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여정에서-강근숙
평범한 일상 속에서 발견하는 의미와 가치를 탐색하는 글입니다.
벼농사는 언제부터 지었을까

벼농사는 언제부터 지었을까. 실낱같은 모를 심은 논바닥을 보면서 저게 언제 자라 알곡을 매달까 했는데, 어느새 들판이 누렇게 물들어간다. 벼 이삭이 올라오면 또 한 해가 간거라는 어른들 말씀을 떠올리며 세월의 빠름을 실감한다. 도시와 농촌 복합도시인 파주는 어디를 가더라도 계절이 바뀌는 것을 쉽게 느낄 수 있다. 인조 장릉으로 해설가는 길은 버스에서 내려 20여 분 걸어야 하는데, 가을 햇살 아래 알곡이 익어가는 들판을 가로질러 걷노라면 추수를 앞둔 농부의 마음처럼 넉넉해진다.
탄현면 갈현리 들판에는 벼 수확이 한창이다. 콤바인의 기능은 익히 알고 있으나, 가까이 가서 한참을 바라보았다. 예전에는 낫으로 베고 햇볕에 말려 탈곡을 하느라 몇 날 며칠 걸렸는데, 콤바인이 논바닥을 이동하는 대로 알곡을 거두고 볏짚은 논바닥에 가지런히 누인다. 비바람에 쓰러진 것은 잘게 부수어 거름으로 뿌려지고, 수확한 벼는 트럭 위 큰 자루로 옮겨지는 것을 보면서, 벼를 베는 일과 터는 일을 한꺼번에 하는 종합 수확기는 이삼십 명 일꾼 역할을 능히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름내 땀 흘린 농부들은 수확하는 것도 큰일이다. 동네 남정네들이 동원되어 지게로 볏단을 져 날라 날가리를 쌓는다. 타작하는 날은 등잔불을 켜놓고 새벽밥을 먹었다. 페달을 밟는 탈곡기 소리와 일꾼들이 시끌벅적한 마당에는 알곡이 수북하게 쌓여간다. 갈퀴로 검불을 걷어내고 풍구를 불려가며 가마니에 담던 정겨운 모습은 아련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농부들의 손길이 88번 닿아야 쌀 한 톨이 나온다 해서 쌀 미(米)자를 (八十八) 이렇게 썼다는데, 지금은 농촌도 기계화되어 모를 내고 수확하는 고된 일을 단 하루에 끝내는 편한 세상이 되었다.
우리 민족은 벼농사를 언제부터 지었을까. 가장 오래된 볍씨가 있다는 '고양 가와지박물관'을 찾아갔다. 박물관 마당에는 측우기, 혼천의 등 선조들의 과학기술을 엿볼 수 있는 천문관측기구 모형이 세워졌고, 화분마다 심어놓은 가외지 벼가 익어가고 있었다. 고양시 해설사는 가와지 벼 이삭과 테블릿피시를 이용해 자세하게 설명을 한다. 1991년 일산 신도시를 개발하는 과정에서 5천년 전, 볍씨와 구석기부터 철기시대까지 광범위한 시대의 유물들이 출토되었다.
나무와 꽃가루, 개 이빨도 나왔으며, 격지, 톱니날, 덧띠토기, 가락바퀴, 주먹도끼, 찍개, 밀개, 몸돌, 빗살무늬 석기 등은 신석기 이전의 농경문화의 중요한 자료가 되었다. 가와지란 이름은, 발굴 장소에 자리한 김수원 선생 댁 당호가 가와지(家瓦地)였기에 '가와지 볍씨'라 명명했다. 당시 대화동 일대에서 1차 발굴 때 가장 먼저 토탄층에서 찾아낸 나무 기둥은 가래나무였고, 2.3일째 되는 날 볍씨 한 톨을 찾아냈다. 얼마나 기뻤을까. 발굴 조사단과 지질조사연구원팀은 힘든 작업 끝에 11톨의 볍씨를 더 발견하여 미국 베타연구소로 보내 성분을 분석한 결과 5,020년 전의 것으로 연대가 확인되었다.
관심을 끈 것은 야생 벼가 아니고 '재배 벼'라는 사실이다. 2001년 11월, 박물관 개관에 맞추어 한, 중, 일 동아시아 삼국의 벼 전공 학자들이 모여 가와지 볍씨 위상을 인정하는 국제회의를 가졌다. 전시실에는 실제 5천 년 전 볍씨 5톨이 전시되어 있었다. 토탄층에 묻힌 볍씨가 오랜 세월이 지나도 썩지 않는 것은 산소 없는 서늘한 진흙 속에서 미생물의 활동을 억제되기 때문이다.
1차 발굴 때 토탄층에서 찾아낸 벼 낟알을 증유수에 담가서 부드러운 붓으로 씻어 실온에서 건조한 뒤, 낟알 모양의 특성을 살피고자 길이와 폭을 확대 투영기를 이용하여 측정하고 사진 촬영을 했다. 가와지 볍씨가 발굴되기 전에 일본은 한민족으로부터 벼농사가 전해졌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는데, 마이니치 신문 문화면에 '한반도에서 벼농사가 약 5천 년 전까지 거슬러 올라갔다'고 크게 보도하여, 쌀농사의 기원을 밝히는 한편, 한민족이 일본에 벼농사를 전수했다는 것을 인정했다.
1997년 11월, 가와지 볍씨보다 더 오래된 '소로리 볍씨'가 충북 청원군 옥산면 오창 과학산업단지 발굴현장에서 발견되었다. 미국의 권위 있는 방사성 탄소연대 측정기관인 지오크론 연구실에서 측정한 결과, 소로리 볍씨의 연대는 1만 5천 년 이전으로 확인되었다. 가와리 볍씨는 소로리 볍씨로부터 전해져 재배된 것으로, 유전학적으로 가와리 볍씨의 조상이 아닐까 추정한다.
소로리 볍씨가 발견되기 전까지 중국 후난성에서 출토된 1만 1천 년 전 볍씨가 가장 오래된 것으로 인정받았으나, 소로리 볍씨는 그보다 수천 년이나 앞서 중국이 한반도에 벼농사를 전수했다는 기존 학설이 뒤집혔다. 소로리 유적지에서는 볍씨와 함께 석기와 석기 제작터도 발견되었다. 주먹대패, 긁개, 밀개, 홈날, 톱니날, 뚜르개, 격지, 망치돌 등 다양한 종류의 석기 출토는 한민족 농경문화 역사를 다시 쓰게 만든 계기가 되었다.

우리 선조들의 농경문화는 매우 발달했다. 『환단고기』에 등장하는 배달국 염제신농은 농업의 시조로 나무를 깎아 쟁기와 호미 등의 농기구를 만들고, 농경법을 개발하여 곡식을 심고 채소를 재배하는 법을 가르쳤다 전한다. 고조선이 건국되기 이전, 환웅천왕이 배달국을 다스리던 때부터 농사를 짓고 살았음을 알려준다. 우리 민족은 오래전부터 동이족의 조상인 염제신농을 농업의 신으로 모시고 선농단(先農壇)에 제향을 올렸으며, 지금도 매년 경칩 지난 길일에 선농대제를 봉행한다. 동대문구 '선농단 역사문화관'은 옛 선농단이 있던 자리에 세워졌다. 전시실에는 조선의 왕이 행차하여 천제를 올리고 친히 논을 가는 모습을 한눈에 볼 수 있게 하였고, 쟁기, 괭이, 가래, 써래, 갈퀴, 호미, 도리깨, 삼태기 등 전통 농기구를 전시해 놓았다.
파주의 쌀 '한수위와 참드림'은 탄현 쌀과 장단 쌀을 포함한다. 파주는 임진강 유역의 비옥한 토양과 기후 조건을 갖춘 청정 환경에서 재배하여 품질 뛰어나고 맛이 좋아 임금님께 진상하던 쌀이다. 지금도 파주 쌀은 귀한 대접을 받으며, 학생들 급식과 군부대로 공급된다. 가와지 쌀은 단순 고양시 브랜드가 아니라, 한국을 대표하는 쌀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가와지 쌀은 농업기술원에서 가와지 1호 볍씨의 DNA를 분석하고 현대 벼와 교배하여 개발한 품종이다. 가와지 쌀은 일반미보다 알이 잘았고, 찹쌀에 가까울 정도로 흰빛이 돌았다. 5천 년 전, 농부의 숨결을 느끼며 생쌀을 꼭꼭 깨물어본다. 단맛이 나면서도 고소했다. 여린 모가 논에 뿌리를 내려, 농부의 땀방울이 여물어 추수할 때는 '벼'라 하고, 탈곡해서 찧으면 '쌀', 아낙이 불을 지펴 익히면 '밥'이라 하는 그 밥에는 민족의 생활과 철학이 담겨있다. 우리는 날마다 밥을 먹으며 살아간다. 어른들은 '밥이 보약이다' '밥심으로 산다'며 끼니를 거르지 말 것을 당부했고, '밥은 먹고 사냐' '밥값을 해야지' 하며 자손들 안부를 물었다. 지금은 쌀이 남아돌아 귀한 줄을 모르지만, 쌀 한 톨을 금싸라기처럼 여기던 시절에는 만나면 '밥 먹었니' 묻는 것이 인사였다.
가와지 쌀로 이밥을 한 솥 지었다. 5천 년 전 볍씨가 쌀이 되고 밥이 되었다. 이름 있는 쌀밥을 혼자 먹을 수 없어. 이웃을 불러 밥상에 둘러앉았다. 부드럽고 찰진 밥이 입안에 착착 감긴다. 나는 '맛있지 맛있지'하며 한 그릇을 비웠고, 앞에 앉은 여인도 '정말 맛있다'며 고개를 끄덕인다. 서먹하던 사이도 밥을 같이 먹다 보면 정이 들고 가까워진다. 한 직장을 다니는 사람들이 '한솥밥 먹는 사이'라고 하는 것은, 같은 길을 가는 피붙이 같은 존재라는 뜻이다. 그래서 지혜로운 사람들은 아이들과 밥을 먹으며 자연스럽게 사랑과 인성을 키우는 밥상머리 교육을 선호한다. 세상에 먹을거리가 넘쳐나도 정이 담긴 따뜻한 밥 한 그릇만 하겠는가. 농부의 땀과 자연의 순환이 들어있는 밥 한 그릇은, 단순히 배를 채우기 위한 음식이 아니라, 마음을 나누고 힘을 얻는 생명의 원천이다. 가와지 볍씨는 한반도 인류 진화를 알려주는 삶의 기록이며, 진흙 속에 묻혀 5천 년을 꺼지지 않은 맥박이요 숨결이었다.
인류의 귀한 식량, 콩
우리 민족은 예로부터 장 담그는 일을 중요한 연례행사로 여겼다. 장은 일 년 양식으로 없어서는 안 되는 기본 반찬이다. 김장을 끝내고 동짓달이면 시골에는 집집마다 햇콩으로 메주를 쑨다. 콩을 씻어 불린 후 가마솥에 넣고 장작을 지피면, 점점 불어나 한 가마솥이 된다. 콩이 뭉그러질 때까지 삶아 절구질을 해서 벽돌 모양으로 메주를 만든다. 어른들은 못생긴 아이를 장난삼아 '메주댕이 같다'며 놀리기도 하는데, 시골 아낙들이 아무렇게나 치대서 뭉친 메주가 틀에 찍어낸 듯 모양이 똑 고르고 이뻤다.
볏짚 위에서 말려 꾸덕해지면 짚으로 하나씩 엮어서 아랫목에 기둥을 세우고 매달았다. 날이 갈수록 쿰쿰한 냄새가 방안에 가득하고 메주에는 하얀 곰팡이가 피기 시작한다. 메주에 작용하는 대표적인 박테리아는 주로 푸른곰팡이, 황누룩곰팡이(아스퍼질러스 오리재), 검은곰팡이(아스퍼질러스 나이거) 등이 있다. 메주를 볏짚 위에 보관하거나 새끼줄을 꼬아 매달아 놓는 것은 장을 만드는 미생물 발효를 촉진하고 된장의 맛을 내는 균이 볏짚에서 배양되기 때문이다.
여인네들은 음력 정월, 자연의 운행에 맞춰 길일을 택해 장을 담았다. 사계절이 뚜렷한 자연과 질 좋은 소금, 숨 쉬는 옹기그릇이 만나 이뤄 낸 발효 과학의 결정체가 된장과 간장이다. 농경문화가 정착하면서 발효와 숙성을 거치면 콩에 없던 영양소가 생긴다는 것을 터득한 조상들은 자연스럽게 짚의 미생물을 이용했다.
콩은 거친 땅에서도 잘 자라 열매를 맺는다. 종가인 우리 집은 큰일이 많아 콩을 많이 심었다. 해마다 두세 가마니씩은 수확했고, 장독대에는 기본으로 묵은 간장 독과 고추장, 된장 항아리가 즐비했다. 장맛이 변하면 집안에 액운이 낀다는 말이 있듯이 장독대를 신성하게 여겼고, 흰 수건을 쓰고 앞치마를 두른 엄마는 장독을 윤이 나게 닦고 뚜껑을 열어 햇볕을 쬐었다. 밥상에는 된장국, 청국장, 비지찌개, 콩자반이 번갈아 올라왔고, 특별한 날에는 콩을 한 말씩 불려 맷돌에 갈아 두부를 만들었다. 집에서 만든 두부를 먹고 자란 사람은 가마솥에 간수를 넣어 금방 엉긴 뜨끈뜨끈한 순두부와 두툼하게 썰어서 김치를 걸쳐 먹는 두부 맛을 잊지 못한다.
파주에는 45년간 콩 농사를 지으며 콩 연구에 몸 바친 이혁근 명인이 계시다. 농촌진흥청에서 현장 명예연구원으로 위촉받은 그는 경기도 전역을 돌아다니며 콩 재배 농가에 기술 지도를 담당했고, 일반화되지 않은 신품종 종자의 특성을 찾아내어 실험 끝에 최적의 조건을 만들어 내는 재배기술에 도달했다. 수확량도 많고 병충해에도 강한 신품종 재배로 높은 수익을 올리는 콩은 친환경적이라 안전하고 단백질도 수입 콩과 비교할 수 없다. 아직은 자급률이 37%밖에 되지 않아 수입 콩에 의지하지만, 콩을 더 많이 심어야 한다며 이혁근 콩박사는 우리 콩의 월등한 품질을 강조한다.
장단콩 고장답게 파주에는 손수 장은 담그고, 두부를 만들어 판매하는 곳이 여러 군데다. 통일촌에는 오랫동안 옛날 방식 그대로 장을 만드는 안만례 장인이 있다. 장단콩을 가마솥에 삶아서 메주를 만들고, 방에 볏짚을 깔아 하얀 곰팡이가 피도록 띄운다. 장을 담글 때는 십수 년 묵은 소금으로 간을 맞추고, 부정한 것을 몰아내는 숯과 붉은 고추를 넣는다. 노련한 솜씨에 정성을 더하면 장맛이 다르다. 요즘은 시골에도 가족이 많지 않아 장을 담지 않고 사 먹는 집이 많아졌다. 그래선지 장단콩 축제나 재래식으로 담은 된장, 간장은 물론 고추장, 청국장이 가장 먼저 동이 난다.
파주시 <장단콩웰빙마루>에서는 봄이면 장독 분양을 한다. 2천여 개의 장독은 메주 한 말씩 장을 담그고 각자 이름표를 달았다. 막내 올케가 재래식 된장이 먹고 싶다고 메주 한 말을 장독 분양했다. 오늘은 햇살과 바람 속에서 익힌 장을 가져가는 날이다. 따로 담아 놓은 간장을 찍어 먹어보니 감칠맛이 났다. 곰삭은 된장도 입맛이 당긴다. 전화로 신청하고 열 달 만에 와서 장을 가져가려니 깊은 맛을 거저 얻은 듯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장독 분양을 한 사람들은 양평, 용인 등 먼데서 온 이들이 많은데, 이는 공장에서 현대인의 입맛에 맞춰 장을 만든다 해도, 장독대에서 사계절을 보내며 미생물과 자연이 빚어낸 장맛은 따라갈 수 없기 때문이다.
한국인은 긴 세월 콩과 함께 살아왔다. 한시도 우리 곁을 떠난 적이 없는 콩에는 한민족의 혼과 역사가 담겨 있다. 두만강이란 글자를 풀어 보면 콩두, 가득할 만으로 콩을 실은 배가 강에 가득하다는 뜻이다. 옛날에는 만주에 거대한 콩밭이 있었고, 이 콩 가마니를 나르는 배들이 두만강에 가득하였다는 것이다. 실제로 두만강 인근 지역인 북한의 회령 오동 고조선 유적지에서는 기원전 1,300년경의 청동기 유물과 함께 콩, 팥, 기장이 나왔다. 동북아시아에서 동이족은 콩을 처음 식용으로 사용했고, 충분한 단백질 공급을 받았기 때문에 다른 동양인에 비해 기골이 장대하고 지능적으로 우수했다.
쌀에 단백질이 8%가 들어있다면 콩에는 단백질이 40%, 지방이 20%, 탄수화물이 30%가 함유되어 있다. 쌀의 아미노산과 콩의 아미노산이 만나면 고기에 버금가는 단백질을 만든다니 완전식품 아닌가. 그 옛날 고기를 적게 먹어도 콩으로 충분히 단백질을 보충할 수 있었기에 노동력이 많았던 일꾼들도 끄떡없이 견딜 수 있었다. 콩은 곡식이라기보다 영양 성분으로는 밭에서 나는 고기라 할 수 있다.
세계적인 콩 수출국인 미국은 일찌감치 콩의 중요성을 깨닫고 70년에 걸쳐 한반도에서 수천 종 이상의 재래종 콩과 야생 콩을 수집해 연구했다. 미국 농무성이 보관하고 있는 콩, 콩과 작물, 야생 콩 종자 대부분은 1970년에 한국 정부의 콩 종자 유출이 관대할 때 가져온 것으로 '한국산 품종은 미국의 대두 산업에 엄청난 기여를 했다'고 밝혔다. 콩 원정대가 약 9,000여 점의 자원을 확보했고 그중 콩에 대한 것이 4,578점이었는데, 한국이 3,379점, 일본 577점, 만주 511점, 중국 111점이었다. 이들이 다른 곳에 체류한 기간은 약 2년, 한국에 머문 것은 고작 5주였는데 수집한 콩이 가장 많은 것은, 마을마다 열리는 장터에서 다양한 콩을 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 고장 임진각 마당에서는 11월 하순이면 3일간 <파주 장단콩 축제>가 열린다. 문산으로 향하는 전철은 장단콩 축제에 가는 사람들로 인해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전철에 이렇게 많은 사람이 탄 것은 처음 본다. 두세 시간씩 차를 타고 왔다는 이들은 "안전하고 믿을 수 있으며, 장단콩은 맛이 다르다" 하였다. 장단콩 축제 마당에는 칸막이마다 노란콩, 검은콩, 파란콩, 밤콩, 쥐눈이콩 등 종류도 다양했다.
청정지역 파주에서 나는 장단콩은 알이 굵고 단백질, 칼슘, 지방, 철분 등이 월등하게 많이 들어있으며, 쌀과 인삼과 함께 장단삼백이라 불리며 수라상에 올랐다. 장마당에는 콩과 장류 말고도 시골에서 나온 갖가지 농작물이 많았고, 꼬마 메주 만들기, 콩 털기 체험과 볼거리, 먹거리가 어우러진 마당은 활기가 넘쳤다. 콩으로 만든 초콜릿, 콩고기, 콩 막걸리, 화장품, 샴푸 등을 선보여 콩의 활용 가치가 어마어마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한류 열풍을 타고 한국의 장 수출이 날개를 달았다. 2002년 한식 세계화 사업 이후 장류 수출량은 폭발적으로 늘었다. 한국무역통계진흥원에 따르면 간장, 된장, 고추장 수출은 두 배 커졌고, 이 중 고추장은 네 배 가까이 늘었다. 미국, 일본, 중국 등 교민 위주 시장에서 매운맛 열풍이 불면서 현지인 시장으로도 수요가 확대됐다. 고기에 쌈을 싸 먹을 때만 먹는 우리와는 달리, 외국에서는 햄버거나 핫도그에도 쌈장을 발라먹는다. 세계인이 드디어 깊은 맛과 건강을 동시에 챙기는 발효 식품을 찾는 시대가 되었다.
장이 없는 우리의 밥상은 상상할 수 없다. 콩은 고단백질, 높은 식이섬유를 가진 저속노화의 핵심 식재료 중 하나다. 콩의 종주국답게 오래전부터 콩을 이용한 음식을 먹어온 우리 민족은 뼈대 있고 강단지다. 콩을 띄워 장을 담가놓고, 수개월을 인내하며 맛이 깊어지기를 기다리는 장독문화, 장이 살아 숨 쉬는 발효 과정에서 생겨나는 유산균과 강력한 항산화 항암 성분은 우리의 건강을 지탱하는 힘이 되었다. 된장, 간장, 고추장은 단순한 밑반찬이 아니라, 한국인의 정체성과 기다림의 미학이 담겨 있다. 장담그기 문화는 그 독창성과 공동체적 가치를 인정받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2024년)되었다. 우리의 장은 한국을 넘어 인류가 보존해야 할 소중한 문화유산이 되었다.
죽 쑤는 여자
좋은 표현은 아니지만 일이 제대로 되지 않았거나 실패로 돌아갔을 경우 흔히들 죽 쒔다는 말을 한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내 별명이 ‘죽 쑨 여자’가 되어 버렸다. 실제로 나는 죽을 잘 쑤기도 하고 먹는 것도 좋아 한다. 요즈음은 시중에 일회용 포장으로 나오는 것이 많아 힘들이지 않고 죽을 먹을 수 있지만, 맛과 향은 직접 만드는 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곡식이 귀하던 시절 적은 양으로 배를 채우는 데는 죽만 한 것이 없었다. 쌀 한 양재기 불려서 된장 조금 풀고 야채죽을 끓이면 여덟 식구가 배를 채울 수 있었고, 모자라는 찬밥도 김치를 숭숭 썰어 넣고 김치죽을 끓이면 한 끼 때우기에 넉넉했다. 지금은 늘려 먹으려고 죽을 쑤는 게 아니라 맛과 영양으로 즐기는 시대가 되었다. 그래서인지 나는 뷔페에 가면 그 많은 음식 중에 죽 그릇에 먼저 손이 간다.
오늘은 입맛이 없어 아욱죽을 끓였다. 부드럽고 구수한 죽 한 그릇을 먹고 나니 보약이라도 먹은 듯 속이 뜨뜻하고 편안하다. 나는 이렇듯 죽을 좋아한다. 이가 튼튼치 못해 무른 것을 좋아하는지 몰라도 죽이라면 어떤 것이든 즐겨 먹는다. 그중에 호박죽을 제일 즐기는 편이라 가을이면 늙은 호박을 여러 개 얻어다 놓는다. 생각날 때마다 죽을 쑤려고 통풍이 잘되는 곳에 두었는데도 군데군데 상하고 말았다. 버리기가 아까워 성한 데를 발라서 죽을 쒔는데 제철이 아니라 그런지 맛이 덜했다.
가을이면 호박죽 쑤는 일을 연례행사처럼 하던 때가 있었다. 두꺼운 껍데기를 벗기고 팥과 함께 삶다가 나중에 찹쌀가루를 버무려 넣고 한소끔 더 끓여낸다. 그것이 별식이나 되는 것처럼 언제나 이웃과 나누어 먹었다. 뜨거우면 뜨거운 대로 차가우면 찬대로 호박죽은 참으로 맛이 각별하다. 어디 호박죽뿐인가. 계절마다 제철 곡식이나 채소를 넣고 묽게 끓인 죽은 맛도 있고 영양가도 많아 밥을 먹을 수 없는 노약자나 입맛이 떨어진 사람에게는 최고의 음식이다.
어찌하여 내게 ‘죽 쑨 여자’라는 별명이 붙었는지 내 귓가에서 죽 쑨 여자라는 말이 떠나지 않는다. 죽을 좋아하고 죽을 잘 쑤는 여자라고 붙인 변명일 수도 있겠지만, 삶을 죽 쑤듯이 살아왔다고 하는 말같이 들리기도 한다. 그러고 보니 나는 정말 죽 쑤는 여자인지 모른다. 지난 세월 무던히도 애쓰며 살았는데 어느 날 문득 돌아보니 허물투성이 죽 쑨 인생이었다. 어느 누가 세상을 죽 쑤듯이 살고 싶으랴마는 사는 일이 생각대로 되지 않으니 어찌 하겠는가.
이웃에 사는 이가 농사지은 거라며 늙은 호박 하나를 가져왔다. 호박답지 않게 모양이 괜찮아 잘 보이는 곳에 올려놓았다. 지금은 그럴 생각이 없지만, 어느 바람 부는 날 그것을 내려 죽을 쑬 것이다. 인생의 죽을 쑤는 여자가 아니라 이웃과 따뜻함을 나눌 죽을 쑤는 ‘죽 쑨 여자’가 되고 싶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