 독립군의 전술은 효과적이었다. 독립군의 뛰어난 유격전술과 지형의 높은 활용도를 바탕으로 일본군은 거듭 패배할 수밖에 없었다.

이 전투의 결과에 대해서는 한국과 일본의 기록에 차이가 있으나, 독립군이 일본군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한국 측은 일본군 전사자가 1,200여 명, 부상자가 3,300여 명에 달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반면 일본 측은 이보다 훨씬 적은 수의 사상자를 보고했다. 하지만 일본군이 독립군 토벌이라는 원래의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고 퇴각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청산리 전투가 독립군의 압승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청산리 전투의 역사적 의의는 매우 크다. 먼저, 무기와 병력에서 절대적인 열세에 있던 독립군이 일본 정규군을 상대로 대규모 전투에서 승리를 거둠으로써 독립 전쟁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두 번째, 봉오동 전투에 연이은 승리는 독립운동가들에게 더욱 큰 자긍심을 심어주었고, 국내외의 독립운동 세력에게 희망을 주었다. 세 번째, 이 전투는 독립군 부대들이 연합하여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으며, 향후 독립운동의 중요한 본보기가 되었다.

반면 청산리 전투의 승리는 동시에 일본군의 무자비한 보복을 불러왔다. 일본군은 독립군을 돕는다는 이유로 청산리 인근의 한인 마을을 무차별적으로 습격하고 주민들을 학살하는 '간도참변'을 일으켰다. 이로 인해 수많은 무고한 한인이 희생되면서 독립군 부대들은 새로운 활로를 찾아야 했다. 이처럼 청산리 전투는 군사적 승리와 함께 한민족 불굴의 항일 의지와 독립을 향한 염원을 보여준 역사적 사건으로 기억되고 있다.

간도참변

1910년 일제의 경술국치 이후 만주 간도에서는 어떤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을까. 수많은 변란이 일어났는데 그 중 간도참변은 청산리, 봉오동 전투와 직접 연관이 되었다. 너무나 원통하고 슬픈 일이다. 앞에서 언급되었지만 간도참변을 요약하면 이렇다.

19204월 일제는 만주의 관동군에 조선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제국 군대까지 합류시켜 대규모 군대를 간도로 보냈다. 명목은 조선 독립군을 토벌한다는 것이었지만 사실은 간도에 거주 중인 민간 조선인들을 무차별 학살한 대참변이었다. 봉오동, 청산리 전투 등에서 독립군에게 연달아 참패한 것에 대한 보복이다.

191931일 조선에서는 만세 운동이 있어났다. 만세 운동은 평화적 비폭력 운동이었지만 일제는 비무장 조선인을 총칼로 진압했다. 이후 독립군들은 무장투쟁의 필요성을 깨닫고 무장투쟁 준비를 하였다. 이 시기에 여러 독립군 양성기관과 독립군 부대가 편성되었다.

이후 무장 독립군 세력들은 일제의 식민통지기관에 커다란 타격을 주는 등 활발한 게릴라 활동을 하였다. 이에 일제는 위협과 회유로 만주의 중국 군벌까지 끌어들여 합동으로 독립군 토벌작전을 시작한다. 하지만 만주에 거주하는 조선인들의 저항과 중국 군대의 비협조로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게 된다.

192067일 봉오동전투에서는 독립군에게 전멸에 가까운 치욕스런 패배를 당한 일제는 정규군을 만주에 직접 투입하여 일거에 독립군을 소탕할 계획을 세웠다. 출병 명분을 만들기 위해 중국 마적을 사주해서 같은 해 10월 훈춘현 일본 영사관을 습격하여 조선인들에게 죄를 덮어 씌웠다. 일본군은 항일운동 근거지 초토화 작전을 진행하면서 대대적인 독립군 토벌작전을 펼쳤다. 그러나 독립군은 일본군이 공격해 오기 어려운 산속과 중소中蘇 국경지대로 미리 이동하였기 때문에 그 작전은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한편 1021일부터 26일까지 청산리전투에서 크게 패하면서 일본군은 그 보복으로 간도에 거주하는 조선인들을 초토화시켰다. 19214월까지 수많은 조선인 마을을 대상으로 방화, 약탈, 대학살을 저지른다. 이를 간도 참변 혹은 경신참변이라고 한다. 독립신문에 따르면 조선인 3,700여명이 사망하였다.

 

 

눈물 젖은 두만강 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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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만강과 조··러 삼국 경계

국경지대라서 그런지 검문이 심했다. 아마 한 시간 이상 소요되었던 것 같다. 오고가고 하는 차량도 그리 많지가 않고, 낯이 익은 안내원이 늘 관광객들을 버스로 안내하는데도 불구하고 뭐가 그리 오래 걸리는지 모르겠다. 방천에 거의 다 와서는 왼쪽으로는 러시아 국경 표지석이 오른쪽으로는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북조선과 경계로 접근을 못하도록 철조망을 설치해 놓았다.

방천에 도착하니 조선족이 운영하는 허름한 식당으로 안내한다. ‘뚱보식당이라는 간판이 쓰여져 있었다. 음식은 겉모습과는 달리 맛이 있었다. 과거에는 두만강 건너 북조선 사람들이 여기로 놀러 오기도 했단다. 그야말로 지척에 북조선 함경북도다. 점심 식사 후 조금 더 가니 방천국가풍경명승구란다. 한마디로 관광단지다. 커다랗게 조성해 놓았는데 평일이어서 그런지 관광객들은 별로 없다. 이곳을 오는데 그렇게 까다로우니 누가 오겠나 싶기도 하다. 우리는 버스에서 내려 관광구의 셔틀버스로 갈아타고 삼국 변경 전망대로 향했다. ··러 삼국의 경계를 바라볼 수 있는 전망대가 높게 설치되어 있다. 몇 층을 올라가서 내려다보니 두만강과 철교 그리고 러시아 연해주 쪽이 훤히 보인다.

두만강철교_cleanup.png*타워에서 본 두만강과 철교

두만강 명칭

두만강豆滿江이라는 명칭은 고려강高麗江, 도문강圖們江 등 여러 가지로 표기된 바도 있다. 특히 중국에서는 도문강圖們江이라고 쓰는데 발음을 투먼Tumen강이라 하니 두만강인지 헷갈릴 수밖에 없다. 다음에 가는 코스가 도문圖們이니 더욱 혼동된다. 그리고 콩의 원산지가 한반도 북부지방과 만주이기 때문에 두만강은 콩이 가득한 땅의 강이라는 설도 있다. 배에 콩을 가득 싣고 건너는 모습이 연상된다.

파주에서는 매년 11월 하순이면 임진각 너른 마당에서 파주장단콩축제가 열린다. 관람객이 참 많이 온다. 축제장 위치가 수도권에 있고 접근성이 좋은데다 축제장이 워낙 넓어 상당히 편리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장단콩의 효능이 관람객을 부르는데 결정적인 요인이리라. 장단콩축제에 출품되는 장단콩은 옛날부터 명성이 높았다. 고구려의 영토가 만주뿐만 아니라 한강과 임진강 이북 쪽까지 광범위했을 때 만주에 심겨지던 콩 품종이 고구려의 장천현인 지금의 장단에 심게 되었다. 장단 토질이 만주와 같이 콩의 생육에 적합하기 때문이다. 옛날이라면 임진강에서도 두만강에서와 같이 콩을 가득 실은 배가 오가지 않았을까.

동해와 일본해

두만강과 철교를 내려다보면서 중국이나 러시아가 두만강을 통하여 동해로 나가는 통로를 개발하면 서로 좋지 않을까하고 순진한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안내 표지판에 일본해라는 단어가 내 눈에 띄었다. 순간 이게 아닌데 라는 반감이 일었다. 마침 안내원이 우리 쪽으로 다가오기에 물었더니 국제기구에서 일본해로 명명해서 그렇게 표기했다고 하면서 가버렸다. 썩 좋은 기분이 아닌 상태에서 관람을 마치고 타워 1층으로 내려와서 셔틀에 타려고 하는데, 타워 입구 벽 전체에 그려진 대형 지도에도 역시 일본해라고 표시되어 있었다. 그런데 그 안내원이 일본해라는 명칭이 당연하다는 듯이 아무렇지도 않게 또 설명을 한다. 우리 일행이 적지 않다. 나는 순간적으로 속초 앞바다까지 일본해라고 불러야 한단 말인가 하는 생각이 퍼뜩 떠오르면서 그게 아니에요!’라며 발끈하고 말았다.

마침 옆에 있던 어느 분도 동해와 일본해를 병기한다고 하는데…라고 보조를 맞추는 말이 내 귀에 들려왔다. 안내원은 당황하면서 뒷말을 잇지 못하고 셔틀로 안내한다. 물론 나도 더 이상 언급하고 싶지 않았다. 이 문제는 굉장히 예민한 문제이기 때문에 아무렇게나 언급할 사항이 아니다. 국제적으로 논란이 되면서 병기문제까지 거론되고 있으니만큼 신중해야 한다. 특히 안내원과 같이 여러 사람에게 영향을 주는 사람은 그간의 진행과정을 잘 설명해야한다. 예를 들면 지금 국제기구에는 일본해로 되어 있지만 대한민국에서 이의를 제기하여 지금은 동해와 일본해를 병기하는 나라가 있고 세계적으로 의견이 바뀌고 있는 상태이다.’ 이렇게 만이라도 언급하면 될 게 아닌가. 내가 애국에만 경도되어 욱했다면 성질 고약한 사람이 되겠지만, 이 문제는 그렇게 간단히 치부해 버릴 일이 아니다.

 동해는 한국인이 이천년 이상 사용해 오고 있는 명칭으로 삼국사기의 동명왕편, 광개토대왕비, 팔도총도, 아국총도를 비롯한 다양한 사료와 고지도에서 이 같은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일본해라는 명칭은 1602년 마테오리치의 곤여만국전도坤輿萬國全圖에서 처음 사용된 명칭이라고 주장하는데, 일본인 스스로가 동해 수역의 명칭을 일본해로 인식하지 않았음이 다양한 사료를 통해 증명되고 있다. 특히, 일본은 19세기에 일본해사용이 증가하게 되었다는 서양고지도 조사결과를 제시하며 일본해명칭이 19세기에 확립되었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일본변계략도日本邊界略圖, 신제여지전도新製輿地全圖 등 당시 일본에서 제작된 다수의 지도가 동해 수역을 조선해朝鮮海로 표기하고 있는 사실은 일본해명칭이 일본에서조차 확립된 것이 아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외교부 홈페이지 참고

오늘날과 거의 같은 모습의 세계지도가 본격적으로 제작되던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일본이 아시아의 강국으로 부상하면서 동해수역은 일본해(Sea of Japan)’라는 표기로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다. 특히, 1929년 국제수로기구(IHO)해양과 바다의 경계(Limits of Oceans and Seas)’초판을 발간했을 당시 우리나라가 일본의 식민지하에서 국제사회에 동해 명칭의 정당성을 주장할 수 있는 기회를 갖지 못했던 점은 일본해표기의 국제적 확신을 가속화시키는 원인이 되었다.

이 해양과 바다의 경계책자는 국제기구 차원에서 지명을 결정하여 수록한 책자로 세계 해양의 경계 및 명칭의 중요한 인용 자료가 되었다. 동 책자 2판 발간 시(1937)도 여전히 일본의 식민 지배하에 있었고, 3판 발간 시(1953)에는 6.25전쟁 중이었다.

6.25전쟁 이후 국가를 재건하면서 우리는 동해표기가 정당하게 반영될 수 있도록 지속적으로 노력해왔다. 가령 1965년 「한‧일 어업협정」 체결 당시 한‧일 양국은 해역의 명칭에 합의하지 못해 결국 동해일본해를 자국어판 협정문에 각각 별도로 사용하기로 결정한 적이 있다. 또한 민간차원에서도 동해 지명을 되찾기 위한 각종 활동을 추진해왔다. 이 같은 노력에 힘입어 정부는 1991년 우리나라의 유엔 가입 이후 1992년 유엔지명표준화 회의(UNCSGN)에서 처음으로 동해 표기 문제를 국제회의에서 공식 제기하게 되었다.

이에 세계 언론, 각국 지도제작사, 출판사 등에서 최근 동해일본해를 병기하는 사례가 양국 외교부의 조사에 따르면 2000년에는 2.8%, 2009년에는 28.1%로 발표되었으며, 현재는 40%를 초과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국제수로기구는 202011IHO총회에서 바다 명칭을 대체하는 숫자로 된 고유 식별자 체계(S-130)’를 도입하기로 결정했다. 이는 기존의 지명 표기 대신 숫자로 된 명칭을 사용하겠다는 것으로, 디지털 시대를 맞아 새로운 표준을 만들기로 한 것이다. 이 결정으로 IHO가 발간하는 해도와 문서에서는 ‘Japan Sea’가 사용되지 않고 숫자로 된 명칭이 사용된다. 이는 한국과 일본이 모두 한 발짝 물러선 형태로 향후 해양 명칭 표기 논의에 중요한 전환점이 될 것으로 보인다.

결론적으로 볼 때, ‘일본해단독 표기에서 동해/일본해 병기로의 전환은 점진적으로 확산되는 추세에 있다. 특히 국제수로기구의 새로운 디지털 표기 방식 도입은 향후 이 문제에 대한 새로운 접근방식을 제시할 것으로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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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른쪽 벽면에 일본해라고 표시되어 있다

눈물 젖은 두만강의 사연

마음 한편이 찜찜한 상태에서 다음 여정으로 접어들었다. 북조선 남양시가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바라다보이는 중국 도문에 도착했다. 여기서는 사진도 찍지 못하게 할 뿐만 아니라 핸드폰 자체를 꺼내지 못하게 한다. 아마 그 동안 남한 관광객들이 북조선을 향하여 지나친 액션을 취하지 않았나 추측한다.

과거 여기를 다녀간 관광객 중에는 북조선 남양시를 바라보면서 어떤 목적으로 요란하게 굿 같은 것을 하여 북조선을 자극하는 행위를 하였다고 한다. 그 이후 중국 당국에서 남한 관광객에게 일정한 행위를 못하도록 제재를 가했다고 한다. 여기야말로 지척이다. 남양시와 도문시는 조그마한 하천과 같은 넓이의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있다.

과거에는 유람선을 띄우고 유람도 했고 도문국경대교를 통하여 간단하게 왕래했다고 하는데 지금 그게 안 되는 모양이다. 지금도 두만강 변에는 오성기가 달린 유람선이 정박해 있어 중국관광객은 사용하는 것 같은데 우리는 얼씬도 못하게 한다. 그리고 북·중간에는 같은 공산국가였고 우방으로서 그렇게 경계할 것 같지 않은데 그렇지도 않은가보다. 남한 사람들만 경계하는 건지 중국 사람도 경계하는 건지는 모르겠다.

두만강하면 아무래도 김정구선생의 눈물 젖은 두만강이 떠오른다. 이 노래에는 애달픈 사연이 있다.

1935년 이 노래를 작곡한 이시우는 순회공연을 위해 두만강 도문시 한 여관에서 묵게 되었다. 그런데 옆방에서 한 여인이 비통하게 우는 소리가 났다. 이튿날 이시우는 여관 주인에게 물어보았는데, 그 여인은 여관 주인의 친구인 김증손녀金曾孫女였다. 그 여인의 남편 문창학文昌學이 독립운동을 하러 갔는데 몇 년 동안 오지 않았다. 남편을 찾아 나선 부인은 닷새 전 서대문형무소에서 사형이 집행되었다는 사실을 접한다. 공교롭게도 남편 문창학이 사망한 날이 그의 생일이었다. 그녀는 남편의 생일상과 제사상을 함께 차렸다. 제사를 마친 부인은 두만강으로 뛰어들어 생을 마감하였다고 전해진다. 이 사연을 접한 이시우는 충격을 받아 눈물 젖은 두만강을 작곡하면서 망국의 원한과 민족의 설움을 통탄하는 감정을 실었다 한다.” 도문이라고 하니 이 앞 두만강에 투신한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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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왼쪽이 도문시, 오른쪽이 북한 온성군 남양마을이다.

눈물 젖은 두만강

-김용호 작사/이시우 작곡, 김정구 노래-

두만강 푸른 물에 노젖는 뱃사공

흘러간 그 옛날에 내 님을 싣고

떠나든 그 배는 어데로 갔소

그리운 내 님이여 그리운 내 님이여

언제나 오려나

 중국 어디에서나 남녀들이 어울려 사교댄스를 추는 모습은 흔히 볼 수 있는 일이다. 여기 도문시 두만강 변 광장에서도 남녀 노인들이 어울려 댄스를 추면서 오후 한때를 즐기는 모습은 참 신선해 보였다. 나는 댄스를 추는 노인들과 북조선 남양시가 겹쳐 보이는 모습을 뒤로 하고 버스에 올랐다.

 

윤동주와 용정을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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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두레 우물

이번 여행에서 내가 가장 가고 싶었던 곳을 간다. 물론 광복 80주년이기도 하지만, 윤동주 순국 80주기를 맞아 선생의 생가와 명동학교를 비롯하여 해란강, 용정 등 이름 없이 이국땅에서 조국 독립을 염원하며 스러져간 선구자들의 숨결이 느껴지고 있는 곳이다. 얼마 가지 않아 용정 시내가 나오고 용문교와 해란강을 지나는데 그냥 지나친다.

 역시 용두레우물도 길가에 조그맣게 표시되어 있는데 그도 지나친다. 아쉬었으나 어쩌랴. 윤동주 생가로 가는 도중 이곳이 과연 간도인가? 다른 곳과는 달리 농촌 풍경을 띠면서 어디서 많이 본 듯한 그림이었다. 조선인이 이주해 살아온 간도의 전형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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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두레 우물

용두레 우물은 1839년∼1880년 사이에 조선에서 온 장인석과 박인덕에 의해 발견되었다고 한다. 이 우물은 일찍이 여진족이 쓰던 우물로 물이 깊고 오가는 길손들이 두레박을 빌리는 일이 잦아 두레박 즉, 용두레를 한족과 조선족들이 해 놓아 그때부터 용두레 우물이라 부르게 되었다. 이 고장 이름도 용두레촌으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오늘날 연길이 중국 조선족의 행정과 소비의 중심이 되었지만, 조선족의 뿌리가 자라기 시작한 곳은 이곳 용정이라고 한다.

윤동주와 생가

윤동주의 생가가 있는 명동촌에 도착하니 마을 전체를 잘 보전하려 애쓴 느낌이 든다. 윤동주의 명성을 알고 중국 용정시 인민정부가 역사적 의의와 유래를 고려하여 이를 관광지로 지정하고 19948월 역사적 유물로서 윤동주 생가를 복원하였다. 윤동주 생가는 1900년 초 그의 조부인 윤하현이 이곳 명동촌에 지은 것으로 방 10간과 곳간이 달린 조선족 전통구조로 된 기와집이다. 윤동주는 1917930일 이 집에서 태어났다. 19324월에 윤동주가 은진중학교로 진학하게 되자 그의 조부는 솔가하여 용정으로 이사하고 이집은 매도하여 다른 사람이 살다가 1981년 허물어졌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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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 생가

생가 안팎으로 윤동주 시인의 모든 시를 대리석 등에 새겨 세웠는데 중국어로도 번역하여 같은 크기의 돌에 새겼다. 그 시가 정서적으로 제대로 번역되었는지는 모르겠으나 꽤 애쓴 것 같다.

병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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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

살구나무 그늘로 얼굴을 가리고, 병원 뒤뜰에 누워, 젊은 여자가 흰옷 아래로 하얀 다리를 드러내 놓고 일광욕을 한다.

한나절이 기울도록 가슴을 앓는다는 이 여자를 찾아오는 이, 나비 한 마리도 없다. 슬프지도 않은 살구나무 가지에는 바람조차 없다.

 나도 모를 아픔을 오래 참다 처음으로 이곳에 찾아왔다. 그러나 나의 늙은 의사는 젊은이의 병을 모른다.

나한테는 병이 없다고 한다. 이 지나친 시련, 이 지나친 피로, 나는 성내서는 안 된다.

 여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옷깃을 여미고 화단에서 금잔화 한 포기를 따 가슴에 꽂고 병실 안으로 사라진다.

나는 그 여자의 건강이―아니 내 건강도 속히 회복되기를 바라며 그가 누웠던 자리에 누워본다.

이숭원이 쓴 시평의 일부를 옮긴다.

사회는 거대한 병원이고 우리는 저마다 병을 앓고 있다. 어지러운 현실을 바라볼 때마다 마음 깊은 곳에서 울분이 치밀지만, 나약한 개인은 스스로 고통을 감내하며 살아간다. 이러한 공간에서 윤동주가 발견한 희망의 씨앗은 일상 속의 작은 위로와 연민이다. 금잔화 한 포기가 주는 소박한 위로, 동질적인 사람들 사이에서 느끼는 연민이 삭막한 세상을 견디는 힘이 된다.

어쩌면 세상은 영원히 우리에게 거대한 병원으로 남을지 모른다. 그래도 분명한 것은 이 시가 우리에게 은은하게 빛나는 금잔화로 다가와 삶의 고단한 순간마다 위로를 건네준다는 사실이다. 윤동주는 자신의 아픔을 드러내기 위해 이 시를 썼지만, 그 시가 시대를 건너뛰어 지금의 우리에게 위로한다

윤동주 시인의 집안은 1886년 윤동주의 증조부가 함경북도 종성군에서 두만강을 건너 북간도로 이주했고, 1900년 조부 윤하현 때 명동촌에 정착했다. 당시 간도는 조선인들에게 새로운 삶의 터전이자 독립운동 근거지로 여겨지던 곳이다. 명동촌은 특히 민족교육에 힘쓴 곳으로 시인의 민족의식을 키우고 문학적 감수성을 함양하는데 큰 영향을 미쳤다.

일제강점기라는 암울한 시대 속에서 민족의 고뇌와 독립에 대한 열망, 순수한 인간의 내면을 섬세하고 깊이 있는 언어로 노래한 시인 윤동주(19171945). 그 짧은 생애와 강렬한 시 정신은 시대를 초월하여 오늘날까지도 많은 이들에게 깊은 감동을 주고 있다.

윤동주의 본명는 윤해파尹海波였으나, 1938년 창씨개명 압력 속에서 윤동주로 이름을 바꾸었다. 어려서부터 문학에 대한 남다른 재능을 보였으며, 명동소학교와 은진중학교를 거치며 시를 쓰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 그는 동급생들과 함께 문예 동인지를 발간하며 습작활동을 활발히 펼쳤다. 1938년 윤동주는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입학하여 이양하, 정지용 등 당대 최고의 문인들로부터 지도와 영향을 받으며 역량을 키워나간다.

재학시절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라는 제목으로 시집 출판을 준비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자필본으로만 남게 된다. 19424월 도쿄 릿쿄대 영문과에 진학했다가 같은 해 10월 교토 도시샤대 영문과에 편입한다. 이 대학을 다니던 윤동주는 19437월 조선 독립을 선동했다는 혐의로 일본 경찰에 체포됐고 이듬해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2년형을 선고 받았다. 후쿠오카 형무소에 수감 중이던 윤동주는 1945216일 순국했다. 사인은 공식적으로는 뇌일혈로 알려져 있으나 생체실험으로 인한 사망설이 유력하게 제기되고 있다. 너무나 애석한 일이다.

윤동주 시인의 시가 이 세상에 빛을 발한 것은 여러 사람들의 드라마 같은 이야기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본다. 첫 번째는 서울대 교수를 지낸 국문학자 정병욱(19221982)이다. 경남 남해에서 태어난 그는 1940년 연희전문학교에 입학하여 윤동주와 만난다. 윤동주보다 두 학년 아래고 나이는 다섯 살 아래였다. 그들 두 사람은 하숙을 하면서 문학적 감성이 통하여 교분을 쌓았다. 이듬해 11월 윤동주는 시집 출간을 계획하면서 자필 원고 세부 중 한 부를 정병욱에게 건넸다. 윤동주는 19423월 일본으로 떠났고 정병욱은 19441월 졸업을 앞둔 상태에서 학병으로 징집되었다.

정병욱은 윤동주 자필 원고를 어머니에게 맡겼고, 어머니가 그 원고를 전라남도 광양 망덕포구 가까이 있는 가족의 사업장 마루 밑에 독을 묻고 보자기에 싸서 소중하게 간직했다. 그런 불확실하고 암울한 상황에서 선배의 한글 원고를 고이 간직하려 한 정병욱의 진심과 아들의 당부를 충실히 따라주신 어머니의 정성으로 윤동주의 정선된 19편 작품이 무사히 보존될 수 있었다.

정병욱은 윤동주가 옥사했다는 사실을 1946년 가을 윤동주의 동생 윤일주를 통해 알게 되었다. 정병욱은 자신이 윤동주의 원고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전했다. 여기에 연희전문학교 룸메이트였던 강처중이 보관한 원고가 더해지고 그 외의 보존 작품이 합해져 시집 출간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그러니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출간에 결정적 역할을 한 사람은 정병욱이다.

그리고 또 한 사람은 전 연세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 박사 마광수(19512017)교수다. 그는 1983년 발행한 마광수의 박사학위 논문 「윤동주 연구 – 그의 시에 나타난 상징적 표현을 중심으로」 결론에서 윤동주의 정서를 부끄러움이라 말했다. 이건 순전히 마광수의 지적 산물이라고 평한다. 그와는 별개로 1992년 그가 집필한 「즐거운 사라」가 외설이라는 필화사건으로 강의 도중 체포되고 유죄가 선고되어 복역했다. 교수직도 해임되었다. 그 후 1998년 복직돼 2016년 정년퇴임하였으나 우울증으로 2017년 자살로 생을 마감하였다. 안타까운 일이다.

어쨌든 정병욱, 강처중, 윤일주와 윤혜원 등 친지, 친인척들의 노력에 더하여 마광수 교수의 윤동주 재발견이라 할 만한 스토리가 오늘의 윤동주를 있게 했다 할 것이다.

최근에는 물리학자 김상욱이 하늘과 바람과 별과 인간이라는 책을 물리학적 측면에서 쓰고 그 서문에 이렇게 썼다.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는 윤동주 시인의 유고시집 제목이다. 하늘, 바람, 별은 그 시집에 실린 ‘서시’에 등장하는 단어다.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겠지만, 나에게 하늘은 우주와 법칙, 바람은 시간과 공간, 별은 물질과 에너지로 다가온다. 즉 물리적으로 존재하는 모든 것이라 볼 수 있다. 여기에 인간을 더하면 이 책이 다루는 내용이 된다.

김약연과 명동학교

명동촌을 나오면서 그의 외삼촌 김약연이 건립했다는 명동학교와 정신적으로 서로 의지한 그의 고종사촌 송몽규의 생가도 지척에 있어 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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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약연이 지은 명동학교

명동촌은 한국 근대사와 항일운동, 기독교 계몽운동의 중요한 무대 중 하나였다. 이곳에는 일제강점기 조선인의 교육과 독립정신 함양을 위해 세워진 상징적 학교인 명동학교가 있었고, 그 중심에는 김약연金躍淵(1869~1944) 이라는 인물이 있었다. 그는 윤동주의 외삼촌이자 당시 북간도 지역 조선인 사회의 정신적 지도자였다.

김약연은 황해도 출신으로 젊은 시절 미국 유학을 통해 서양의 문물과 기독교 정신을 받아들였고, 이를 기반으로 조선 민족의 자주적 성장을 모색한 계몽사상이 그의 생애를 관통하는 사상이었다. 1910년대 초 많은 조선인이 일제의 탄압을 피해 간도로 이주했을 때, 김약연은 이민자들의 삶의 기반을 다지고 자주적 교육의 필요성을 절감하여 1920년 명동학교를 설립하였다. 명동학교는 단순한 교육기관을 넘어 민족 정체성과 독립정신을 키우는 요람으로 기능했다.

김약연은 학교 설립 당시 민족교육을 핵심 목표로 삼고, 조선어와 조선 역사, 기독교 윤리, 실용 학문을 교육과정에 포함시켰다. 그는 우리 민족은 스스로의 힘으로 살 길을 개척해야 한다.”는 신념 아래 어린이와 청년들에게 언어와 문화, 종교, 역사를 가르쳤고, 이는 일제의 동화 정책에 저항하는 실질적인 민족운동이었다.

명동학교는 이후 윤동주를 비롯해 수많은 인재들을 길러냈다. 윤동주가 이곳에서 배운 도덕성과 민족의식, 인문정신은 그의 시 세계에도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다. 김약연은 외삼촌의 역할을 넘어, 윤동주의 정신적 스승이기도 했다. “민족 없는 교육은 존재할 수 없다는 그의 교육 철학은 시대를 앞선 민족주의 교육 실천이었고, 이는 오늘날에도 교육의 본질을 되새기게 하는 귀한 유산이다.

김약연은 광복 한해 전 세상을 떠났지만, 그의 뜻은 명동학교와 후손들에게 길이 남아 있다. 명동학교는 현재 복원되어 교육문화유산으로 보존되고 있다. 김약연은 교육자이자 목회자, 그리고 민족운동가로서 그 위상을 계속 이어가고 있다.

이번 여행은 광복 80주년 기념특집∼여드렛날에 동북기행이다. 그리고 1945216일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옥사 80주년이어서 그 뜻을 되새겨보자고 온 여행이었다. 막상 와서 보고 나니 만주, 간도, 조선, 일제, 식민 등 많은 단어들이 뒤엉켜 마음이 무거웠다.

일송정

일송정으로 향했다. 버스 안에서 동행한 S 선생이 얼마 전에 와 본 적이 있는데 일송정은 평지로 옮겨 좀 그렇다고 했다. 나는 산에 있는 게 맞을 것 같은데 하면서 말끝을 흐리고 말았다. 와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일송정 관광안내처인 비암산 풍경구에 도착하여 산꼭대기 쪽을 보니 정자가 멀리 보인다. 저게 일송정이 아니냐고 했더니 대답이 없다. S 선생이 아무래도 잘못 본 것 같다. 사람은 언제든 인식을 잘못 할 수 있는 것이니까. 그는 몇 번 고개를 갸웃하면서 본인의 인식 상태를 점검한다. 어쨌든 일송정은 비암산 정상에 있는 게 틀림없다. 우리는 전동카를 타고 일송정이 있는 비암산 꼭대기로 향했다. 전동카는 몹시 힘이 드나 보다. 거친 숨을 몰아쉬면서 겨우겨우 정상에 다다랐다. ‘一松亭이라는 선돌 세우기 공사가 한창이다. 그게 제일 중요한 지점인 줄 알고 사진도 찍고 그랬는데 그게 아니라 그 아래쪽으로 오 분여 내려가야 한다. 용정 시내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곳에 정자가 세워져 있고 그 앞에 소나무 한 그루가 심겨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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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구자

-윤해영 작사 /조두남 작곡-


일송정 푸른솔은 늙어 늙어 갔어도

한줄기 해란강은 천년 두고 흐른다
지난날 강가에서 말 달리던 선구자

지금은 어느 곳에 거친 꿈이 깊었나

너무나 잘 알려진 가곡이다. 나는 과거 이 노래를 여러 번 부른 적이 있다. 폼을 잡고 불러봤지만 그저 그렇고 듣기 거북하지나 않으면 다행이었다. 1절은 지금도 부를 줄 안다. 이 노래는 비목과 함께 어딘지 모르게 숙연하고 장중한 분위기를 자아내면서 가슴을 울려 부르게 된 것 같다.

노랫말에 나오는 지명이 일송정, 해란강, 용두레, 비암산 등이 모두 지금 보고 있는 여기, 북간도 만주에서 항일운동을 하던 독립군을 묘사한 것으로 알려지면서 1980년대까지 널리 불리던 노래였다. 운동권에서조차 민중가요 못지않게 부를 정도였으나 지금은 작사가, 작곡가 모두 친일 논란에 휘말리면서 외면받고 있다. 그래도 젊어서 즐겨 부르던 가곡이니 그냥 적어봤다.

선구자노랫말에 나오는 일송정은 정자모양의 소나무를 뜻하는데, 일제하에 일경과 밀정을 피하여 애국지사들이 밤마다 이 소나무 밑에서 암암리에 모여 독립운동을 모의했다고 한다. 이런 사실을 알게 된 일제는 이 소나무에 구멍을 뚫고 약품을 넣어 고사시켰다고 한다. 그 후 1991년부터 수차례에 걸쳐 용정시가 한국의 도움을 받아 소나무를 다시 심고 정자를 다시 세웠다. 사진에 있는 정자와 소나무는 그때 심고 조성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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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송정에서 바라본 용정시내와 해란강

비암산 일송정에 올라 용정시내를 내려다보면 평강벌과 오른쪽으로 공릉강과 비슷한 규모의 해란강이 흐르고 있다. 당시 독립운동을 하던 수많은 투사들이 일경 앞잡이들의 밀고로 체포되어 갖은 고초를 겪었다고 한다.

압록강은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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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산 인삼

통화로 가는데 비가 추적추적 온다. 저녁이 되어 식사를 하러 들어가는데, ‘서울관이라는 식당 로비에서 인삼 파는 청년이 인삼을 사라고 서툰 한국말로 호객을 한다. 인삼에 크게 관심이 없어 식사를 마친 후 그냥 지나쳐 호텔로 왔는데 거기까지 따라왔다. 비는 아침까지도 내린다. 인삼 파는 청년도 밤을 새웠는지 호텔 로비에서 인삼을 팔고 있었다. 알고 보니 여기가 인삼과 사연이 깊은 역사가 있고 개성인삼과도 연관이 있었다.

16세기 중후반 동아시아는 명나라의 재정 개혁과 후금의 성장이라는 거대한 변화를 겪고 있었다. 조선과 후금은 백두산 일대에서 자생하는 인삼을 둘러싸고 심각한 갈등을 빚었는데, 이는 단순한 경제적 마찰을 넘어 양국의 외교 관계와 동아시아 무역 질서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인삼은 예로부터 귀한 약재이자 건강식품으로 높은 가치를 지녔다. 이 시기 인삼을 둘러싼 갈등이 심화된 데에는 복합적인 원인이 작용했다.

먼저, 명나라는 조세 제도를 은으로 일원화하는 일조편법一條鞭法(여러 가지 방법으로 받던 세금을 은으로만 징수)을 시행하였다. 이는 상업 활성화와 은銀 유입을 촉진하여 부유층의 인삼 수요를 급증시켰다. 유럽과 일본에서 유입된 막대한 양의 은이 인삼 구매력을 증폭시켜 인삼의 국제 가격을 엄청나게 끌어올리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리고, 조선은 상업을 천시하여 인삼 역시 조공품 이외의 개인 거래를 엄격히 통제했다. 인삼은 주로 조정에서 관리하는 야생 산삼에 의존했기에 폭등하는 수요를 감당할 수 없었다. 반면, 만주 지역의 후금은 인삼을 중요한 교역품으로 인식하고 부족장들이 적극적으로 상업에 개입하여 명나라와의 교역을 활성화했다.

또한, 누르하치가 여진족을 통일하고 후금을 건국하면서 신생국가로서 막대한 재정이 필요했다. 인삼은 후금이 명나라와 교역하여 은을 확보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수단이었고, 누르하치 스스로도 젊은 시절 인삼 채취로 부를 축적했기에 인삼의 경제적 가치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이에 따라 백두산 등 주요 인삼 산지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기 시작했다.

더하여, 한반도와 만주 지역은 예로부터 국경이 명확하지 않아 조선인과 여진족이 비교적 자유롭게 드나들며 인삼을 채취했다. 그러나 인삼의 가치가 폭등하면서 양측의 월경越境 채취 경쟁이 격화되었고, 필연적으로 국경 침범 및 무력 충돌로 이어졌다.

 이와 같이 인삼을 둘러싼 조선과 후금의 갈등은 여러 가지 중대한 결과를 초래했다.

첫째, 후금은 인삼을 국가의 중요한 수입원으로 여겼기에 조선인의 월경 채삼採蔘에 대해 강력히 항의하고 무력으로 제압하는 일도 잦았다. 조선 또한 월경 채삼을 금지했지만, 인삼의 막대한 이득 때문에 밀거래는 끊이지 않았다. 후금은 조선에 공식적으로 항의 서한을 보내 월경 문제를 비난했고,

조선은 이에 대해 사과하며 수세에 몰리는 상황이 반복되었다. 이러한 국경 갈등은 훗날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으로 이어지는 조선과 후금() 간의 전면적인 무력 충돌의 중요한 배경이 되었다.

둘째, 조선은 인삼 사무역私貿易을 통제하고 조공무역에 의존하려 했으나, 인삼의 높은 국제적 수요와 후금의 적극적인 상업 활동은 이러한 정책을 유지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후금은 국가 운영에 필요한 물자를 조선에서 확보하기 위해 개시開市, 즉 공식적인 시장 개방을 끊임없이 요구했다. 결국 조선은 회령개시 등 일부 무역 시장을 개설하여 후금과의 교역을 부분적으로 허용하게 되었다. 이는 조선의 엄격한 상업 통제 정책이 현실적인 경제 상황 앞에서 한계를 드러낸 결과였다.

셋째, 16세기 중후반의 인삼 갈등은 야생 인삼 공급의 한계와 폭발적인 수요 사이의 불균형을 명확히 보여주었다. 비록 인삼 재배 기술이 본격적으로 활성화된 것은 18세기 이후였지만, 이러한 극심한 공급 부족은 인삼의 인공 재배 필요성을 절감하게 만들었다. 고려시대부터 인삼 재배 시도가 있었고, 특히 개성 지역에서는 17세기부터 '양직묘삼농법養直苗蔘農法'(어린 인삼을 길러 본밭에 옮겨 심는 농법)과 같은 재배 기술이 확산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는 16세기 갈등을 통해 확인된 인삼의 막대한 경제적 가치와 수요가 재배 기술 발전을 촉진하는 동기가 되었음을 시사한다.

넷째, 인삼 무역을 둘러싼 조선과 후금의 갈등은 당시 동아시아 무역 질서에 중요한 변화를 가져왔다. 인삼은 후금이 명나라에 반기를 들고 성장하는 데 필요한 재정 마련에 큰 역할을 했다. 결국 동아시아 패권이 명에서 후금()으로 넘어가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 청년은 백두산에 심은 장뇌삼으로 사포닌이 많이 들어 있어 약효가 우수하다고 혼신을 다하여 설명한다. 저렇게 열심히 홍보하는데 사는 사람이 없으면 어떡하나 내심 괜한 걱정을 했다. 그래도 사는 사람이 있어 다행이었다. 매년 10월 중순이면 임진각 광장에서 개성인삼축제가 열리니 나는 거기 가서 사면 될 일이다. 사실 어떤 인삼인지도 알 수 없고 개성인삼에 견줄 수 있을까 생각하면서 그냥 보기만 했다.

신흥무관학교

통화는 신흥무관학교와 관련이 깊다. 통화는 압록강을 경계로 북한과 마주하고 있다. 20세기 초 한민족의 주요 독립운동 거점 중 하나였다. 이곳은 일제의 감시가 비교적 덜한 데다 험준한 산악 지형이 독립군 활동에 유리했기 때문에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활동 무대로 삼았다.

1910년 한일병합 이후 이회영 선생을 비롯한 신민회 회원들은 만주에 독립운동 기지를 건설하기로 결의했다. 이회영 일가 여섯 형제는 전 재산을 정리해 독립운동 자금으로 마련했고, 1911년 류하현柳河縣 삼원보三源堡에 경학사耕學社를 설립했다. 그리고 그 산하에 독립군 간부 양성소인 신흥강습소를 세웠는데, 이것이 바로 신흥무관학교의 전신이다. 신흥무관학교는 재정난 속에서도 무장 투쟁의 필요성을 절감하며 3,500명 이상의 독립군 간부를 배출하는 위대한 성과를 거두었다. 이들은 군사훈련뿐만 아니라 투철한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교육을 받으며 항일 무장 투쟁의 핵심 역량을 길렀다.

하지만 19209월 일제가 훈춘 사건을 조작하고 만주 지역의 대대적으로 독립군 탄압이 시작되었다. 신흥무관학교는 더 이상 운영될 수 없게 되어 결국 그해 11월 폐교할 수밖에 없었다. 본부는 길림 교하시 액목현으로 옮겼다. 학생들과 교관들은 서로군정서, 북로군정서 등 여러 독립군 부대에 편입되어 항일 무장 투쟁을 이어갔다.

신흥무관학교의 정신은 폐교 이후에도 만주 전역, 특히 통화 지역에서 활발하게 이어졌다. 이곳을 거점으로 삼아 일제와 중국 군벌에 맞서 싸웠다. 통화 주변에는 당시 독립군이 사용했던 은신처와 훈련장 등 독립운동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 또한, 1930년대에 김좌진 장군이 설립한 한족총연합회 본부가 이곳에 있었으며, 한국독립군이 조직되어 활동한 무대가 되기도 했다.

신흥무관학교 출신들이 주축이 된 독립군 부대들은 1920년 청산리 전투와 봉오동 전투와 같은 역사적인 승리를 거두며 일제에 큰 타격을 입혔다. 이들의 활약은 해외 독립운동의 가능성을 보여주었고, 무장 투쟁의 의지를 전 세계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이들이 승리를 거둘 수 있었던 배경에는 험준한 만주 지형에 대한 뛰어난 이해와 신흥무관학교에서 체계적으로 배운 군사 훈련이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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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흥무관학교

통화에서 활동한 신흥무관학교 졸업생들은 훗날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한국광복군 창설에도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지청천, 김학규 장군과 같이 신흥무관학교 출신 장교들이 광복군의 핵심 인물로 활약하며 조국 광복에 기여했다. 이들은 해방 이후에도 대한민국 육군 창설에 기여하는 등 대한민국의 초석을 다지는 역할을 했다.

결론적으로 통화는 우리 민족의 독립을 향한 염원과 희생, 그리고 위대한 승리의 역사가 살아 숨 쉬는 곳이다.

압록강, 신의주 풍경

단동에 도착하자마자 유람선을 타기 위해 압록강 공원 선착장으로 이동하였다. 하필 중국 최대의 명절인 51일 노동절이라 인산인해였다. 비가지 뿌리는 바람에 모두 애를 먹었다. 유람선을 타고 압록강 중간쯤 북조선과 경계로 해서 하류 쪽으로 돌아오는 유람이었다. 30분정도 걸렸다. 건너편 신의주가 빤히 보이는데 사람은 별로 없다. 앞에서도 잠깐 말한 바 있지만 참 이상한 게 조·중이 우호지간이라고 하면 서로 왕래하는데 불편이 없어야 할 것 같은데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압록강 철교 관람하는데도 아주 엄격하다. 중간까지 가면 콱 막아놓아 되돌아와야 한다. 북조선 쪽에서는 골재채취가 한창이다. 중국은 골재채취를 엄하게 단속하고 처벌도 강하여 골재채취를 못한다고 한다. 그래서 북한으로부터 수입해 쓴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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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동-신의주간 철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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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동 유람선에서 본 신의주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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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조선 신의주 모래 채취 광경

단동의 옛이름 안동

단동의 옛 이름은 안동이다. 단동은 고구려 영토였으나 고구려 멸망 후 당의 안동도호부 관할에 있다가 발해의 영역으로 포함되었다. , 원 시기에는 파속부라는 지방행정단위에 속하였다. 청이 중원을 장악하고 봉금지대를 설정하면서 사람이 살지 않는 땅이 되었다. 봉금령이 해제된 이후 1876년 안동현이 설치되었으며, 1903년 대외개방 항구가 되었다. 1931년 만주사변으로 일본군이 점령한 후 일본제국주의의 대륙 진출기지가 되었다. 1934년 만주국에 의해 안동성 안동현이 되었다. 1965년 단동시로 개칭하였다.

위화도 회군

위화도도 보인다. 안내원이 손으로 가리켜 멀리서 보고 말았지만 역사적인 곳이다. 위화도 회군은 고려 말기 명나라에 대한 공격 명령을 받은 무장 이성계가 군대를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 위화도에 이르렀다가, 명의 강력한 반발과 민심의 피로감을 이유로 명 정벌을 중지하고 도리어 군사를 돌려 개경으로 회군한 사건이다. “4불가론을 내세워 출정을 반대했는데 그의 논리는 ① 여름철이라 질병이 창궐하고, ②식량과 군수물자가 부족하며, ③백성들의 지지가 없고, ④명과의 전쟁은 불의하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의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결국 출정하게 되었다.

그러나 압록강을 건너 위화도에 이른 이성계는 정치적 판단을 내린다. 그는 무의미하고 위험한 전쟁을 강행하는 대신, 군을 이끌고 개경으로 회군하여 정권을 장악하는 결정을 내린다. 이 회군으로 그는 군사적 실권과 민심을 기반으로 권력을 장악한 후, 최영을 제거하고 정치적 주도권을 잡는다. 이후 고려 왕조의 몰락과 조선 왕조의 성립으로 이어지는 역사적 대전환의 계기가 되었다. 그런데 위화도가 사만이나 되는 군대가 주둔할 수 있는 그렇게 너른 땅인가 하고 다시 한번 건너다보았다.

대련

오늘이 이번 만주기행의 일정이 사실상 끝이다. 압록강 끝부분 단동에서 북변 황해를 끼고 도드라지게 튀어나온 대련을 향하여 오래도록 달린다. 피로해서 그런지 잠이 온다.

대련은 요동반도 최남단 끝에 위치한 동북부 최대 항구 도시이며 만주의 관문이다. 지형은 삼면이 바다에 접하고 있어 해안선의 길이가 무려 이천여 킬로미터나 된다. 대련에서 반도 끝 쪽으로 안중근의사를 비롯한 독립운동가들이 순국한 여순旅順이 있다. 옛 전국시대에는 동북지역의 소수민족과 중원민족과의 교통중심지로 이곳을 차지하고자 서로 견제하여 오다가 명청明淸시대에는 군사방어의 요충지로 발전하였다. 1715년 청나라는 여순에 수사영水使營을 설치하였고, 1879년 청의 군사대권을 거머쥔 이홍장은 여순항에 포대를 건축하고 보루를 쌓아 선박수리소인 도크를 건설함으로써 세계적인 군항으로 성장했다. 여순 항구는 지세가 험하고 대형 군함도 정박할 수 있으며 부동항이다. 그래서 제국주의 열강들은 근대 100년 동안 여순항 쟁탈전을 벌였던 것이다. 여순 일대는 1894년 중일전쟁으로 일본에 점령당했다. 그 후 러시아를 비롯한 독일, 프랑스 등에게 점령당하고 일본에게는 사십여 년 간 지배당한 아픈 역사가 서려 있는 곳이다.

안중근

안중근과 여순 그리고 하얼빈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어려서부터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왔던 이름이다. 그 중 여순은 안중근 의사가 감옥에 있는 몸으로 순국할 때까지 계시던 곳이 아닌가. 대련에서 여순 감옥까지 불과 칠십 킬로미터 전후일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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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은 18799월 황해도에서 태어나 1910326일 여순 감옥에서 순국하였다. 그는 19091026일 하얼빈 역에서 대한민국 침략의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여 대한민국의 독립 의지를 전 세계에 알린 엄청난 사건의 당사자로서 독립운동가였다. 또한 단순히 민족주의에 머무르지 않고 동양평화론을 주창한 뛰어난 사상가였다. 그의 의거는 오늘날까지도 많은 사람들에게 공감을 주고 있다.

여순 감옥은 1902년 러시아가 중국인들을 제압하기 위해 건축하였다. 그 후 러일전쟁으로 일본이 여순을 점령하면서 중국, 한국, 러시아인을 수감하기 위하여 증축하였다. 일본의 만주 침탈 후 각국 항일운동가 수만 명이 수감되었는데 한국의 독립운동가인 안중근을 비롯하여 신채호, 이회영, 박희광 등도 수감생활을 하던 곳이다. 2009년 중국정부는 대한민국과 공조하여 국제항일열사전시관이라는 별도의 전시관을 마련하였다. 이곳에는 안중근 의사의 흉상을 세우고 그의 항일운동 사료와 기사들을 정리한 자료 전시관을 만들었다.

안중근 의사는 나의 유해를 하얼빈 공원 옆에 묻어두었다가 우리 국권이 회복되거든 고국으로 옮겨다오.’라고 유언을 남겼다. 그러나 한국, 중국 정부 뿐 만아니라 여러 독립애국단체 등에서 유해발굴을 시도했으나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고 있다. 안타깝다.

그 역사적 현장을 지척에 두고 가보지 못하고 가야 한다니 뭔가 빠진 듯한 느낌이다. 꼭 한 번 여순 만 겨냥하여 다시 오리라 다짐하며 귀국선에 올랐다.

※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