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압록강은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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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두산 인삼

통화로 가는데 비가 추적추적 온다<span lang="EN-US">. </span>저녁이 되어 식사를 하러 들어가는데<span lang="EN-US">, ‘</span>서울관<span lang="EN-US">’</span>이라는 식당 로비에서 인삼 파는 청년이 인삼을 사라고 서툰 한국말로 호객을 한다<span lang="EN-US">. </span>인삼에 크게 관심이 없어 식사를 마친 후 그냥 지나쳐 호텔로 왔는데 거기까지 따라왔다<span lang="EN-US">. </span>비는 아침까지도 내린다<span lang="EN-US">. </span>인삼 파는 청년도 밤을 새웠는지 호텔 로비에서 인삼을 팔고 있었다<span lang="EN-US">. </span>알고 보니 여기가 인삼과 사연이 깊은 역사가 있고 개성인삼과도 연관이 있었다<span lang="EN-US">.</span>

<span lang="EN-US">16</span>세기 중후반 동아시아는 명나라의 재정 개혁과 후금의 성장이라는 거대한 변화를 겪고 있었다<span lang="EN-US">. </span>조선과 후금은 백두산 일대에서 자생하는 인삼을 둘러싸고 심각한 갈등을 빚었는데<span lang="EN-US">, </span>이는 단순한 경제적 마찰을 넘어 양국의 외교 관계와 동아시아 무역 질서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span lang="EN-US">.</span>

인삼은 예로부터 귀한 약재이자 건강식품으로 높은 가치를 지녔다<span lang="EN-US">. </span>이 시기 인삼을 둘러싼 갈등이 심화된 데에는 복합적인 원인이 작용했다<span lang="EN-US">.</span>

먼저<span lang="EN-US">, </span>명나라는 조세 제도를 은으로 일원화하는 일조편법一條鞭法<span lang="EN-US">(</span>여러 가지 방법으로 받던 세금을 은으로만 징수<span lang="EN-US">)</span>을 시행하였다<span lang="EN-US">. </span>이는 상업 활성화와 은銀 유입을 촉진하여 부유층의 인삼 수요를 급증시켰다<span lang="EN-US">. </span>유럽과 일본에서 유입된 막대한 양의 은이 인삼 구매력을 증폭시켜 인삼의 국제 가격을 엄청나게 끌어올리는 결과를 가져왔다<span lang="EN-US">.</span>

그리고<span lang="EN-US">, </span>조선은 상업을 천시하여 인삼 역시 조공품 이외의 개인 거래를 엄격히 통제했다<span lang="EN-US">. </span>인삼은 주로 조정에서 관리하는 야생 산삼에 의존했기에 폭등하는 수요를 감당할 수 없었다<span lang="EN-US">. </span>반면<span lang="EN-US">, </span>만주 지역의 후금은 인삼을 중요한 교역품으로 인식하고 부족장들이 적극적으로 상업에 개입하여 명나라와의 교역을 활성화했다<span lang="EN-US">.</span>

또한<span lang="EN-US">, </span>누르하치가 여진족을 통일하고 후금을 건국하면서 신생국가로서 막대한 재정이 필요했다<span lang="EN-US">. </span>인삼은 후금이 명나라와 교역하여 은을 확보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수단이었고<span lang="EN-US">, </span>누르하치 스스로도 젊은 시절 인삼 채취로 부를 축적했기에 인삼의 경제적 가치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span lang="EN-US">. </span>이에 따라 백두산 등 주요 인삼 산지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기 시작했다<span lang="EN-US">.</span>

더하여<span lang="EN-US">, </span>한반도와 만주 지역은 예로부터 국경이 명확하지 않아 조선인과 여진족이 비교적 자유롭게 드나들며 인삼을 채취했다<span lang="EN-US">. </span>그러나 인삼의 가치가 폭등하면서 양측의 월경越境 채취 경쟁이 격화되었고<span lang="EN-US">, </span>필연적으로 국경 침범 및 무력 충돌로 이어졌다<span lang="EN-US">.</span>

 이와 같이 인삼을 둘러싼 조선과 후금의 갈등은 여러 가지 중대한 결과를 초래했다<span lang="EN-US">.</span>

첫째<span lang="EN-US">, </span>후금은 인삼을 국가의 중요한 수입원으로 여겼기에 조선인의 월경 채삼採蔘에 대해 강력히 항의하고 무력으로 제압하는 일도 잦았다<span lang="EN-US">. </span>조선 또한 월경 채삼을 금지했지만<span lang="EN-US">, </span>인삼의 막대한 이득 때문에 밀거래는 끊이지 않았다<span lang="EN-US">. </span>후금은 조선에 공식적으로 항의 서한을 보내 월경 문제를 비난했고<span lang="EN-US">, </span>

조선은 이에 대해 사과하며 수세에 몰리는 상황이 반복되었다<span lang="EN-US">. </span>이러한 국경 갈등은 훗날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으로 이어지는 조선과 후금<span lang="EN-US">(</span>청<span lang="EN-US">) </span>간의 전면적인 무력 충돌의 중요한 배경이 되었다<span lang="EN-US">.</span>

둘째<span lang="EN-US">, </span>조선은 인삼 사무역私貿易을 통제하고 조공무역에 의존하려 했으나<span lang="EN-US">, </span>인삼의 높은 국제적 수요와 후금의 적극적인 상업 활동은 이러한 정책을 유지하기 어렵게 만들었다<span lang="EN-US">. </span>후금은 국가 운영에 필요한 물자를 조선에서 확보하기 위해 개시開市<span lang="EN-US">, </span>즉 공식적인 시장 개방을 끊임없이 요구했다<span lang="EN-US">. </span>결국 조선은 회령개시 등 일부 무역 시장을 개설하여 후금과의 교역을 부분적으로 허용하게 되었다<span lang="EN-US">. </span>이는 조선의 엄격한 상업 통제 정책이 현실적인 경제 상황 앞에서 한계를 드러낸 결과였다<span lang="EN-US">.</span>

셋째<span lang="EN-US">, 16</span>세기 중후반의 인삼 갈등은 야생 인삼 공급의 한계와 폭발적인 수요 사이의 불균형을 명확히 보여주었다<span lang="EN-US">. </span>비록 인삼 재배 기술이 본격적으로 활성화된 것은 <span lang="EN-US">18</span>세기 이후였지만<span lang="EN-US">, </span>이러한 극심한 공급 부족은 인삼의 인공 재배 필요성을 절감하게 만들었다<span lang="EN-US">. </span>고려시대부터 인삼 재배 시도가 있었고<span lang="EN-US">, </span>특히 개성 지역에서는 <span lang="EN-US">17</span>세기부터 <span lang="EN-US">'</span>양직묘삼농법養直苗蔘農法<span lang="EN-US">'(</span>어린 인삼을 길러 본밭에 옮겨 심는 농법<span lang="EN-US">)</span>과 같은 재배 기술이 확산되었다는 기록이 있다<span lang="EN-US">. </span>이는 <span lang="EN-US">16</span>세기 갈등을 통해 확인된 인삼의 막대한 경제적 가치와 수요가 재배 기술 발전을 촉진하는 동기가 되었음을 시사한다<span lang="EN-US">.</span>

넷째<span lang="EN-US">, </span>인삼 무역을 둘러싼 조선과 후금의 갈등은 당시 동아시아 무역 질서에 중요한 변화를 가져왔다<span lang="EN-US">. </span>인삼은 후금이 명나라에 반기를 들고 성장하는 데 필요한 재정 마련에 큰 역할을 했다<span lang="EN-US">. </span>결국 동아시아 패권이 명에서 후금<span lang="EN-US">(</span>청<span lang="EN-US">)</span>으로 넘어가는 결과를 가져왔다<span lang="EN-US">. </span>

 그 청년은 백두산에 심은 장뇌삼으로 사포닌이 많이 들어 있어 약효가 우수하다고 혼신을 다하여 설명한다<span lang="EN-US">. </span>저렇게 열심히 홍보하는데 사는 사람이 없으면 어떡하나 내심 괜한 걱정을 했다<span lang="EN-US">. </span>그래도 사는 사람이 있어 다행이었다<span lang="EN-US">. </span>매년 <span lang="EN-US">10</span>월 중순이면 임진각 광장에서 개성인삼축제가 열리니 나는 거기 가서 사면 될 일이다<span lang="EN-US">. </span>사실 어떤 인삼인지도 알 수 없고 개성인삼에 견줄 수 있을까 생각하면서 그냥 보기만 했다<span lang="EN-US">. </span>

### 신흥무관학교

통화는 신흥무관학교와 관련이 깊다<span lang="EN-US">. </span>통화는 압록강을 경계로 북한과 마주하고 있다<span lang="EN-US">. 20</span>세기 초 한민족의 주요 독립운동 거점 중 하나였다<span lang="EN-US">. </span>이곳은 일제의 감시가 비교적 덜한 데다 험준한 산악 지형이 독립군 활동에 유리했기 때문에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활동 무대로 삼았다<span lang="EN-US">. </span>

<span lang="EN-US">1910</span>년 한일병합 이후 이회영 선생을 비롯한 신민회 회원들은 만주에 독립운동 기지를 건설하기로 결의했다<span lang="EN-US">. </span>이회영 일가 여섯 형제는 전 재산을 정리해 독립운동 자금으로 마련했고<span lang="EN-US">, 1911</span>년 류하현柳河縣 삼원보三源堡에 경학사耕學社를 설립했다<span lang="EN-US">. </span>그리고 그 산하에 독립군 간부 양성소인 신흥강습소를 세웠는데<span lang="EN-US">, </span>이것이 바로 신흥무관학교의 전신이다<span lang="EN-US">. </span>신흥무관학교는 재정난 속에서도 무장 투쟁의 필요성을 절감하며 <span lang="EN-US">3,500</span>명 이상의 독립군 간부를 배출하는 위대한 성과를 거두었다<span lang="EN-US">. </span>이들은 군사훈련뿐만 아니라 투철한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교육을 받으며 항일 무장 투쟁의 핵심 역량을 길렀다<span lang="EN-US">.</span>

하지만 <span lang="EN-US">1920</span>년 <span lang="EN-US">9</span>월 일제가 훈춘 사건을 조작하고 만주 지역의 대대적으로 독립군 탄압이 시작되었다<span lang="EN-US">. </span>신흥무관학교는 더 이상 운영될 수 없게 되어 결국 그해 <span lang="EN-US">11</span>월 폐교할 수밖에 없었다<span lang="EN-US">. </span>본부는 길림 교하시 액목현으로 옮겼다<span lang="EN-US">. </span>학생들과 교관들은 서로군정서<span lang="EN-US">, </span>북로군정서 등 여러 독립군 부대에 편입되어 항일 무장 투쟁을 이어갔다<span lang="EN-US">.</span>

신흥무관학교의 정신은 폐교 이후에도 만주 전역<span lang="EN-US">, </span>특히 통화 지역에서 활발하게 이어졌다<span lang="EN-US">. </span>이곳을 거점으로 삼아 일제와 중국 군벌에 맞서 싸웠다<span lang="EN-US">. </span>통화 주변에는 당시 독립군이 사용했던 은신처와 훈련장 등 독립운동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span lang="EN-US">. </span>또한<span lang="EN-US">, 1930</span>년대에 김좌진 장군이 설립한 한족총연합회 본부가 이곳에 있었으며<span lang="EN-US">, </span>한국독립군이 조직되어 활동한 무대가 되기도 했다<span lang="EN-US">.</span>

신흥무관학교 출신들이 주축이 된 독립군 부대들은 <span lang="EN-US">1920</span>년 청산리 전투와 봉오동 전투와 같은 역사적인 승리를 거두며 일제에 큰 타격을 입혔다<span lang="EN-US">. </span>이들의 활약은 해외 독립운동의 가능성을 보여주었고<span lang="EN-US">, </span>무장 투쟁의 의지를 전 세계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span lang="EN-US">. </span>이들이 승리를 거둘 수 있었던 배경에는 험준한 만주 지형에 대한 뛰어난 이해와 신흥무관학교에서 체계적으로 배운 군사 훈련이 있었기 때문이다<span lang="EN-US">.</span>

<div class="hwp_editor_board_content" data-hjsonver="1.0" data-jsonlen="29357" id="bkmrk--1"></div>[![kth신흥무관학교.png](https://fridge.paju.wiki/uploads/images/gallery/2025-08/scaled-1680-/kth.png)](https://fridge.paju.wiki/uploads/images/gallery/2025-08/kth.png)  
\*신흥무관학교

통화에서 활동한 신흥무관학교 졸업생들은 훗날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한국광복군 창설에도 주도적으로 참여했다<span lang="EN-US">. </span>지청천<span lang="EN-US">, </span>김학규 장군과 같이 신흥무관학교 출신 장교들이 광복군의 핵심 인물로 활약하며 조국 광복에 기여했다<span lang="EN-US">. </span>이들은 해방 이후에도 대한민국 육군 창설에 기여하는 등 대한민국의 초석을 다지는 역할을 했다<span lang="EN-US">.</span>

결론적으로 통화는 우리 민족의 독립을 향한 염원과 희생<span lang="EN-US">, </span>그리고 위대한 승리의 역사가 살아 숨 쉬는 곳이다<span lang="EN-US">.</span>

### 압록강<span lang="EN-US">, </span>신의주 풍경

단동에 도착하자마자 유람선을 타기 위해 압록강 공원 선착장으로 이동하였다<span lang="EN-US">. </span>하필 중국 최대의 명절인 <span lang="EN-US">5</span>월 <span lang="EN-US">1</span>일 노동절이라 인산인해였다<span lang="EN-US">. </span>비가지 뿌리는 바람에 모두 애를 먹었다<span lang="EN-US">. </span>유람선을 타고 압록강 중간쯤 북조선과 경계로 해서 하류 쪽으로 돌아오는 유람이었다<span lang="EN-US">. 30</span>분정도 걸렸다<span lang="EN-US">. </span>건너편 신의주가 빤히 보이는데 사람은 별로 없다<span lang="EN-US">. </span>앞에서도 잠깐 말한 바 있지만 참 이상한 게 조<span lang="EN-US">·</span>중이 우호지간이라고 하면 서로 왕래하는데 불편이 없어야 할 것 같은데 그렇지 않은 것 같다<span lang="EN-US">. </span>압록강 철교 관람하는데도 아주 엄격하다<span lang="EN-US">. </span>중간까지 가면 콱 막아놓아 되돌아와야 한다<span lang="EN-US">. </span>북조선 쪽에서는 골재채취가 한창이다<span lang="EN-US">. </span>중국은 골재채취를 엄하게 단속하고 처벌도 강하여 골재채취를 못한다고 한다<span lang="EN-US">. </span>그래서 북한으로부터 수입해 쓴다고 한다<span lang="EN-US">.</span>

<span lang="EN-US">[![kth단동신의주철교.png](https://fridge.paju.wiki/uploads/images/gallery/2025-08/scaled-1680-/DANkth.png)](https://fridge.paju.wiki/uploads/images/gallery/2025-08/DANkth.png)  
\*단동-신의주간 철교</span>

<span lang="EN-US">[![kth신의주전경.png](https://fridge.paju.wiki/uploads/images/gallery/2025-08/scaled-1680-/O2bkth.png)](https://fridge.paju.wiki/uploads/images/gallery/2025-08/O2bkth.png)  
\*단동 유람선에서 본 신의주 전경</span>

<span lang="EN-US">[![kth신의주모래채취.png](https://fridge.paju.wiki/uploads/images/gallery/2025-08/scaled-1680-/e7mkth.png)](https://fridge.paju.wiki/uploads/images/gallery/2025-08/e7mkth.png)  
\*북조선 신의주 모래 채취 광경</span>

### 단동의 옛이름 안동

단동의 옛 이름은 안동이다<span lang="EN-US">. </span>단동은 고구려 영토였으나 고구려 멸망 후 당의 안동도호부 관할에 있다가 발해의 영역으로 포함되었다<span lang="EN-US">. </span>금<span lang="EN-US">, </span>원 시기에는 <span lang="EN-US">‘</span>파속부<span lang="EN-US">’</span>라는 지방행정단위에 속하였다<span lang="EN-US">. </span>청이 중원을 장악하고 봉금지대를 설정하면서 사람이 살지 않는 땅이 되었다<span lang="EN-US">. </span>봉금령이 해제된 이후 <span lang="EN-US">1876</span>년 안동현이 설치되었으며<span lang="EN-US">, 1903</span>년 대외개방 항구가 되었다<span lang="EN-US">. 1931</span>년 만주사변으로 일본군이 점령한 후 일본제국주의의 대륙 진출기지가 되었다<span lang="EN-US">. 1934</span>년 만주국에 의해 안동성 안동현이 되었다<span lang="EN-US">. 1965</span>년 단동시로 개칭하였다<span lang="EN-US">. </span>

### 위화도 회군

위화도도 보인다<span lang="EN-US">. </span>안내원이 손으로 가리켜 멀리서 보고 말았지만 역사적인 곳이다<span lang="EN-US">. </span>위화도 회군은 고려 말기 명나라에 대한 공격 명령을 받은 무장 이성계가 군대를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 위화도에 이르렀다가<span lang="EN-US">, </span>명의 강력한 반발과 민심의 피로감을 이유로 명 정벌을 중지하고 도리어 군사를 돌려 개경으로 회군한 사건이다<span lang="EN-US">. “4</span>불가론<span lang="EN-US">”</span>을 내세워 출정을 반대했는데 그의 논리는 ① 여름철이라 질병이 창궐하고<span lang="EN-US">, </span>②식량과 군수물자가 부족하며<span lang="EN-US">, </span>③백성들의 지지가 없고<span lang="EN-US">, </span>④명과의 전쟁은 불의하다는 것이었다<span lang="EN-US">. </span>하지만 그의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span lang="EN-US">, </span>결국 출정하게 되었다<span lang="EN-US">.</span>

그러나 압록강을 건너 위화도에 이른 이성계는 정치적 판단을 내린다<span lang="EN-US">. </span>그는 무의미하고 위험한 전쟁을 강행하는 대신<span lang="EN-US">, </span>군을 이끌고 개경으로 회군하여 정권을 장악하는 결정을 내린다<span lang="EN-US">. </span>이 회군으로 그는 군사적 실권과 민심을 기반으로 권력을 장악한 후<span lang="EN-US">, </span>최영을 제거하고 정치적 주도권을 잡는다<span lang="EN-US">. </span>이후 고려 왕조의 몰락과 조선 왕조의 성립으로 이어지는 역사적 대전환의 계기가 되었다<span lang="EN-US">. </span>그런데 위화도가 사만이나 되는 군대가 주둔할 수 있는 그렇게 너른 땅인가 하고 다시 한번 건너다보았다<span lang="EN-US">. </span>

### 대련

오늘이 이번 만주기행의 일정이 사실상 끝이다<span lang="EN-US">. </span>압록강 끝부분 단동에서 북변 황해를 끼고 도드라지게 튀어나온 대련을 향하여 오래도록 달린다<span lang="EN-US">. </span>피로해서 그런지 잠이 온다<span lang="EN-US">. </span>

대련은 요동반도 최남단 끝에 위치한 동북부 최대 항구 도시이며 만주의 관문이다<span lang="EN-US">. </span>지형은 삼면이 바다에 접하고 있어 해안선의 길이가 무려 이천여 킬로미터나 된다<span lang="EN-US">. </span>대련에서 반도 끝 쪽으로 안중근의사를 비롯한 독립운동가들이 순국한 여순旅順이 있다<span lang="EN-US">. </span>옛 전국시대에는 동북지역의 소수민족과 중원민족과의 교통중심지로 이곳을 차지하고자 서로 견제하여 오다가 명청明淸시대에는 군사방어의 요충지로 발전하였다<span lang="EN-US">. 1715</span>년 청나라는 여순에 수사영水使營을 설치하였고<span lang="EN-US">, 1879</span>년 청의 군사대권을 거머쥔 이홍장은 여순항에 포대를 건축하고 보루를 쌓아 선박수리소인 도크를 건설함으로써 세계적인 군항으로 성장했다<span lang="EN-US">. </span>여순 항구는 지세가 험하고 대형 군함도 정박할 수 있으며 부동항이다<span lang="EN-US">. </span>그래서 제국주의 열강들은 근대 <span lang="EN-US">100</span>년 동안 여순항 쟁탈전을 벌였던 것이다<span lang="EN-US">. </span>여순 일대는 <span lang="EN-US">1894</span>년 중일전쟁으로 일본에 점령당했다<span lang="EN-US">. </span>그 후 러시아를 비롯한 독일<span lang="EN-US">, </span>프랑스 등에게 점령당하고 일본에게는 사십여 년 간 지배당한 아픈 역사가 서려 있는 곳이다<span lang="EN-US">.</span>

### 안중근

안중근과 여순 그리고 하얼빈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span lang="EN-US">. </span>어려서부터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왔던 이름이다<span lang="EN-US">. </span>그 중 여순은 안중근 의사가 감옥에 있는 몸으로 순국할 때까지 계시던 곳이 아닌가<span lang="EN-US">. </span>대련에서 여순 감옥까지 불과 칠십 킬로미터 전후일 터이다<span lang="EN-US">.</span>

<span lang="EN-US">[![kth안중근.png](https://fridge.paju.wiki/uploads/images/gallery/2025-08/scaled-1680-/QpUkth.png)](https://fridge.paju.wiki/uploads/images/gallery/2025-08/QpUkth.png)</span>

안중근은 <span lang="EN-US">1879</span>년 <span lang="EN-US">9</span>월 황해도에서 태어나 <span lang="EN-US">1910</span>년 <span lang="EN-US">3</span>월 <span lang="EN-US">26</span>일 여순 감옥에서 순국하였다<span lang="EN-US">. </span>그는 <span lang="EN-US">1909</span>년 <span lang="EN-US">10</span>월 <span lang="EN-US">26</span>일 하얼빈 역에서 대한민국 침략의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여 대한민국의 독립 의지를 전 세계에 알린 엄청난 사건의 당사자로서 독립운동가였다<span lang="EN-US">. </span>또한 단순히 민족주의에 머무르지 않고 <span lang="EN-US">‘</span>동양평화론<span lang="EN-US">’</span>을 주창한 뛰어난 사상가였다<span lang="EN-US">. </span>그의 의거는 오늘날까지도 많은 사람들에게 공감을 주고 있다<span lang="EN-US">. </span>

여순 감옥은 <span lang="EN-US">1902</span>년 러시아가 중국인들을 제압하기 위해 건축하였다<span lang="EN-US">. </span>그 후 러일전쟁으로 일본이 여순을 점령하면서 중국<span lang="EN-US">, </span>한국<span lang="EN-US">, </span>러시아인을 수감하기 위하여 증축하였다<span lang="EN-US">. </span>일본의 만주 침탈 후 각국 항일운동가 수만 명이 수감되었는데 한국의 독립운동가인 안중근을 비롯하여 신채호<span lang="EN-US">, </span>이회영<span lang="EN-US">, </span>박희광 등도 수감생활을 하던 곳이다<span lang="EN-US">. 2009</span>년 중국정부는 대한민국과 공조하여 <span lang="EN-US">‘</span>국제항일열사전시관<span lang="EN-US">’</span>이라는 별도의 전시관을 마련하였다<span lang="EN-US">. </span>이곳에는 안중근 의사의 흉상을 세우고 그의 항일운동 사료와 기사들을 정리한 자료 전시관을 만들었다<span lang="EN-US">. </span>

안중근 의사는 <span lang="EN-US">‘</span>나의 유해를 하얼빈 공원 옆에 묻어두었다가 우리 국권이 회복되거든 고국으로 옮겨다오<span lang="EN-US">.’</span>라고 유언을 남겼다<span lang="EN-US">. </span>그러나 한국<span lang="EN-US">, </span>중국 정부 뿐 만아니라 여러 독립애국단체 등에서 유해발굴을 시도했으나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고 있다<span lang="EN-US">. </span>안타깝다<span lang="EN-US">.</span>

그 역사적 현장을 지척에 두고 가보지 못하고 가야 한다니 뭔가 빠진 듯한 느낌이다<span lang="EN-US">. </span>꼭 한 번 여순 만 겨냥하여 다시 오리라 다짐하며 귀국선에 올랐다<span lang="EN-US">.</span>

※ 참고문헌

- 중국으로 가는 옛길<span lang="EN-US">, </span>신 춘호
- 소현세자와 경안군의 슬픈 역사<span lang="EN-US">, </span>강 근숙
- 열하일기<span lang="EN-US">, </span>연암 박 지원
- 파주문화유산총람<span lang="EN-US">, </span>파주문화원
- 오랑캐 홍타이지 천하를 얻다<span lang="EN-US">, </span>장 한식
- 청태종과 월롱산성<span lang="EN-US">, </span>조용헌
- 동해명칭<span lang="EN-US">, </span>대한민국 외교부홈페이지
- 장단콩<span lang="EN-US">, </span>파주시홈페이지
- 윤동주 <span lang="EN-US">‘</span>병원<span lang="EN-US">’ </span>시평<span lang="EN-US">, </span>이숭원
- 조선족 재발견<span lang="EN-US">, </span>한주
- <span lang="EN-US">2025</span>년 광복 <span lang="EN-US">80</span>주년 기념특집 동북 기행<span lang="EN-US">, </span>생생클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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