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을 사랑한 호머 헐버트-강근숙
일제의 침략에 맞서 고종의 밀사로 활동했고, 을사늑약과 헤이그 밀사 사건 때 조선의 독립을 위해 노력했다. 1949년 한국에서 생을 마감했으며, 대한민국은 그의 공로를 인정해 건국공로훈장과 금관문화훈장을 추서했다.
국권침탈과 호머 헐버트의 조선입국
을사년 새해가 밝은지 어느새 두 달이다. 봄기운이 돌고 싹이 튼다는 우수雨水가 지나도, 바람이 강하고 기온이 떨어져 밖을 나가기가 을씨년스럽다.
푸른 뱀은 지혜와 풍요, 변화를 상징한다며 대운이 온다고 희망의 노래를 부르지만, 나라 안팎이 어수선해서인지 을사사화乙巳士禍, 을사늑약乙巳勒約, 을사오적乙巳五賊이란 단어가 뇌리에서 떠나지 않는다.
왕권을 둘러싼 권력 투쟁이야 나라가 생길 때부터 있었던 일이나. 120년 전, 일본이 강제로 을사늑약을 체결해 대한제국 외교권을 박탈시킨 사건은 결코 잊을 수 없는 일이다.
1905년 11월 17일, 을사늑약을 맺도록 겁박한 친일파 관리를 을사오적이라 부른다. 형조판서 민영환은 부당한 조약을 파기하고, 오적五賊(이완용, 이지용, 이근택, 박제순, 권중현)을 처형하라 소리쳤지만, 이미 대세가 기울어 “나는 죽음으로써 임금의 은혜에 보답하고 2천만 동포에게 사죄하노라”는 유서를 남기고 자결하였고, 각계각층의 지사들이 죽음으로 항거했다.
고종은 을사늑약이 강압에 이루어진 것임을 폭로하고, 강제조약을 알리기 위해 헤이그에서 열린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 이준, 이상설, 이위종 세 명의 특사를 파견한다. 이때 고종의 밀사 ‘호머 헐버트’는 먼저 출발해 평화회의장에 무사히 갈 수 있도록 이들을 도왔다. 일제의 방해로 회의장에는 들어가지도 못하고 결국 실패했으나, 그 일을 빌미로 헐버트는 일제에 의해 추방되고 고종은 폐위당했다.
나라에 힘이 없으면 백성들은 수난을 당한다.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 국력을 키워 앞서가는 민족만이 고난을 면하고 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다. 조선 말기 ‘문을 닫아야 조선을 지킬 수 있다’ 생각한 흥선대원군은 쇄국정책을 내세워 외세의 바람을 차단했다.
프랑스 선교사 9명을 처형하고 카톨릭신도들을 학살한 사건으로 병인양요(1866)가 일어났고, 그들은 돌아가면서 강화도 외규장각에 소장한 문화재와 보물, 의궤를 비롯한 서적을 약탈하고 전각에 불을 질렀다. 5년 뒤 미국이 강제 개항을 목적으로 들어온 신미양요(1871)는 처참했다.
서양의 최신 무기를 대항해 맨몸으로 싸우던 조선 수군은 전원 떼죽음을 당했다. 조선은 뒤늦게 선진 문명을 받아들이고자 1886(고종23)년 최초로 근대식 국립학교 육영공원育英公院을 설립했다. 이때 서양의 문명을 보고 들은 개화된 정객들의 노력으로 마침내 육영공원이 세워졌다. 학교의 설립 목적은 총명한 인재를 길러 외국어를 익히게 하는 것이 가장 긴급한 일이었다.
근대식 공립학교에서 영어 교사를 모집한다는 소식에 미국인 선교사 호머 헐버트(Homer Bezaleel Hulbert)는 1886년 7월, 조선 땅을 밟았다. 신학문을 받을 학생들은 당상관이나 벼슬아치들의 자제들로 편성되었다.
인원은 모두 35명이었고, 두 반으로 나뉘어 헐버트 외 두 명의 선교사가 교육을 담당했다. 과목은 주로 영어에 치중했으며 각국의 언어와 역사, 지리, 수학 등을 가르쳤다. 그 당시 상황을 보고 낙담했으나 조선의 역사와 문화에 매료되었고, 한민족의 우수성을 확인한 헐버트는 조선의 근대화를 위하여 젊은이들의 꿈을 키우는 데에 앞장섰다.
같은 물을 마시고도 소가 마시면 우유가 되고 뱀이 마시면 독이 된다던가. 그 당시 함께 공부한 학생 중에 훗날, 이한응 열사는 나라를 위하여 목숨을 바쳤고, 이완용은 민족과 나라를 팔아먹은 매국노가 되었다.
한글의 우수성을 발견한 언어 학자
헐버트는 단 4일 만에 한글을 배우고, 조선은 모든 소리를 글자로 표기할 수 있는 완벽한 문자를 가진 위대한 나라라고 다시 평가했다.
어느 날, 고종이 영어 문제를 직접 읽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영어를 몰라도 한글로 표기된 것을 보고 문장을 읽을 수 있는 한글의 우수성을 깨달은 헐버트는 ‘한글과 견줄 문자는 세상 어디에도 없다’고 생각했다. 이렇듯 과학적이고 배우기 쉬운 한글을 외면하고, 한자 학습에만 매달리는 조선의 상류층을 질타했다.
한민족에 대한 희망의 끈을 놓지 않은 헐버트는 한글 전용 교과서 사민필지士民必知』를 교재로 만들었다. 사민필지는 근대 최초 한글 전용 교과서로 근대 교육의 새 장을 열었을 뿐 아니라, 한글 사용을 주창하고 반상의 차별과 남녀의 평등 교육을 주장하였다는 역사적인 의미를 지닌다. 그러나 일제는 국민 사상 교육에 너무 자극적이라는 이유로 출판과 판매를 금지하였다.
호머 헐버트(1863.1.26.~1949.8.5)는 당대 최고의 언어학자였다. 『조선의 혼을 깨우다』를 읽어 보면 세계 여러 나라 토착어와 어휘를 비교하였으며, 한자와 이두, 한글의 맞춤법 개정 필요성을 제시하고 문법과 구조를 분석하였다.
외국인이 조선에 대하여 200여 편의 논문과 신문 기고문, 7권의 단행권을 남겼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한민족의 말글의 우수성을 과학적으로 연구하여 국내외 언론에 꾸준히 발표했는데, 4권의 소설과 4편의 희곡, 3권의 자서전에는 구한말 시대상과 일본의 횡포를 고발한 글이 주를 이룬다. 호머 헐버트는 선교사이자 교사였고, 고종의 외교 자문, 독립 운동가, 언어학자, 아리랑 채집가였다.
슬프고도 아름다운 한민족의 노래 아리랑, 헐버트는 입으로만 전해오던 아리랑을 직접 듣고 오선지에 채보하여 처음으로 미국에 알려졌다.
문경새재 들머리에는 서양 악보로 처음 채록한 헐버트 사진과 화강암에 새긴 아리랑비를 만날 수 있다. 조선인의 쌀밥과 같은 노래, ’아라릉 아라릉 아라리오 아라릉 얼싸 배 띄어라 문경새재 박달나무 홍두깨 방망이 다 나간다‘ 영어식으로 표기된 아리랑 원형 가사와 악보가 우리 문화를 사랑한 헐버트가 아니면 어찌 남아 있겠는가.
아리랑은 유네스코 인류 무명문화유산(인류 구전 및 무형유산 걸작)목록에 <아리랑, (한국서정민요)>과 조선인민공화국의 <아리랑 민요>가 함께 등재되었다.
일제 침략에 맞선 고종의 밀사
헐버트는 일제의 침략을 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고종의 밀사로, 민권 운동가로 일본과 맞서 싸우며 정의와 평화, 올바른 인간애가 무엇인가를 온몸으로 보여주었다.
한국에 대한 깊은 관심과 애정으로 일제의 만행을 세계에 알리는 헐버트는 일본의 눈엣가시였다. 러일전쟁 직후인 1905년 일제의 국권의 위협이 극에 달하자 고종은 1882년 미국과 조선이 맺은 ‘조미수호통상조약’의 이행 촉구를 위해 헐버트를 특사로 밀파한다.
조약 제1조에는 ‘조선이 제3국으로부터 부당한 침략을 받을 경우, 조약국인 미국은 즉각 이에 개입하여 조정을 행사함으로써 조선의 안보를 보장한다’ 하였는데, 미국은 헐버트와의 만남을 계속 거절하고 1905년 7월, 일본과 손을 잡고 미국은 필리핀을, 일본은 대한제국 지배권을 인정하는 <테프트 가쓰라 밀약>을 체결했다.
고종의 밀서는 제때 전달되지 못한 채, 1905년 11월 을사늑약이 강제 체결되고 만다. 헐버트는 정식으로 맺은 조약을 파기한 루스벨트 대통령과 대한제국 상황을 보고 침묵하는 세계 열강들을 향해 통렬하게 비판했다.
헐버트에게 전해진 고종의 마지막 밀명은 “상해 덕화, 독일 은행에 예치한 내 비자금을 대신 찾아달라”는 것이었다. 고종의 개인 명의로 예치한 현금 242,500엔 비자금은 당시 나라 전체 세입 1.5%에 달하는 고액으로 후일을 대비한 독립운동 자금이었다.
하지만 상해를 찾은 헐버트는 한 푼도 찾을 수 없었다. 헤이그 밀사 사건 후 조선의 자금줄 차단을 위해 고종의 비자금을 조사하던 일제에게 발각되어 예치금 관련 서류 날조 등 일제의 계략으로 이미 전액이 인출된 뒤였다.
1949년 40년 만에 한국을 찾은 헐버트는 당시의 예치금 증서와 모든 서류를 건네며 “일본 정부와 담판을 지어 그 돈을 이자와 함께 꼭 받아내라” 부탁했다. 조선을 사랑하는 헐버트가 계시지 않은 지금, 누가 나서서 그 일을 하겠는가.
한국에 대한 헐버트의 사랑과 유산
헐버트는 광복 이후, 국빈 초청으로 한국에 돌아왔으나, 광복절 행사에 참석하지도 못한 채 1949년 8월 5일 숨을 거두었다. 그는 세상을 떠나기 전 “나는 웨스트민스터 사원보다 한국 땅에 묻히고 싶다” 유언해 양화진 선교사 묘지에 안장되었다.
대한민국은 1950년 3월 1일 외국인 최초로 ‘건국공로훈장 태극장’에 이어, 2014년에는‘ 금관문화훈장’을 추서했다. 헐버트의 저서 『대한제국의 멸망사』에서 “나는 1800만 한국인들의 권리와 자유를 위해 싸웠으며, 한국인들에 대한 사랑은 내 인생의 가장 소중한 가치”라 기록했다.
올해가 3.1절 106주년이다. 삼일절이 되면 일제의 무자비한 총칼 앞에 목숨을 잃고, 전 재산을 바쳐 독립운동을 한 순국선열을 떠올린다. 한국인도 친일하고 제나라를 팔아먹는 시국에, 헐버트 박사는 그 누구보다 한국을 사랑하고 헌신한 독립 운동가였다.
일제강점기 35년이란 암흑의 시대를 겪으며 광복이 되었으나, 동족상잔으로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가 되었다. 헐버트는 “조선은 반드시 피어날 것이다” 예언했다. 말씀대로 어려움을 이겨낸 한민족은 세계 10위권 경제 대국, 문화 대국의 길로 들어섰고, 세계 문자 올림픽에서 한글이 1위에 올랐다.
더욱이 한국어를 세계 공통어로 쓰면 좋겠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라니, 한글의 우수성을 미리 알고 극찬한 그분은 언어학자가 분명하다.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안중근 의사는 감옥에서 “한국인이라면 단 하루도 잊어선 안 될 이름이 호머 헐버트”라 하였다. 23살에 조선을 만나 86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평생을 함께한 한민족의 스승 헐버트 박사께, 대한 사람은 큰절을 올려야 마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