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소를 찾아-강근숙

세상 어디든 볼 것이 있다. 그러나 보고, 느끼는 것은 자유다. 나는 내 방식대로 본다.

천년의 물길을 연 임진강 황포돛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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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지나루의 황포돛배

두지나루에 매였던 황포돛배가 밧줄을 풀고 서서히 몸을 튼다. 햇살 좋은 날 나들이 나온 연인과 가족들은 해설을 들으며 강변을 바라보느라 호기심 가득하다. 분단 이후 반세기 동안 민간인 출입이 통제됐던 임진강에 원형 그대로 황포돛배를 복원하여 2004년 봄, 두지나루에서 고랑포 여울목까지 뱃길을 열었다.

조선 시대의 주요 운송 수단이었던 황포黃布돛배는 광목에 물을 들인 돛에 바람을 받아 동력으로 운행하던 우리나라 전통적인 평저선平底船이다. 지금은 엔진을 달아 선착장에서 자장리까지 6.5킬로 구간을 돌아오는 50여 분 동안 ‘임진팔경’의 하나인 적벽의 뱃놀이를 즐길 수 있다.

임진강은 한반도의 허리인 중부 내륙과 북부지방의 남단에 걸쳐있다. 함경도 마식령산맥의 두륜산에서 발원하여 강원도 북부를 흐르면서 연천에서 철원, 평강을 거쳐 흘러온 물은 한탄강과 합쳐진다. 파주의 동·서로 흘러가는 임진강은 오두산 부근에서 한강과 만나 서해로 흘러간다.

연천에서 파주 사이를 흐르는 물살을 따라 황포돛배가 떠내려간다. 강물은 깨끗한 2급수지만 바닥에 현무암이나 검은 모래가 깔려 물속이 시커멓게 보인다. 강물 위에는 어구를 표시해 놓은 각양각색의 플라스틱 용기가 둥둥 떠 있다.

옛날에는 ‘물 반 고기 반’이라는 말이 임진강에서 나왔을 정도로 어종도 많고 수확량도 풍부했다. 지금도 피라미, 빠가, 누치가 많이 잡히고 황복과 장어, 참게는 귀한 대접을 받는다. 강가에는 어부가 있게 마련이고 매운탕도 일품이다. 두지리 어부들은 오늘도 강이 주는 풍요를 낚는다. 뱃전에 강에서 잡은 준치를 매달고 그물을 당기는 조각배가 한 폭의 그림이다.

 임진강변의 자연경관

0206-60만년-전에-형성된-임진강-적벽.jpg *60만년전에 형성된 임진강 적벽

임진강을 안고 줄줄이 이어지는 바위에는 이름도 사연도 많다. 절간바위, 자라바위, 빨래터 바위, 거북이가 서해를 향해 나오는 형상을 한 거북바위를 지나면 검붉은 적벽이 나타난다. 임진강의 생성은 약 2억 년 전 서로 떨어져 있던 두 개의 대륙이 충돌하여 만들어졌다는 설이 있다.

60만 년 전에 형성된 현무암 지대에 임진강이 흘러 침식 현상으로 만들어진 수직 절벽은 크고 작은 돌기들이 거 대한 책꽂이 형태로 펼쳐졌고, 아래쪽은 마치 시루떡을 잘라 놓은 듯 돌이 포개져 있다. 한반도의 자연사를 여실히 보여주는 적벽 사이로 희귀식물인 돌단풍이 하얗게 피어있다.

돌단풍은 적벽 돌 틈에 뿌리를 박고 산다. 이른 봄, 화사하게 꽃을 피우고 퇴색할 무렵 꽃보다 싱그러운 진초록 잎으로 적벽을 감싼다. 그리고 가을에는 잎사귀가 붉게 물들어 뱃놀이하는 사람들의 눈길을 끈다. 편한 자리 마다하고 굳이 깎아지른 절벽에 꽃을 피우는 돌단풍은 아무리 봐도 대쪽 같은 선비의 고고함을 닮았다. 엊그제 내린 비로 물이 불어 적벽 가까이서 적벽과 돌단풍을 자세히 볼 수가 있었다.

  선비의 풍류가 깃든 정자들

태평세월 선비들은 임진강가에 정자를 짓고 풍류를 즐겼다. 조선 시대 파주에는 20여 개가 넘는 정자가 있었다는데, 지금은 화석정과 반구정 두 정자만 남아있다. 율곡栗谷 이이李珥가 시와 학문을 논하던 화석정花石亭과 방촌庬村 황희黃喜가 갈매기를 벗 삼아 시를 짓고 정담을 나누던 반구정伴鷗亭에는 많은 역사가 담겨있다.

검붉은 ‘자장리 적벽’은 조선 후기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畵의 대가인 겸재謙齋 정선鄭敾의 ‘임진적벽도’의 배경이 되기도 했다. 260년 전에 나귀를 타고와 뱃놀이를 즐기며 적벽을 화폭에 담았을 선비의 모습을 상상해 본다. 조금 내려가면 화선지를 펼쳐놓은 듯 넓적한 절벽이 보인다. 절벽에는 조선 중기 문신이자 전서篆書의 대가인 미수眉叟 허목許穆이 쓴 괘암卦巖이라 글씨가 새겨져 있다는데 눈을 크게 뜨고 찾아봐도 육안으로는 보이질 않는다.

반구정 정자에는 미수 허목이 지은 반구정기가 걸려있다. ‘정자는 파주에서 서쪽으로 시오리 지점에 있는 임진강 하류에 위치하였다. 매일 조수가 나가고 뭍이 드러나면 하얀 갈매기떼가 날아드는데 주위가 너무 편편하여 광야도 백사장도 분간할 수 없다. 구월쯤이면 철새들이 첫선을 보이기 시작하고, 서쪽으로는 바다의 입구까지 이십 리가량 된다.’고 당시 정자 주변의 풍광을 묘사해 놓았다. 연천에서 태어난 허목선생은 황포돛배를 타고 임진강을 오르내리며 흥에 겨워 절벽에 글씨도 쓰고 반구정 정자에 앉아 글을 지었으리라.

번성했던 고랑포의 흔적

자장리 적벽과 맞은편 원당리 적벽이 대문을 활짝 열어 놓은 듯하다. 강폭이 좁아지면서 물줄기가 끊어진 것처럼 보이는 저곳에서 조금 더 내려가면 임진강 상류로는 마지막 포구였던 고랑포 지점이다. 뭍과 바다의 산물이 모이는 집산지였던 고랑포구는 6·25동란 전만 해도 인구도 문산, 파주보다 3배나 많았고, 화신백화점 분점이 있었을 정도로 번성했던 곳이다. 그때의 흑백사진을 보면 초가로 ㄴ,ㄷ자 형태의 집들이 촘촘하고 면사무소, 병원, 여관, 소시장, 곡물검사소와 우체국, 문방구 등이 있었다.

0206pj고랑포.jpeg  *고랑포 여울목

전쟁은 모든 것을 파괴하고 폐허로 만든다. 고랑포는 군사적 요충지였다. 적성積城이라는 지명에서도 알 수 있듯이 가까운 곳에는 적을 방어하기 위해 쌓은 성이 곳곳에 남아있다.

고구려 3대 성城 중의 하나인 호로고루는 고랑포 여울목 바로 위에 자리하고 있다. 삼국시대에도 임진강을 사이에 두고 고구려, 백제, 신라가 서로 땅을 차지하기 위해 각축전을 벌였고, 뺏고 뺏기면서 주인이 바뀌었다.

임진강 하류는 수심이 깊어 배를 이용하지 않고는 강을 건널 수 없으나 호로고루 부근은 무릎이 겨우 잠길 정도였다. 대규모 병력을 육로로 이용할 경우 개성에서 한성으로 가는 가장 짧은 거리상의 요충지여서 한국전쟁 당시 싸움이 가장 치열했던 곳으로 탱크를 밀고 내려오는 중공군과 맞서 싸우느라 2천여 명의 병사들이 전사했다.

젊은 목숨은 나라를 지키느라 꽃잎처럼 스러져 임진강을 피로 물들였다. 우리는 지금 그들이 흘린 피의 값으로 이렇게 자유를 누리는 것이다. 여기서 3킬로만 가면 북한이고 앞에 보이는 산은 비무장 지대이다. 1968년 세상을 놀라게 했던 1,21 사태 때에 서른한 명의 북한 특수부대원들은 청와대와 미대사관 폭파의 임무를 띠고 바로 저 산을 넘어와 이곳 고랑포 여울목을 건너 서울로 침투를 했다.

임진강에 새겨진 역사 

임진강 일대는 흐르는 물굽이마다 수많은 역사와 한이 서려 있다. 조선이 개국한지 200년 후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선조는 조정을 버리고 4월 그믐 칠흑 같은 밤 임진강을 건너 몽진을 갔고, 일 년 반 만에 다시 임진나루에 돌아와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순국한 병사들의 넋을 달래는 위령제를 지냈다. 의주로 피난 당시 비바람속에 나루를 건너게 된 쓰라린 아픔과 이 강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초개와 같이 버린 병사들의 명복을 기원하는 가운데 선조는 통곡하며 “하느님 도움을 받아 이 나루터를 다시 돌아오게 되었구나” 하여 고구려 때 지명인 신지강神智江이 임진강臨津江으로 개칭 되었다 한다.

정면에 가로막힌 산, 구불구불 보이는 길을 따라가면 신라 마지막 왕인 경순왕릉敬順王陵이 있다. 건국 992년간 이어온 신라를, 국가 기능이 마비되자 백성들이 괴롭힘을 당하는 것을 볼 수가 없어 경순왕은 서라벌에서 개성까지 찾아가 나라를 고려 태조에게 넘겨주었다.

임진강 변 남쪽 솟아오른 봉우리에 영수암永守庵이란 암자를 짓고 태조의 딸 낙랑공주와 결혼하여 아들·딸 낳고 살면서도 서라벌을 못 잊어 경주방면을 바라보며 눈물지었다 한다. 귀부한지 43년 만에 세상을 떠난 경순왕, 비보를 접한 신라 유민들이 장사진을 이루어 경주에 장례를 모시고자 하였다. 경순왕도 서라벌에 묻히고 싶었으리라. 그러나 고려 조정은 경주로 가는 도중 민란民亂이 일어날까 두려워 ‘왕의 구柩는 백리 밖을 나갈 수 없다.’ 하여 고랑포를 넘지 못하였다.

경순왕은 암자 이름을 왜 영수암永守庵이라 했을까. ‘이곳은 영원히 지켜야 한다.’ 신라를 지키지 못한 것이 한이 되어 이 나라의 허리인 이곳을 꼭 지키라는 간곡한 당부였는지 모른다.

분단의 상징에서 평화의 물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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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 년 전에는 경순왕이 남쪽을 바라보고 눈물을 흘렸고, 지금은 실향민이 북쪽을 바라보고 눈물을 흘린다. 총성은 멎었으나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저기 저렇게 아름다운 능선은 갈 수 없는 곳이다.

사람들이 갈라놓은 터에 나무와 꽃, 새와 곤충, 동물들은 먼저 통일을 이루어 자유를 만끽한다. 더 나아갈 수 없어 황포돛배는 떠나온 곳을 향해 뱃머리를 돌린다. 조금 전까지 흥에 겨웠던 승객들은 임진강의 슬픈 사연과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애절한 곡조에 숙연해진다.

자연은 한 번도 분단된 적이 없고, 임진강은 남과 북을 나눈 적이 없으나 인간들은 분열과 대립으로 담을 쌓는다. 그러나 사람들이 쌓은 벽은 사람들에 의해 헐리게 되어 있다. 동·서로 높이 쌓아 올린 베를린 장벽이 순식간에 무너졌듯이, 남과 북의 경계도 무너져 내리는 날이 있으리라. 상처 난 허리를 친친 감은 임진강은 오늘도 그날을 기다리며 황포돛배를 띄운다.

끝나지 않은 전쟁

캠프 그리브스는 DMZ 남방한계선에서 2킬로 떨어진 민간인 통제구역에 주둔한 미군 기지였다. 1953년 정전협정이 체결되면서 대한민국 정부는 주한 미군에게 토지를 제공하고 군영을 설치하도록 하였다주둔한 지 50여 년 만에 부대가 철수하면서 미군기지가 우리에게 반환되었다경기도는 문화 재생사업으로 미군들이 볼링장으로 사용했던 건축물을 원형 그대로 활용해전장에서 이슬처럼 사라진 이름 없는 영웅들을 기억하기 위해 젊은 날의 초상을 기획했다전쟁의 참혹함을 모르는 젊은이들도 갤러리 그리브스에 전시된 전쟁 역사 사진과 자료들을 대하면이 땅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친 영령들에게 저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0205dsci0020.jpg *캠프그리브스 안내판

사진으로 보여주는 현상은 말과 글보다 몇 배의 설득력을 지닌다. 우리가 지금 영화를 보듯 생생한 전쟁 기록을 볼 수 있는 것은, 전쟁의 목격자 종군기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마거릿 히긴스’은 대학생 통신원 신분으로 1950년 도쿄 특파원으로 발령받았다. 부임하자마자 한국전쟁이 일어나 그녀는 재빨리 서울의 미8군 군사고문단을 찾아갔고, 그다음 날 한강 다리가 폭파되는 것을 목격했다. 한강 다리 폭파 소식과 가장 치열했던 낙동강 전투를 취재했고, 전쟁의 참혹한 현실을 직접보고 듣고 느끼며 체험 리포트를 뉴욕의 편집실로 보내기 시작했다. 임무를 끝내고 미국으로 돌아간 다음 해, 경험을 바탕으로 『자유를 위한 희생: War in korea』을 집필하여 여성 최초로 퓰리쳐상을 수상했다. 그것을 계기로 ‘마거릿 히긴스’는 미국 각지를 돌아다니며 참상을 알렸고, 한국전쟁을 세계에 알리며 지원을 요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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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본 또 한 사람은 미국 NBC방송 기자 ‘존 리지’였다. 그는 한국인들이 얼마나 고통을 받고 있는지 증언하려 애썼고, 전시 상황 속에서도 끈질긴 생명력을 이어가는 우리네 모습을 사진으로 기록했다. 그러면서 “내 바람은 이 사진을 보는 독자들이 한국전쟁을 과거의 역사로만 생각지 않았으면 하는 것이다. 이 사진들을 통해 전쟁의 참혹함과 그들이 겪어야 했던 희생과 아픔, 그리고 강인한 소생의 의지를 떠올릴 수 있기를 바란다”고 하였다. 위험을 무릅쓰고 전쟁터를 누빈 이들 종군기자가 아니었다면, 우리는 민족이 겪은 고난의 역사를 이렇듯 생생하게 볼 수 없었을 것이다.

군사분계선 팻말.jpg다 아는 일이지만 동족상잔의 비극은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군의 기습 남침으로 시작되었다. 소련과 중공의 지원으로 전쟁을 준비한 북한군은 T-34 소련제 탱크를 242대나 가지고 있었고, 170여 대의 전투기, 200여 대의 비행기를 갖고 있었다. 반면 국군은 탱크와 전투기는 한 대도 없고, 훈련용 연습기 20여 대가 전부였다. 남한은 무방비 상태였다. 무기도 없고 전투경험도 없었다. 더군다나 국군은 6월 24 자정을 기해 비상경계령을 해제하면서, 사병들에게 농사일을 도우라고 2주간 특별 휴가를 주어 병력 절반이 외출한 상태였다.

북한군이 황해도 옹진에서 남침하여 국군 제17연대와 격전이 벌어졌다. 그러나 1950년 6월 25일 오후 1시 35분, 김일성은 평양방송에서 ‘남한이 모든 평화통일 제의를 거절하고 옹진반도에서 해주로 북한을 공격했다’고 반대로 방송했다. 그러면서 26일 새벽 2시, 부산을 역습하려고 해군 특공대 600명을 내려보냈는데, 울산 앞바다 백두산함 손원일 제독이 야포를 쏴서 격파시켰다. 특공대를 막지 못하고 울산이 뚫렸다면 대한민국 임시수도 부산은 없었을 것이다. 사태가 위급해지자 유엔안전보장이사회가 소집되어 맥아더 연합군사령관에게 지상군 투입과 38선 이북의 군사목표 폭격 권한이 주어졌다. 27일 정부는 대전으로 수도를 이전하였고, 28일 새벽 한강 다리가 폭파되었다.

남침 3일 만에 서울은 점령당했다. 나라가 위태로운 지경에 이르자 일본에서 공부하던 유학생 642명이 바다를 건너와 총을 들었으며, 수원에서 500명의 학도대가 조직되었다. 침략당한 대한민국을 돕기 위하여 유엔 창립 후 최초로 유엔군이 한국전쟁에 참전했다. 유엔군의 일원으로 참가한 국가는 16개국, 의료지원 5개국, 물자와 재정지원국은 39개국이었다. 선발대로 부산에 첫 지상군이 투입되었다. 일본에 주둔하던 스미스 부대는 미 제24단의 21연대 1대대로 540명으로 구성된 특수임무 부대였다. 7월 5일 오산 죽미령에서 유엔군 지상 병력이 처음으로 치른 첫 교전에서 북한군 42명을 사살하고 T-34 전차 4대를 완파했으나, 스미스 부대는 540명 중 30%가 넘는 181명이 실종 포함 희생하면서 북한군이 만만치 않다는 것을 경험했다.

전쟁 발발 두 달 만에 대한민국은 10%밖에 남지 않았다. ‘이 나라를 지켜야 한다’ 학생들은 가방을 내던지고 전장으로 달려나갔다. 책 대신 소총과 수류탄 조작법만 겨우 익혔다. 자신보다 큰 M1소총을 들고 화개 전투에 참여한 학교는 매산고등학교를 비롯해 보성 광양고, 여수중앙고, 울산고, 순천제일고, 벌교상고, 여수직업고, 마산고, 등 벌교 강진지역 17개 학교였다. 겨우 183명은 북한군 정예부대 1,000여 명과 섬진강을 사이에 두고 전투를 벌였다. 하동과 마산이 뚫리면 부산이 위험해진다. 학도의용대 완장과 태극마크를 그린 띠를 달고 투입된 화개장터 전투는 학도병 최초의 전투였다. 절체절명의 순간 펜 대신 총을 들고 이 땅을 지킨 의로운 용기의 상징, 학도병은 화개장터 뒷산 전투 선봉에서 저지하여 3시간 30분을 버텼다. 바닥을 드러내는 탄약, 총알이 떨어지자 총 앞에 단검을 끼우고 적에게 미친 듯이 달려들었다. 그들이 가진 최고의 무기는 소총도 수류탄도 아닌 자신의 목숨으로 나라를 구하겠다는 ‘용기’였다. 군번도 계급장도 없이 직접 전투에 참여한 16세에서 18세에 불과한 꽃다운 학도병은 조국을 위해 피지도 못한 채 산화했다, 그들의 값진 목숨의 대가로 하동군민이 피난 갈 시간과 낙동강 방어선을 구축할 시간을 갖게 되었다.

7월 1일, 미국을 중심으로 16개국으로 구성된 유엔군이 속속 도착했다. 그러나 소련과 중공군의 지원을 받아 준비한 강력한 무기를 앞세운 채 대규모 병력으로 공격해오는 북한군을 막아내기엔 역부족이었다. 급기야 8월 하순에는 낙동강 전선까지 후퇴하게 되었다. 국토가 10% 남아있는 상태에서 낙동강 전선이 무너지는 것은 패배를 의미했다. 대한민국 최대의 위기였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낙동강 전선에 전쟁이 시작된 이후 국군과 유엔군은 철저한 대비를 한 방어선이었다. 북한군도 이 전선만 뚫으면 승리할 수 있음을 확신하고 전력을 쏟아부었다. 하지만 국군과 미군이 중심이 된 연합군은 낙동강을 방패 삼아 북한군을 45일 동안 맞서 버티며 방어선을 지켰다.

 1950년 8월 11일, 포항여자중학교 앞 벌판에서도 전투가 벌어졌다. 전투복 대신 교복을 입고 겨우 총 쏘는 법만 익힌 학도병 71명은 북한군 766 유격대 수백 명과 11시간 동안 격전을 벌였다. 이날 전투로 47명이 전사하고 실종 4명, 부상 6명 등 거의 전멸한 셈이다. 불과 2소대의 학도병들이 장갑차와 기관포, 자동소총으로 무장한 대대급 정예 유격대와 맞서 한 걸음 후퇴도 거부한 채 끝까지 싸운 처절한 전투는, 지역 주민과 주요기관이 안전하게 피신할 시간을 주었고, 3사단과 미군이 반격할 시간을 마련했다. 전사한 학도병 품에서 부치지 못한 편지가 발견되었다. 동성중학교 3학년 이우근 학도병은 겨우 15살, 포탄이 날아드는 전쟁터가 두려워 엄마한테 편지를 쓰며 위안을 얻었다. 

1950810, 어머니께 보내는 편지

평화가 꽃피기를기다리는 병사.jpg어머니! 나는 사람을 죽였습니다. 그것도 돌담 하나를 사이에 두고 열 명은 될 것입니다. 저는 2명의 특공대원과 함께 수류탄이라는 무서운 폭발 무기를 던져 일순간에 죽이고 말았습니다. 수류탄의 폭음은 저의 고막을 찢어놓고 말았습니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순간에도 제 귓속은 무서운 굉음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적의 다리가 떨어져 나가고, 팔이 떨어져 나갔습니다. 너무나 가혹한 죽음이었습니다. 아무리 적이지만 그들도 사람이고 더욱이 같은 언어와 같은 피를 나눈 동족이라고 생각하니 가슴이 답답하고 무거웠습니다. 어머니, 전쟁은 왜 해야 하나요. 이 복잡하고 괴로운 심정을 알려드려야 내 마음이 가라앉을 것 같습니다.

중략

이우근 학도병의 절절한 편지는 전쟁의 참혹함을 그대로 느껴져 가슴이 먹먹했다. 어린 나이에 바로 앞에 총탄이 빗발치는 전쟁터가 얼마나 무서웠을까. 한시바삐 달려가 엄마 품에 안기고 싶었을 것이다. 관람객들도 눈물을 찍어내며 그 앞을 떠나지 못한다. 피에 얼룩진 학도병의 편지는 영화 포화속으로의 모티브가 되었다.

 915, 인천상륙작전을 계기로 서울을 되찾은 아군은 평양 탈환과 함께 압록강까지 진격한다. 전쟁이 끝나고 통일이 눈앞에 다가온 듯하였다. 전세가 기울자 김일성은 모택동에게 파병을 요청했다. 1025, 30만의 대규모 중공군은 압록강을 건너 기습적인 공세로 밀고 내려왔다. 장진호에서 중공군과 미 해병대가 치열한 전투를 벌였고, 동부전선에서 중공군 6개 사단이 미 해병대와 보병부대를 포위하면서 유엔군 대부분은 무너지거나 고립되었다. 중공군 참전으로 흥남부두 대탈출이 시작되었다. 1224, 10만이 넘는 병력과 피난민 10여만 명, 17500대의 각종 차량과 35만 톤의 물자를 수송한 철수 작전이었다. 마지막 출항선에는 무기와 물자를 버리고 정원의 230배를 초과한 14000여 명의 피난민을 태웠으며, 선 채로 3일간 겨울 바다를 건너 거제도에 도착했다.

 19511, 중공군은 38선을 넘어 총공격을 개시했고, 10만 병력이 서부전선을 밀고 내려왔다. 서울을 진입했으나 유엔군의 진격으로 중공군은 완승이 힘들다고 판단했는지, 얼마 안 가서 청평 근방의 교두보를 포기하고 북방으로 총퇴각했다. 1년간 격전 끝에 38도선 부근에서 머물자 휴전회담에 대한 논의가 제기되었다. 유엔 주재 소련대사 말리크는 휴전으로 평화를 회복하자는 의견으로 기울었고, 1953727일 정전협정이 조인될 때까지 2년간 협상이 이어졌다. 비무장지대 설치를 위한 군사분계선을 설정을 놓고 본격적으로 협상이 시작되었다.

 0206휴전협정서yY70205.jpg *휴전협정서

포로교환 문제가 교착 상태에 빠진 무렵, 195335일 스탈린이 뇌출혈로 쓰러지자 전쟁은 휴전협상으로 치닫게 되었다. 한국정부와 14차례 걸친 협상 끝에 공동성명에서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 합의에 동의했고, 1953727, 판문점에서 정전협정이 체결되었다. 역사상 가장 긴 협상, 217일의 기간 동안 158번의 협상 끝에 국제연합군 총사령관 마크 클라크와 북한군 최고사령관 김일성, 중공군 인민지원군 팽덕회가 최종적으로 서명함으로써 전쟁은 일시적으로 정지되었다. 한국전쟁 31개월 3일째 되는 날, 유엔군 캠프에 한국군 대표로 최덕신 장군이 참석했지만, 판문점 정전협정에 한국 측 서명은 없다. 대한민국의 운명은 내 나라 사람이 아닌 다른 나라 사람들에 의해 결정되었고, 남과 북을 가르는 군사분계선 248킬로에는 서에서 동으로 1,292개의 나무 팻말이 세워졌다.

 전선의 포화는 멎었지만, 전쟁이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니다. 그러나 대한민국은 평화롭다. 초록으로 물든 산과 들, 자유로운 도시는 나날이 발전하여 전쟁의 상처는 보이지 않는다. 세계의 원조를 받는 나라에서, 도움을 주는 나라로 바뀌었다. 정전 이후 대한민국은 강한 의지로 위기를 극복하고 세계 10위권 경제대국을 이룩했지만,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라는 오명은 벗지 못했다. 갤러리 그리브스에는 날마다 내·외국인 관람객이 붐빈다. 가끔 유엔군 참전용사 후손들도 만난다. 6·25전쟁을 겪은 할아버지 체험담을 직간접으로 들었을 후손들은 사진을 통해 전쟁의 참혹함을 확인하며, 불과 70여 년 만에 몰라보게 발전한 대한민국에 박수를 보낸다. 이 땅을 지키기 위해 얼마나 많은 젊음이 목숨을 잃고 피를 흘렸던가, 나라가 위기에 처하자 가방을 내 던지고 자진해서 전선에 뛰어든 5만여 학도의용군 중 7,000명이 전사했다. ‘오로지 조국을 지키겠다는 일념으로 장렬히 싸우다 산화한 이름 없는 영웅들의 젊은 날을 대한민국은 영원히 기억해야 한다.

0206AuM0205.jpg *한국전쟁때 임진강변에 멈춘 탱크

0206kir0205.jpg *한국전쟁때 고아

0206jlL0205.jpg *임진강을 건너는 곤돌라

조선의 진종과 효순왕후의 마지막 안식처 -영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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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살에 세자로 책봉되고 10살에 요절한 추존왕

조선 왕릉 42기 중 영릉은 3기가 된다. 여주 능서면 왕대리에 세종과 소헌왕후 합장릉인 영릉英陵이 있고, 바로 옆 700m 떨어진 곳에 효종과 인선왕후 영릉寧陵이 자리한다. 파주 조리읍 봉일천에 영릉永陵은 조선 제21대 왕인 영조의 맏아들 진종과 효순왕후 능이다. 진종 10살에 세상을 떠나 효장孝章이라 시호를 받았으며, 훗날 양자인 정조가 왕이 되어 진종으로 추존하고 무덤 이름도 영릉永陵으로 높여 부르게 되었다.

파주삼릉 매표소로 들어오면 바로 역사문화관이다. ‘파주삼릉역사문화관이라 쓴 현판 글씨가 아무리 봐도 낯설어 직원에게 물어보니, 성종 글씨체라 하였다. 조선 왕릉 공간구성과 왕계도가 걸린 역사관에는 의궤에 기록된 영릉永陵 부장품 사진을 구경할 수 있다.

현궁에 관을 넣고 봉하는 왕릉 조성 절차와 효순왕후{발인반차도發靷班次圖} 영상은 관람객의 눈길을 끈다. 1752(영조 28) 정월 스무하루 축시, 창경궁에서 현빈을 모시고 장지인 파주로 향하는 행렬을 영상으로 자세히 볼 수가 있다. 경기감사를 선두로 교명죽책요여, 책빈옥인현빈옥채여, 혼백영, 방상시, 소궤채여, 죽산마· 죽안마, 견여, 명정, 대여, 곡궁인 등 긴 장례행렬이 뒤를 따른다.

효순왕후 발인반차도를 영상을 보면서 왕가의 한 여인의 삶을 그려본다. 좌의정 조문명의 딸은 13세에 세자빈이 되었다. 윗전을 받들며 궁중의 예절과 법도를 배우느라 세자의 얼굴 익힐 사이도 없이 이듬해 청상이 되었다. 혼례를 올렸으나 첫날밤도 치르지 못한 세자빈은 모든 것이 자신의 박복한 탓이라 여기며 시아버지인 영조에게 공경을 다 하였다. 세자가 죽은 7년 후 현빈賢嬪으로 책봉되었고, 빈궁에서 홀로 지내다 37세에 세상을 떠났다. 현빈이 죽고 며칠 후, 영조는 효부 현빈에게 효순孝純이란 시호諡號를 내렸다. 시호뿐만 아니라 묘지墓誌를 지을 만큼 며느리 사랑이 각별했다.

영조는 정비 정성貞聖왕후와 계비 정순貞純왕후에게서 자식을 얻지 못하고, 정빈靖嬪이씨에게서 효장세자가 태어난다. 영조의 즉위하자 경의군으로 봉해지고 다음 해 봄 왕세자로 책봉되었다. 글을 배우기 시작한 세자는 9살에 풍양조씨 조문명 딸과 혼례를 올렸다.

 세자는 나이답지 않게 언행이 젊잖고 기백이 있었다. 입학할 때나, 책봉할 때나, 관례를 치를 때나, 기운차고 명랑했는데, 이듬해 갑자기 병이 나서 세상을 떠났다. 정빈이씨는 세자를 낳고 3년도 되기 전에 명을 다하여, 어미 없이 자란 자식이라 아픔은 더했다. 자식 잃은 슬픔을 단장지애斷腸之哀라 했던가. 금지옥엽 귀한 자식, 왕통을 이을 세자가 세상을 떠났을 때, 영조의 가슴이 찢어지고 소리 없는 통곡은 그칠 줄 몰랐다.

 효장세자(1719~1728)가 요절하자 영조는 장릉長陵 천장을 단행한다. 조선조 제16대 인조 장릉은 임진각 가는 길목 운천리 대덕골이 있었는데, 영조 7(1731)년 파주시 탄현면 갈현리로 옮겼다. 석물 틈에 뱀과 전갈이 있으면 자손이 요절한다는 말이 있어 오랜 논란 끝에 능을 옮기고 4년 후, 영빈暎嬪이씨에게서 사도세자(1735~1762)가 태어나 조상의 음덕이라 믿었다.

효장세자에 이어 책봉된 사도세자는 자라면서 영특하여 훌륭한 군주가 되리라 믿었는데, 당쟁의 희생자가 되어 불운한 삶을 마감한다. 훗날 왕통을 이을 사도세자의 아들(이산:李祘정조)은 적대 세력으로부터 죄인의 아들은 왕이 될 수 없다는 극렬한 반대에 부딪힌다. 영조는 이산을 효장세자 양자로 삼아 세손으로 책봉한다.

 영릉은 다른 능과 달리 비각이 둘, 비석이 셋이나 된다. 세자비世子碑는 朝鮮國 孝章世子墓 孝純賢嬪祔左-조선국 효장세자묘 효순현빈부좌라 썼고, 17763, 정조正祖가 즉위함에 따라 양아버지인 효장세자는 진종眞宗으로 추존하고, 무덤의 이름도 영릉陵으로 높여 부르게 되었다. 진종으로 추존하여 정조가 친히 짓고 쓴, 영릉 비석은 朝鮮國 眞宗大王永陵 孝純王后祔左-조선국 진종대왕영릉 효순왕후부좌라 쓴 전서篆書가 예술이다.

비석 뒷면에 무덤 주인의 일대기를 적은 해서楷書는 또 얼마나 정교하고 이름다운지, 발걸음을 뗄 수가 없다. 음기 8행 끝부분에 小子卽祚之九年乙巳월 일 謹書并篆-소자즉조지9년을사(1785) 〇월 〇일 근서병전이라 적혔듯이, 이 글씨는 문예 군주 정조의 어필로 우리 고장 또 하나의 보물이다.

혹한 속 효장세자 영릉 묘역공사의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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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72월 경운궁으로 환궁한 고종高宗은 연호를 광무光武로 개정하고 국호를 대한大韓으로 제정한다. 이성계가 조선 창업 후 4대조를 추존하였듯이, 황제국이 된 대한제국에서도 창업자(태조)와 고종황제의 4대조(장조, 정조, 순조, 문조)에 대한 추존 작업이 이루어졌다. 19087월 대한제국 순종 때, 정조의 법적 아버지 진종은 진종소황제眞宗昭皇帝, 효순왕후는 효순소황후孝純昭皇后로 다시 한번 추존되었다.

내게는 능참봉이 기록한 능지陵誌 복사본이 한 상자 있다. 2006년 서예가 동생은 파주삼릉과 소령원 수길원의 비문을 해석하고, 능참봉이 기록한 능지를 해석했다. 제각기 다른 능참봉의 글씨를 알아볼 수 없어 당시는 관심에서 멀어졌는데, 십수 년이 흐른 뒤 신기하게도 캄캄하던 원문이 눈에 들어왔다.

왕릉관리 전문가 조선의 능참봉들은 능의 모든 업무를 관리 감독하며 그 과정을 세세히 기록한 능지는 역사 글을 쓰는 내게 귀한 자료가 된다. 긴 세월 공‧순‧영릉 역사를 빠짐없이 기록한 능지 묘소도감의궤에는 효장세자가 운명한 날로부터 예장이 끝나는 날까지의 기록이 낱낱이 적혀있었다. 역사책에 나오지 않는 귀한 자료가 워낙 많지만, 여기에 다 적을 수는 없고 간략하게 인용하려 한다.

효장세자가 운명한 날, 이조吏曹에서는 인명부를 작성하고 임금의 재가를 받았다. 장례의 총 책임자 도제조는 영의정 이광좌이고, 그 외에 고위관료들이 50여 명에 이른다. 묏자리를 보는 관리, 장례절차를 보는 관리, 지리학 겸 교수, 사옹원, 사복시 등 각자 맡은 책임을 분담하여 왕의 재가를 받은 날까지 소상하게 기록하였다.

영릉의 묘소도감의궤를 보면 효장세자 묘역공사에 얼마나 심혈을 기울였는지 알 수가 있다. 글 머리에는 세자의 사망일시를 기재한 후, 장지를 마련하고 시신을 매장하는 절차와 의례, 소모 물품 등을 적었고, 장례에 대한 목차 아래 담당자 직위와 이름, 일시를 밝히고 도감 업무를 빠짐없이 기재했다. 또한 석물과 정자각 설치에 필요한 재료와 동원된 일꾼의 품삯을 일일이 수록하였으며, 도감이 진행되는 절차를 날마다 보고하고 왕의 윤허를 받았다.

효장세자가 운명하자 각 도에서 장정과 승군을 징발하였고, 묘역공사에 필요한 재목과 양식을 수송해왔다. 가장 추운 시기에 땅이 얼어 사초에 쓸 잔디를 떠서 싣고 오는 일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1차 부역군은 경기도 120, 강원도 210, 충청도 260, 황해도 160, 전라도 380, 경상도 370명이 파주 능역으로 모였다. 한겨울 추위에 제대로 입지도 못한 묘소 역군과 승군들은 동상자가 잇달았다.

춥고 힘들 때는 정당한 술기운이 약이 된다. 힘든 일과 추위는 술이 있어야 수월하다는 것을 아는, 영의정 이광좌와 좌의정 홍치중은 탑전에서 공사 중에 술이 극히 필요할 때는 마음대로 할 수 있게 해달라고 아뢰었다. 그러나 영조는 곡식을 축내는 주범 술은 불가하다하였다. 먼 거리에서 자재를 운송하고, 무거운 돌을 올 메어 끌어올리는 능군들은 혹한에 움막에서 떨면서 지냈고, 변변히 입지도, 먹지도 못한 채 묘역공사에 정성을 쏟았다.

고생한 일꾼들에게 술이라도 먹이고 싶었으나 왕의 허락을 받지 못했다. 그러나 40여 일 지난 기유년 정월 17, 금주령을 엄격하게 국법으로 정했던 영조도 결국은 세자묘역공사에 소임을 다하고 돌아가는 일꾼에게 술과 고기를 먹이도록 허락했다.

효장세자가 운명한 무신년(1728) 1116일부터 기유년 정월 그믐, 묘역 공사가 마무리되었다. 본 도감에서 재가를 받아 쓰고 남은 돈을 대충 확인했다. 무연탄값이 2466전이고, 갈탄값 85, 담배값은 1335푼이다. 말값馬稅은 쌀 7214, 수레값 11636, 나무 47필과 개인이 갖고 있던 목물木物값 7253, 나무 6171575푼으로 합한 값 1,07025, 나무 102475, 18926승 등은 도감으로부터 가져다 썼다.

상의원 누주樓柱 36, 수어청 재목 98조 중 서까래 19, 500, 나무 2, 6, 2, 200석은 왕세자 발인에 사용하였음을 호조에서 확인하였다. 하교한 대로 각 읍 군병과 세도감 역원과 군장 등이 추위를 막는데 사용한 것이 쌀 3871, 16179승을 봉납하였다.

능지陵誌 하청기명기下廳器皿記 원문을 보다가 평민이 쓰는 농기구나 살림살이 이름까지 모두 한자라는 것이 놀라웠다. 밥솥은 식정食鼎, 국솥은 각쇠脚釗, 궹이는 광이光耳, 낫은 겸자鎌子, 가위는 전자剪子, 빗자루는 추일箒一, 요강은 익항溺缸 등등 수없이 많았다. 조선의 양반 관료들은 우리 글을 언문이라 업신여기고 한자만을 사용했다.

세종께서는 어려운 한자를 백성들이 읽고 쓸 수 없음을 가엾게 여겨, 배우기 쉽고 쓰기 편한 한글을 온 나라에 반포했다. 한글 창제 370년이 지난 조선 후기에도 관가에서는 아녀자가 쓰는 그릇조차 우리 이름으로 부르지 못하고 어려운 한자만을 고집하고 있었다. 다소 지루한 감이 있어도 이런저런 얘기를 길게 나열한 것은, 내 고장에서 국장을 치른 생생한 실록이며, 문화유산을 바르게 이해하고 보존하는데 귀한 자료가 되기 때문이다.

pk영릉비문.JPG * 효장세자,효순비 표석 / 진종과 효순황후 표석 / 진종소황제, 효순소왕후 표석

영조의 발자국이 수없이 찍혔을 능상을 올려다본다. 피기도 전에 떨어진 꽃봉오리, 어린 나이에 가례를 올리고 세자는 다음 해에 세상을 떠났다. 부부간의 애틋한 정도 모르는 채 외로운 섬처럼 궁궐에 남겨진 세자빈은 차라리 요절한 남편을 따라가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권력가의 딸이 아니었다면 왕가로 시집갈 리 만무하고, 평생 외롭지도 않았으리라. 왕가의 여인은 고독하다. 혼례를 올리고 합방도 하지 못한 효순왕후는 죽어서야 진종 옆에 나란히 누웠다.

파주삼릉 주인들은 단명해서 애달프다. 공릉의 장순왕후는 인성대군을 낳고 산후증으로 17세에 죽었고, 순릉 공혜왕후는 후사 없이 19세에 세상을 떠났다. 부러울 것 없는 왕실 가족이 되어 왜 그리 일찍 세상을 떠났을까. 살고 죽는 일은 하늘의 뜻이라 해도 너무나 안타까운 삶이다. 꽃다운 나이에 세상을 떠난 파주삼릉의 왕과 왕비는 몇백 년 세월이 흐른 뒤, 아름다운 세계문화유산으로 다시 태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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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릉 비각 / 망료위

인조와 소현세자의 비극을 만나는 장릉과 경안군 묘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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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릉 전경

제1편, 인조 장릉의 역사와 의미

장릉의 입지와 역사적 배경

 금천교를 건너 홍살문 앞에 서면 쭉 뻗은 향어로 박석이 보인다. 여기서부터는 신성한 공간이다. 왼쪽 약간 높은 길은 신에게 올릴 향과 축을 모시고 가는 향로香路 또는 신로神路라 하고, 오른쪽 약간 낮은 길은 임금이 다니는 길이라 하여 어로御路라 한다. 향어로 좌우에 자리한 수라간과 수복방을 지나 정자각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 4백 년 전, 참혹한 난리를 겪어야 했던 백성들의 고충을 그려본다.

인조(1595~1649)는 선조의 손자이며 광해군에게는 조카이면서, 광해군을 폐위시키고 왕위에 올랐다. 즉위 초에는 반정공신 책록에 불만을 품은 이괄이 난을 일으켰고, 명나라가 기울고 청나라가 일어나는 시기를 인식하지 못해 척화파와 주화파가 대립하는 가운데 정묘호란이 일어났다. 다시 9년 뒤 병자호란을 겪으며 삼전도에서 수모를 당한 비운의 왕이다.

장릉은 원래 임진각 가는 길목, 운천리 대덕골에 있었다. 인열왕후가 승하하자 지관들은 파주 지방의 산을 능소로 추천했다. 그 주변에는 무려 756기의 고총이 있었는데 89기는 이장하고 주인 없는 무덤 667기 뼈를 거두어 따로 묻었다. 인렬왕후 발인 날 청룡기, 백호기, 현무기, 기마병과 군사 6770명의 장례행렬에 백성들은 출정군으로 오해하고 불안해하였다. 수천 명의 장례행렬이 출정군과 흡사해 첩보를 받은 청나라도 심기가 편치 않았으리라.

장례를 치른 다음 해, 163612, 국호를 청이라 고친 홍타아지는 12만 대군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 파죽지세로 밀고 내려왔다. 인조는 비빈 종실들을 강화도에 피신시키고, 세자 백관과 남한산성으로 물러가 항거하였으나 45일이 지나자 양식이 떨어지고 혹한에 군사들은 전의를 잃었다. 결국은 항복하여 인조는 신하임을 나타내는 쪽빛 군복을 입고, 수항단에 앉은 청태종에게 삼배구고두례三拜九叩頭禮를 올리는 치욕을 당했다.

 파란만장한 삶을 살다 재위 27년 만에 인조가 승하했다. 왕의 수릉지에 쌍릉으로 조영되었으나 풍수의 흠을 들어 길한 자리로 능을 옮겨야 한다는 상소가 이어졌다. 영조는 3월 중순 우의정 조문명을 장릉으로 보냈다. 능을 살피고 돌아온 조문명은 뱀 아홉 마리가 엉켜 있었는데 큰 것은 서까래만 하고 작은 것은 낫자루만 했다고 탑전에서 아뢰었다. 춘삼월에 뱀이 또아리를 틀었단 말인가. 석물에 뱀이나 전갈이 집을 지으면 자손이 요절하거나 장애자가 나온다는 말에, 열 살 효장세자를 잃은 영조는 1731년 파주 탄현면 갈현리로 천장을 단행한다. 인조 승하 82년 만이고, 인렬왕후는 96년 만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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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지 복사본 장릉長陵『천장등록遷葬謄錄』에는 능을 옮긴 날짜와 시간이 자세히 적혀 있다. 원문 해석이 쉽지 않기에 혹여 오류가 있을지 몰라 사진을 첨부한다.

신릉新陵 공사 시작 718일 묘시卯時, 풀을 베고 땅을 파는 일은 729일 미시未時, 상여를 운반하는 도중 머물러 쉬려고 상여를 풀어놓은 곳, 수도각隧道閣 조성은 817일 사시巳時, 개금정開金井 827일 신시辛時, 825일 관을 모시고 나감,

10월 초7일 묘시卯時에 산릉 출발, 하현궁 10월 초7일 사시巳時, 천릉 택일, 910일 먼동 틀 무렵 토지신께 제사, 10월 초7일 새벽 고유제, 수도각 조성 910일 묘시卯時, 파구릉破舊陵 929일 묘시卯時, 928일 제궁 안 관을 모시고 나감, 장사지내기 전 빈소 차림은 때에 따라서 한다. 능으로 발인은 때에 따라서 한다

 다른 자료와 발인 절차가 다소 차이가 있으나, 원문으로 남아있는 천장등록이 가장 정확하리라 믿는다.

장릉의 석물과 예술적 가치

장릉에 대한 글을 쓰면서 석물을 자세히 살펴보고 싶었다. 예전에는 관람객이 원하면 자유롭게 능에 올라 석물을 보며 해설을 했는데, 조선 왕릉이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이후 능침에 오르는 일이 쉽지가 않다.

절차에 따라 관리소에서 내준 조끼를 입고, 그날 근무인 이대연 해설사와 동행을 하였다. 장릉 잉孕에 오르면 파주지역은 물론 일산 신시가지까지 훤히 내다보인다. 여기가 명당인가. 풍수에 문외한이지만 이렇게 가슴이 탁 트이는 살아있는 사람도 편한 자리가 명당 아니겠는가.

 장릉은 천장 하면서 조선 왕릉의 격식을 모두 갖추었다. 새 능을 전체적으로 설계한 사람은 유명한 서예가 윤순尹淳이고, 총호사로 홍치중이 임명되었다. 새로 만든 석물 제작은 칼을 잡으면 무엇이든 새긴다는 최천약이 총 책임을 맡았으며, 변이진, 손수담이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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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과 왕후의 합장 능 앞에는 상석 2위가 놓였고, 중앙에는 장명등長明燈, 양쪽으로 망주석과 문‧무인석, 석마 2쌍씩을 배치했다. 봉분에는 병풍석, 난간석을 두르고 연결 공간은 와첨상석으로 치장을 했다. 치마 주름처럼 드리워진 와첨상석은 보기만 좋은 것이 아니라, 봉분 구조물을 견고하게 잡아주는 기능이 있으며 빗물을 빠른 속도로 흘려보내는 처마 역할을 한다.

영조 대에 절대적 신임을 받은 조각가 최천약崔天若(1684~1775)은 각종 실록이나 의궤에 자주 등장한다. 자명종을 만들고, 다양한 옥보玉寶, 옥인玉印, 석물石物 제작을 주관했다. 사도세자의 맏아들 묘 의령원懿寧園과 단경왕후 온릉溫陵을 새로 조성하는데 석물 조성을 담당했고, 영조의 생모 숙빈 최씨의 묘소 소령원昭寧園 석물 제작도 최천약이 책임을 맡았다.

그는 어느 한 가지 기술만 능통한 것이 아니라 쇠붙이와 돌 나무 등 소재를 막론 조각을 잘하는 만능 기술자로 명성이 높았다. 2008년 개성을 방문했을 때 숭양서원崇陽書院 옆에 남아있는 표충비表忠碑에서 최천약이 새긴 글씨를 보았다. 영조가 선죽교에 들러 포은의 절개를 기리고 쓴 어제 어필, (道德精忠亘萬古, 泰山高節圃隱公-도덕과 충성은 만고의 역사에 이어지니, 태산 같은 높은 절개 포은 공이로다) 열네 글자를 새긴 각수가 바로 최천약이었다.

장릉은 옛 능의 석물과 척수가 맞지 않은 것은 새로 만들어, 17세기와 18세기의 석물을 동시에 볼 수가 있다. 최천약이 새로 조성한 12면 병풍석의 모란은 잎사귀까지 입체감을 살렸다. 뭐 그리 잘한 일이 있다고 능침을 이리 잘 꾸며 놓았을까 생각하며, 동자석주, 난간석주의 섬세하고 아름다운 조각과 문양을 감상했다.

인조는 집권당인 서인들과 지나친 대명 사대주의에 빠져 국제정세를 제대로 읽지 못하고 부끄러운 역사를 남겼다. ‘다시는 치욕의 역사를 되풀이하지 말자는 교훈이 새겨진 인조 장릉長陵, 그 시대 위대한 조각가 최천약이 있었기에 장릉은 훌륭한 예술품으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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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살문과 향어로 / 장명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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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와 소현세자의 비극을 만나는 장릉과 경안군 묘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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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안군 묘

제2편, 소현세자와 경안군의 슬픈 역사

 조선조 제16대 임금 인조仁祖를 떠올리면, 삼전도 굴욕과 자기 자식과 며느리를 죽이고 손자들까지 죽게 한 비정한 왕이라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다. 청나라에 볼모로 끌려갔던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은 8년 뒤인 1645년에 돌아왔다.

소현세자는 당시 청나라에 수입된 서양 문물을 대하면서 서양인들과의 접촉을 통해 새로운 문물과 사상을 받아들였고, 봉림대군은 철저한 반청주의자가 되어버렸다. 인조는 고국으로 돌아온 소현세자와 강빈, 손자들을 전혀 반기지 않았다. 소현세자가 청나라의 내부사정과 서양 문물 이야기를 하며 책과 기계를 보여주자 분개하여 벼루를 들어 얼굴에 내리치기까지 하였다.

가슴앓이하던 소현세자는 병석에 누운 지 2달 만에 의문의 죽음을 맞는다. 시체에서는 새카만 피가 쏟아졌고, 낯빛은 중독된 사람처럼 알아볼 수가 없었다 한다. 이후 소현세자 주변 세력과 강빈의 친정어머니와 남자 형제들을 귀양보냈고, 세자빈 강씨에게 사약을 내려 죽게 한 뒤 그들 모두를 사사했다.

그것도 모자라 소현세자의 세 아들 석철, 석린, 석견을 제주도로 보냈다. 열 살도 안 된 인조의 손자들은 어머니 죄로 유배를 가서 석철, 석린은 다음 해에 죽었고, 셋째 경안군 석견은 겨우 젖 떨어진 나이에 제주도와 함양현을 거쳐 강화 교동도까지 9년 귀양살이를 견디며 간신히 목숨을 부지했다. 그때 경안군 나이 겨우 열세 살이었다.

낙엽 흩날리는 늦가을이면 경안군 이회慶安君 李檜1644,10,5~1665,9,22 묘역에 가고 싶다. 11월 초, 왜곡된 역사를 바로 세우자는 단체, 대한사랑大韓史郞 회원들과 고양시 덕양구 대자리로 향했다. 경안군은 소현세자 셋째아들로 김해허씨와 혼인하여 임창군, 임성군 두 아들을 두었다.

허씨 부인과 합장묘 뒤편에는 빨간 벽돌로 곡장을 둘렀다. 빨간벽돌 곡장은 본 적이 없기에 무슨 연유인지 궁금증이 인다. 봉분 앞에는 상석과 향로석, 좌우에는 망주석과 문석인, 동자석을 배치했다. 숙종 30(1704), 아들 임창군이 세운 묘비는 용의 형상을 새긴 머릿돌인 이수와 사각 모양의 비좌를 갖추고 있다. 오석烏石으로 만든 비 앞면에는 朝鮮國 王孫 贈顯祿大夫 慶安君 兼 五衛都摠府 都摠營 行承憲大夫 慶安君 諱檜之墓 盆城郡夫人 許氏祔左-조선국 왕손 증현록대부 경안군 겸 오위도총부 도총영 행승헌대부 경안군 휘회지묘 분성군부인 허씨부좌 라 새겨져 있다.

경안군 묘역을 올 때마다 나는 제물을 준비한다. 상석을 깨끗이 닦고 어제 쑨 도토리묵과 과일 몇 가지, 덤으로 농익은 오가피 열매도 올렸다. 제주를 따르고 유세차, 단기 4355119일 대한사랑 회원들이 경안군께 인사드립니다. 차린 것은 보잘것없으나 소박한 정성이오니 지난 설움은 잊으시고 흠향하소서절을 올렸다. 묘역 양옆에 서 있는 문석인이 빙그레 웃는다. 왕손으로 태어나 아무 죄도 없이 모진 고난을 겪은 경안군도 저렇게 선한 모습이었겠지 싶어 마음이 아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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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안군 묘 앞쪽은 낭떠러지라 절을 하면서도 굴러떨어질까 봐 조마조마했다. 광해군 묫자리가 경사져 절자손切子孫 터라 했는데, 경안군 묘는 그보다 더한 급경사였다. 경안군은 22살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으나 다행히도 임창군과 임성군 두 아들을 두었다. 숙종 대에 임창군도 왕권을 넘본다는 역모에 휘말렸으나, 다행히 임창군을 사사하지 않고 군부인 허씨와 함께 아버지 경안군이 갔던 제주도와 교동도로 귀양 보냈다. 그때 숙종이 임창군을 살려두지 않았다면 소현세자 핏줄은 지금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임창군臨昌君은 밀풍군密豐君과 밀남군密南君 밀원, 밀천, 밀본, 밀운 65녀를 두었다. 소현세자 혈육들은 보위를 넘보기는커녕 살얼음판을 걷듯 조심스럽게 살았으나, 영조4(1728)년 또다시 밀풍군이 반역을 꽤했다는 소문이 나돌아, 영조의 명에 의해 결국 자결하게 된다.

같은 할아버지 자손이면서 소현세자 후손들에 대한 잔인한 숙청은 4대까지 이어졌다. 밀풍군 후손들은 선조의 억울한 삶을 알리고자 묘 앞에 비를 세웠다. 대체 왕권이 무엇이길래 한 핏줄을 타고난 혈육까지 무참히 죽여야만 했을까.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쓴 비문을 읽으며, 예나 지금이나 정적을 제거하려는 모함은 변함없다는 것이 마음 아팠다. 세상 어딘가 지금도 권력자들에 의해 억울하게 당하는 이들이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며, 명나라 마지막 궁녀 굴씨屈氏 묘역으로 내려왔다.

굴씨는 청나라로 끌려와 심관에서 소현세자를 모시던 시녀였다. 소현세자가 귀국할 때 따라와, 소현세자가 죽은 후에도 조선에 남아 명나라 예법을 전해주고 임창군을 기르면서 여생을 보냈다 한다. 고국을 멸망시킨 청나라에 분노하며 조선의 왕세자에게 의리를 지킨 굴씨에게 하늘은 포근하게 낙엽 이불을 덮어주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따뜻한 유택이 경안군 묘역 산자락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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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안군 묘 문석인 / 굴씨 묘

영조의 효심이 가득한 소령원 찾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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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의 어머니 숙빈최씨 묘 -소령원昭寧園

강근숙 파주작가

 숙빈최씨(1670~1718)는 숙종의 후궁으로 조선조 제21대 임금 영조의 어머니이다. 반상班常의 구별이 뚜렷한 조선 시대에 무수리 출신으로 숙종의 승은을 입어 후궁이 되었고, 내명부 최고 품계인 숙빈淑嬪에 올랐으니 하루아침에 신분 상승을 한 행운의 여인이다. 허드렛일을 하던 나인이 왕의 여자가 되었고, 왕의 어머니가 되었으니 하늘에서 별을 딴 여인 아닌가.

 숙빈최씨는 7세의 나이로 궁에 들어갔다. 전해오는 일화에는 인현왕후(1667~1701)의 아버지 민유중이 영광군수로 있을 때 관아 문 앞에서 놀고 있는 불쌍한 아이를 데려다 키웠는데, 민씨가 간택되어 궁으로 들어갈 때 몸종으로 딸려 보냈다 한다. 숙빈최씨는 어려서 입궁하여 24세에 숙종의 승은을 입어 후궁이 되기까지는 한낱 중궁전 무수리로 세상 사람 아무도 그를 알아주지 않았다.

 숙종 시대는 조선왕조를 통틀어 당파 간의 정쟁이 가장 심했던 기간이다. 숙종 155월에는 기사환국己巳換局과 더불어 인현왕후가 폐위를 당하고 희빈 장씨가 중전 자리에 앉게 된다. 폐위는 곧 서인으로 강등되는 것이기에 시중을 드는 나인도 데리고 나갈 수 없는 처지였다. 그 후 4년쯤 지난 어느 날, 남인이 정권을 독점하여 중전 장씨에 대한 감정이 악화되어 숙종은 잠을 못 이루고 궐내를 거닐다가 오직 한 방에 불빛이 빛나는 것을 보았다. 폐위된 중전의 생일날 음식을 차려놓고 복위를 비는 모습을 가상하게 여긴 숙종은 최씨에게 마음이 끌렸다. 나인이 후궁으로 신분이 바뀌는 극적인 순간이었다.

 숙빈최씨는 무수리 신분에서 6년 만에 내명부 최고 품계에 올랐고, 그동안 왕자 셋을 출산했다. 첫째와 셋째는 요절하였으며, 숙빈최씨보다 오래 살아 사후를 돌보아준 아들은 둘째인 금昑이 연잉군延礽君 이었다. 숙종은 인경왕후, 인현왕후, 인원왕후 세 명의 정비가 있었으나 자식을 얻지 못하고 장희빈과 숙빈최씨에게서 아들을 얻었다.

왕자를 낳은 공으로 최씨는 정1품 숙빈에 올랐다. 금昑이 태어났을 때 대신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환시宦侍와 의관醫官에게 내구마內廐馬를 상으로 내려준 것을 보면 아들을 얻은 숙종의 기쁨이 얼마나 컸는지 짐작이 간다. 숙빈최씨의 인품은 천부적인 바탕이 침착하고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한다. 연잉군과는 모자간이면서도 정을 나눌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연잉군은 후궁의 몸을 빌어 태어났을 뿐, 정식 어머니는 중궁전 왕비였고 왕비의 자녀라는 개념으로 자신의 소생에게 존댓말을 써야 했으며 어머니 칭호를 들을 수가 없었다.

 숙빈최씨가 갑작스레 병색이 짙어졌다. 숙종의 권유로 사제로 나가 요양을 하기도 했으나 끝내 차도를 얻지 못하고 171839, 49세로 생을 마감했다. 같은 해 512, 양주 고령동 옹장리 묘향卯向 언덕, 지금의 파주시 광탄면 영장리에 장사지냈다. 이때 연잉군은 25세로 왕세제에 오르기 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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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궁궐의 음지에서 살았던 후궁들의 상례는 일반인과 별반 다르지 않았으나, 숙빈최씨는 연잉군이라는 유력한 왕자가 있는 후궁이었기에 장례의 격은 왕족의 예장으로 연잉군 주관하에 치러졌다. 상례에 필요한 각종 물자와 비품은 최고로 궁중의 여러 부서에서 지원했으나, 정승과 판서를 비롯하여 조정의 백관들도 참여하지 않은 것은 물론 응당 있을 법한 조문이나 부의도 하지 않았다.

 무수리에서 후궁 반열에 오른 왕실 여성으로 축복받은 인생의 주인공인 숙빈최씨를 연잉군은 어떻게 바라보았을까. 자신의 어머니가 무수리였다는 것이 응어리로 남았고, 평생 측은하고 불행한 여인이라는 시선을 거두지 못했다. 연잉군이 어머니에게 지난 시절 제일 힘들었던 것이 무엇이었냐고 물었다.

숙빈최씨는 침선針線이라 대답했다. 그 말 한마디만으로도 왕실의 음지에서 나인들이 얼마나 힘겨운 세월을 살아야 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왕의 이부자리는 날마다 새것으로 바뀌는데, 영조는 왕이 되어서 이부자리를 매일 바꾸는 일을 하지 못하게 하였다.

 보위에 오른 이후 영조는 어머니를 생각하는 마음은 적극적인 형태로 나타났다. 즉위 다음 해에 무리를 감수하면서 숙빈최씨 묘 들머리에 거대한 크기의 신도비를 세우게 했다. 신도비는 정2품 이상의 벼슬아치의 무덤의 약 100m 지점에 세우며 인근을 지나는 사람들에게 묘의 위치를 알려주는 기능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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굳게 닫힌 비각을 열자 머리를 들어 올려 정면을 응시하는 거북이가 여의주를 물고 쳐다본다. 머리 위쪽에는 왕王자가 크게 새겨져 있고, 옥개석은 대궐의 지붕 모양에 용을 형상화하여 품계가 낮았던 어머니를 위로하는 영조의 효심을 엿볼 수 있다. 신도비의 귀대석龜臺石을 보면서 오직 사람의 힘으로만 가능했을 조선 시대에 이 방대한 돌을 어떻게 운반했을까 궁금해진다.

『淑嬪崔氏資料集-숙빈최씨자료집』을 보면 석재를 끌어다 운반하는데 1만여 명이 동원되었다 적혀있다. 운반과정에서 백성들의 농경지에 상당한 피해가 예상되고, 또 칙사의 행렬이 지나가면 이 지역 백성들의 고통과 원성이 클 것이라는 조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영조는 이를 멈추지 않고 강행했다.

 영조는 52년 재위 기간 중, 3459회 경연과 50여 차례 거리 행차를 나섰다. 어느 날 변복을 하고 무악재에서 한 노인을 만났다. 행색이 초라한 노인에게 어디서 무엇을 하는 누구냐고 물었을 때, ‘고령능 근처에서 숯을 구워 내다 파는 김세휘라고 대답했다.

영조는 고령능이라는 말이 고마워 김세휘金世輝를 종9품 능참봉에 봉하여 대대로 소령원을 지키게 하였으며, 그의 자손에게는 군역을 부과하지 말라는 명을 내렸다. 노인과의 대화를 보더라도 어머니를 생각하는 마음이 얼마나 깊은지 알 수가 있다. 지금은 문화재청에서 능과 원을 관리하지만, 후손은 아직 그곳에 살고 있다.

 소령원지『昭寧園誌』에는 소령원산도昭寧園山圖와 제물진설도祭物陳設圖, 친제진설협탁도親祭陳設俠卓圖, 친전향축례親傳香祝例, 기명록器皿錄과 어제‧ 어필 묘표와 내용까지 자세히 기록되어있다.

중간중간에 수봉관 수결守奉官 手決이란 글자와 숭정기원후삼계사계추상원 수봉관윤복후 근서-崇禎紀元後三癸巳季秋上浣 守奉官尹復厚 謹書라 쓴 내용이 보인다. 글씨 또한 명필이다. 1630(인조8), 능보다 위계가 낮은 원園에도 능참봉과 같은 직책 종9품 수봉관守奉官이 소령원과 수길원을 맡아 지키게 했음을 알 수가 있다.

 봉분 앞에는 有明朝鮮國後宮首陽崔氏之墓-유명조선국후궁수양최씨지묘라 새긴 묘표를 세웠다. 유명有明이란 두 글자가 거슬려 지워버리고 싶다. 조선왕실과 사대부들은 명나라가 망한 지 80년이 다 되었는데도 묘표에 유명조선국有明朝鮮國과 숭정기원후崇禎紀元後를 관행처럼 사용하고 있었다.

정세를 인식하지 못한 척화파로 인하여 정묘호란병자호란을 겪으며 온갖 수모와 치욕을 당하고서도 말이다. 괜한 생각을 떨쳐버리려 비신 위 가첨석을 바라본다.

묘역을 많이 다녀봤지만, 이렇듯 세밀하게 조각된 가첨석은 처음 본다. 실제 건물의 지붕을 얹어놓은 듯 서까래가 정교하여 뛰어난 장인의 솜씨가 느껴진다. 중앙에 자리 잡은 상석과 사각 장명등, 양옆에는 망주석과 문석인 석마를 배치했다. 밖을 향하여 묘역을 지키는 석호石虎와 석양石羊 등 이곳에 설치된 석물은 영조 시대 최고의 기술자 일류 장인들이 동원되었다.

석물에 대한 총책임은 최천약과 김하정이 맡았고, 석물의 세밀한 부분에 뛰어난 각수刻手 우흥민이 참여했다. 그들의 손길로 다듬은 비석과 석물은 위대한 예술성을 지닌 문화재로 남았다.

영조는 왕위에 오른 자신의 모습을 어머니께 보여주지 못한 것을 늘 안타깝게 생각했다. 원소 아래 비각 2동에는 어제‧어필로 정성을 다한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숙빈최씨가 세상을 떠난 24(영조 20)년 후 묘호墓號를 소령昭寧이라 하고 표석淑嬪海州崔氏昭寧墓-숙빈최씨소령묘을 세웠다. 또한 숙빈최씨가 내명부에 오른 회갑이 되는 해에는 시호를 화경和敬으로 올리고, 묘호廟號를 육상묘毓祥廟에서 육상궁毓祥宮으로, 소령묘를 소령원으로 추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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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령원비 朝鮮國和敬淑嬪昭寧園-조선국화경숙빈소령원후면에는 계유(1753, 영조29)6, ! 어머니가 봉작 받은 지 회갑이 되었다. 앞뒷면을 옛날을 더듬어 눈물을 머금고 내가 쓴다고 기록되어있다.

 소령원은 조선 시대 13기의 원소 중에 수복방이 유일하게 남아있는 곳으로, 정자각 우측 산자락에는 어머니를 시묘한 여막지廬幕址가 남아있다. 소령원은 소문난 명당으로 풍수가들이 즐겨 찾는 곳이다.

언젠가 풍수 공부를 한다는 이로부터 비공개인 소령원 해설을 부탁받았는데, 유적지 해설에는 관심이 없고 산세를 봐야 한다며 묘소 뒤쪽으로 올라간다. 평소 풍수학에 관심이 있어 한 수 배울 욕심으로 따라가려니 숨이 턱에 찬다. 묘소 위쪽으로 이렇게 높은 산줄기가 있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그는 산꼭대기까지 올라가 보고서야 이렇게 좋은 묫자리는 처음 본다감탄을 한다. 산줄기에 뭉쳐있는 혈 자리와 묘소를 겹겹이 싸고 있는 산자락의 설명을 들으며 문외한인 나도 뭔가 알 듯하여 고개가 끄덕여진다. 왕릉 부럽지 않은 숙빈최씨 원소, 용이 꿈틀대는 형태의 긴 사초지 아래 정자각이 조그맣게 내려다보인다.

사초지는 생기 저장 탱크나 다름없다. 영조가 보위에 올라 52년 간 왕의 자리에 있었으며, 83세까지 오래 산 것은 사초지에 가득한 기운 때문일 것이라 하였다.

 영조는 소령원 인근의 보광사普光寺를 숙빈최씨 원찰로 삼았다. 대웅보전과 만세루를 중수하고, 매월 초 어머니를 만나러 다녔다. 고령산 앵무봉 넘기가 힘들었던지 더 파라명하여 더파기고개라 불렀으며, 고개가 높아 곡식을 됫박으로 담아 넘는다 하여 됫박고개라고도 부른다.

보광사 빛바랜 대웅보전大雄寶殿편액은 영조의 친필이라 갈 적마다 눈여겨본다. 뒤편으로 몇 걸음 옮기면 숙빈최씨 위패를 봉안하고 명복을 빌던 어실각御室閣이 보인다. 어실각을 지을 때 영조는 자기를 대신해 어머니를 지켜주기 바라며 심었다는 향나무 한그루는, 효심을 아는 듯 3백 년 동안 그 곁을 지키고 섰다.

관련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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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인석 / 소령묘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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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실각

 

조선 왕조 신위를 모신 사당, 종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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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전

강근숙 파주작가

역사문화탐방 왕과 왕비 삶의 공간이 궁궐이라면, 죽음의 공간은 능陵과 종묘宗廟, 사적 제125호이다. 우리 민족은 조상의 뼈를 묻은 무덤과 신위를 모신 사당에 각별한 의미를 부여했다. 조상숭배에 대한 유교관이 지극했던 조선 시대에는 최고 통치자인 선대 왕을 존숭함으로써, 살아있는 통치자인 왕은 그 존엄한 신분과 권위를 유지하는 방편으로 삼았다. 

태조 이성계는 개경에서 한양으로 도읍을 옮기고 가장 먼저 종묘를 짓기 시작했다. 유교의 예법에 따라 궁궐 왼쪽에 종묘를 완성하고 개경에 봉안되었던 태조의 조상 4대 위패를 새로 지은 종묘로 옮겼다. 2백 년 후 임진왜란으로 종묘와 궁궐은 모두 불타 없어졌으나, 1608년 광해군 때 재건되었고 모시는 신위가 늘어남에 따라 건물의 규모를 늘린 것이 지금의 모습이다. 

정전 가는 길에 네모난 연못에 둥근 섬이 있는 연못을 지난다. 옛사람들은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지다는 천원지방天圓地方의 우주관을 담아 궁궐과 종묘의 면모를 갖추었다. 지세에 따라 조화를 이룬 종묘 건축물은 장식과 기교를 절제하여 단조로워 보이지만, 존엄하고 신성한 분위기를 위한 의도적인 장치이다. 자연미를 살린 조선 건축의 특성을 보여주는 정전正殿( 국보 제227호)은 한국의 건축물 가운데 가장 신비롭고 엄숙한 공간으로, 역대 왕 중에서 공덕이 큰 왕과 왕비의 신주를 봉안했다. 

종묘는 창건 당시 '태묘'라 하였고, 지금은 정전과 영녕전을 합쳐 종묘라 부른다. 신주의 봉안 순서는 정전의 경우 서쪽을 상上으로 하고 제1실 태조 신위를, 신실神室 19칸에는 태조를 비롯한 왕과 왕비 신위 49위를 모셨다. 맞은편 공신당功臣堂은 살아생전 왕을 보필했던 공신 83위의 위패가 봉안된 건물이다. 

영녕전永寧殿( 보물 821호)은 정전의 서북쪽에 있으며 '영녕'은 '왕가의 조상과 자손이 함께 길이 평안하라'는 뜻이다. 영녕전은 정전의 부족함을 보완하기 위해 세워진 별묘로 태조의 4대 조상목조-穆祖, 익조-翼祖, 도조-度祖, 환조-桓祖을 정중正中에, 정전에 모시지 못한 왕과 왕비 34신위가 16감실에 모셔져 있다. 재위 도중 폐위된 노산군, 연산군, 광해군은 공식적으로 임금이 아닌 왕자 신분으로 강등되어 신위가 오르지 못했다. 숙종 때 노산군만이 단종으로 복위되면서 조선 왕조 신위 25위가 모셔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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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년전

종묘 정전을 떠받치고 있는 열주를 바라보면, 내가 인간 세상이 아닌 영원의 공간에 서 있는 듯 아득하게 느껴진다. 세계적인 건축가 프랭크 게리frank Gehry는 종묘를 그리스의 파르테논 신전에 비유하며, 이렇듯 엄숙한 건축물을 만드는 것은 기적에 가깝다고 극찬했다. 종묘를 다시 찾은 그는 '무한의 우주를 담고 있는 장엄한 공간은 세계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며 최고의 건축물을 가진 한국을 부러워했다. 

정전 동쪽에는 제물을 준비하고 제기를 보관하는 입 구'口'자 모양의 건물 전사청이 자리한다. 수복방 앞에는 제사에 바칠 40여 가지 음식을 미리 검사하는 찬막단饌幕壇과 제물로 바칠 소, 양, 돼지 등을 검사 판정하는 성생위省牲位가 있다. 제물은 가장 정하고 좋은 것으로만 가려서 말끔히 해야 하므로, 전사청 바로 옆에는 제정祭井이 있었다. 깊이가 4미터에 이르는 이 우물은, 병자호란 때 제기를 감출 곳이 없어 쩔쩔매다가 우물 속에 넣어 온전히 보존할 수 있었다 한다. 얼마나 깊을까 호기심에 달려가 들여다보았으나, 메워진 우물은 뚜껑을 덮어 놓았다. 

사람이 죽으면 혼魂과 백魄으로 분리되어 혼은 하늘로 올라가고, 백은 땅으로 돌아간다 믿었다. 삶 못지않게 죽음의 공간과 의례를 소중히 여긴 우리 민족은, 국란을 겪으면서도 왕실의 기신제와 종묘제례를 옛 방식 그대로 6백여 년을 이어왔다. 이는 한 왕조의 역사와 가치관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자랑스러운 우리의 문화유산으로, 2009년 조선 왕조 왕과 왕비의 '능 40기북한2기:태조원비 신의왕후 제릉, 정종과 정안왕후 후릉-厚陵 제외와 제사를 받드는 사당 '종묘'가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재1995년되었다. 

종묘 건축물은 현판이 없다. 궁궐 지킴이 조태희 선생과 황영자 해설사의 설명이 없었다면 건물의 쓰임새를 제대로 알지 못했을 것이다. 건물 앞 넓은 월대는 지면으로부터 단을 높여 종묘가 죽은 자의 혼이 머무는 천상의 공간임을 암시한다. 우리 민족은 손재주가 뛰어나지만, 과연 조선 어느 대목장大木匠의 솜씨일까. 빼어난 장인들의 솜씨가 보면 볼수록 경이로워 감탄사가 나온다. 한눈에 다 들어오지 못할 정도로 길고 거대한 정전 지붕과 일렬로 줄지어 

정전 가까이 또 하나의 건물은 종묘제례를 위한 준비실 향청과 집사청이다. 향청은 제사 전날 왕이 친히 내린 향, 축문, 폐백과 제사 예물을 보관하고, 집사청은 제사에 나갈 제관들이 대기하는 곳이다. 제례를 지내기 전 왕이 선왕과 종묘사직을 생각하며 기다리던 망묘루望廟樓, 나도 임금이 앉았던 누마루에 올라 연못을 바라보며 쉬어가고 싶었다. 

망묘루 뒤편에 공민왕 신당이 있는 것은 뜻밖이다. 조선 왕실 사당인 종묘에 고려 제31대 공민왕과 노국공주의 영정을 모신 것은 무슨 이유일까. 역성혁명을 한 태조 이성계가 고려 왕조에 대한 정치적 배려였다고도 하고, 종묘 창건 때 공민왕 영정이 바람에 마당으로 떨어져 조정에서 회의 끝에 그 영정을 봉안하기로 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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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묘대제 어가행렬/사진 길벗 5월호 

조선은 의례의 나라였다.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길례-吉禮, 흉례-凶禮, 군례-軍禮, 빈례-賓禮, 가례-嘉禮 중 길례에 해당하는 종묘제례는 조선 왕실 권위를 매년 5월 첫째 일요일에 올리는 종묘제례는 그 옛날 국왕이 궐을 나와 제를 지내기 위한 어가행렬이 그대로 재현된다. 국왕과 함께 정사에 참여하는 문무백관이 총동원되고, 왕실의 위엄을 상징하는 의장물과 제복祭服을 갖춘 수많은 장수와 군사들의 행렬이 장관이다. 

제례의 절차는 일반 사가와 기본 형식은 비슷하지만, 왕가의 제사는 성대하고 근엄하며 노래와 춤이 어우러진 종합예술의 정수를 보여준다. 종묘제례에 참석했던 파평윤씨 정정공파貞靖公派 윤상수尹相秀 회장은, 문정왕후의 외척이라 아헌관 자격으로 제례를 올렸다. 언제나 초헌관은 전주 이씨 종친이며, 아헌관은 왕비의 외친, 종헌관은 삼정승 집안사람으로 제관을 정한다. 제례가 봉안하는 동안 나라를 세우고 발전시킨 왕의 덕을 찬양하는 제례악이 연주되며, 절차에 따라 문치와 무공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무용인 문무文舞 무무武舞가 곁들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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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료대제 /사진 길벗 5월호 

종묘는 한 왕조의 사라진 문화유산이 아니다. 국왕이 친히 제를 올린 격식 높은 종묘제례중요무형문화재 제56호는 역사와 전통이 뿌리내린 소중한 우리의 문화유산이다. 산 자와 죽은 자가 만나는 '종묘제례'와 신을 즐겁게 하는 '종묘제례악'은 2001년 유네스코 '인류 구전 및 무형유산 걸작'으로 등재되었다. 종묘는 서울 한복판 과거와 현재를 잇는 살아있는 역사 공간으로 국가 최고의 사당이다. 내 짧은 필설로 종묘를 온전하게 드러내기 역부족이나, 누구든 삶과 죽음을 초월한 영원의 공간을 마주하면 번잡한 인생사는 씻은 듯 사라지고 위대한 문화민족이라는 자부심으로 가슴 뿌듯해지리라.

관련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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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일무/사진 길벗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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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태평지무/사진 길벗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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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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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과 왕비 신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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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민왕과 노구공주 영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