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추억-김태회
정월 대보름의 추억
정월 대보름 전날을 소보름이라 한다. 양력 이월 열하루 오늘은 소보름이면서 금촌 장날이다. 금촌장은 옛날 모습과는 사뭇 다른 형태로 바뀌었다. 우전마당이 있던 곳에서 남북방향으로 한 마장 되게 장이 선다.
우전마당은 옛날 세무서 앞에 있었다. 금촌장은 파주에서 제일 크다. 내일이 대보름이어서 그런지 장마당에 땅콩, 호두, 밤 등 부럼과 무나물을 파는 좌판이 여러 군데 벌려져 있다. 장 구경에는 장국밥에 탁주 한 사발이 제격이다. 어묵, 전, 붕어빵도 빼놓을 수 없다. 소보름 장에 부름 한 봉지 사 들고 오며 고향에서 보낸 대보름에 대한 여러 가지 추억들이 떠오른다.
대보름에는 쥐불놀이를 하였다. 물론 대보름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겨울이면 논·밭둑이나 개울둑에 불 놓고 장난치면서 노는 게 예사였다. 그냥 불 놓는 게 아니라 불놀이를 한다.
주로 통조림 깡통에 못으로 구멍을 숭숭 뚫고 깡통 양옆을 휘두르기 좋게 철사줄로 붙잡아 맨다. 깡통 안에다 마른 나무뿌리를 넣고 쏘시개에 불을 붙여 그걸 휘휘 돌리면 금방 불이 벌겋게 붙는다. 그걸로 논두렁, 밭두렁 등 여기저기를 다니며 불을 옮겨 붙인다. 그러다 보면 바지나 양말에 불똥이 튀어 태워먹기 십상이다.
얼굴이 익듯이 뜨듯하기도 하지만 얼마나 재미있던지 하루해가 언제 지는지도 모르고 날이 어둑해야 집으로 갔다. 아마 서녘으로 검바위산이 가려서 해가 일찍 진 것 같다. 검바위산은 고향마을 앞산이다. 저녁연기가 골 안을 메울 때 집에 들어오면 엄마한테 꾸중 듣기 일쑤였다. 그래도 오곡밥에 무나물로 저녁을 맛있게 먹곤 하였다.
대보름에는 시래기, 피마자 나물, 콩나물, 무채 등을 오곡밥과 함께 먹었다. 이것들에다 나박김치를 곁들여 먹으면 맛이 그만이었다. 이상 행복할 수가 없었다.
아버지는 잣을 바늘에 꿰어 불을 붙여 타는 모양과 시간을 보고 장수와 건강을 점치셨던 것으로 여겨진다. 또 보름 전날 일찍 자면 눈썹이 하얗게 센다고 하여 졸음을 억지로 참은 것 같다. 하지만 얼마 되지 않아 여지없이 곯아떨어졌다.
좀 커서는 친구들과 집집마다 몰래 들어가 오곡밥을 훔쳐서 우리가 늘 가는 아지트에 모여 먹었다. 한번은 부엌에 살며시 들어가 밥솥을 여는데 농솥과 부딪혀 쇳소리나 나는 바람에 도망쳐 나온 적이 있다. 그런데 아무 기척도 없었다. 알고 보니 어르신들은 이웃집으로 마실을 가셨는지 아무도 안 계셨다. 다시 들어가 버젓이 오곡밥을 훔쳐 왔다.
고향에는 월롱산과 그 줄기 그리고 검바위산과 안산이 빙 둘러쳐져 있다. 대보름이면 검바위산 꼭대기에 올라 청솔가지와 마른 잎이 붙어 있는 참나무 가지를 움푹 파여 있는 구덩이에 넣고 불을 질렀다. 그러면 불길은 불길대로 솟고 뭉개구름과 같은 연기는 하늘 높이 솟아오른다. 마치 봉화와 같이 이쪽과 저쪽 산봉우리에서 화염이 오르면 저녁노을과 어우러져 골 안에 멋진 광경이 펼쳐졌다. 어쩌면 그런 장면을 즐기고 싶었던 것 같다. 어린 초등학교 시절이다.
아버지의 도움이 있긴 했지만, 그때는 연鳶도 잘 만들었다. 연장이라야 낫, 빵칼과 무딘 톱이 전부였다. 대나무를 쪼개고 다듬어서 닥종이에 붙이는 게 만만치 않았는데 아무튼 연을 만들어 바람받이로 나가서 날렸다. 바람세기가 시원치 않으면 연과 연결한 실패를 가지고 내달리면서 띄우려고 무진 애를 썼다.
나는 연이 방패연만 있는 줄 알았는데 다른 애들은 오징어 연도 만들어 띄우고 있었다. 꼬리가 짧은 방패연은 바람이 너무 세게 불면 땅으로 곤두박질치기 일쑤였는데, 오징어 연은 꼬리가 길어서 그런지 잘 뜨고 높이 나르는 것 같았다. 그래서 아버지한테 오징어연을 만들겠다고 했더니 ‘그건 연이 아니야!’라고 하시는 바람에 오징어연을 한 번도 만들어 본 적이 없다. 지금도 오징어연과 같은 것은 연 같이 보이지 않고 방패연이 제일인 줄 알고 있다.
팽이도 만들어 보았다. 소나무를 잘라 팽이를 만들었다. 그리고 팽이 끝에 쇠구슬을 집어넣거나 못을 박아 뭉뚝하게 하였다. 그런 작업을 하는 데는 양지바른 툇마루나 추녀 밑이 제격이었다. 팽이 만드는 작업이 끝나면 팽이채를 만들었다. 막대기 끝부분에 홈을 빙 둘러 판 다음 거기에 노끈 같은 것을 묶으면 된다. 그걸 가지고 앞 논 얼음판에 가서 팽이를 치면 시원치 않게 돌기도 하고 잘못 치면 얼음판 끝머리까지 도망가는 경우가 종 종 있다. 그래도 그게 재미있어 손이 트도록 팽이채를 휘둘렀다. 사실 팽이 만드는 것이 너무 힘들어 그 다음부터는 사달라고 해서 팽이를 쳤다.
그 시절 아이들은 썰매를 직접 만들어 탔다. 고향마을 근처에는 군부대 주위에 울타리를 치면서 철조망과 함께 방치된 세모 모양의 철장대가 많았다. 그 철장대를 두 토막으로 잘라 그 철 토막 위에 두 발을 올려놓아 스케이트처럼 지쳤다. 그 속도가 만만치 않게 빠르다.
이력이 붙으면서 꼬챙이도 두 개에서 하나만 사용하는데 가랑이 사이로 꼬챙이 질을 하였다. 철장 스케이트가 가을 추수 후에 남아 있는 벼 그루터기나 홈에 걸리게 되면 앞으로 고꾸라지기 일쑤였다. 그래도 신나게 탄 기억이 생생하다.
대보름에는 흔히 윷놀이를 한다. ‘주∼주!’, ‘뺄모 어디 갔냐!’, ‘단동 모찌다.’, 잡아야 할 말을 코에 대면서 ‘맛이 구수하구나!’, 의도한 대로 윷이 안 나올 때 윷가락을 다른 윷가락으로 때리면서 ‘아이, 이 우라질 놈의 윷이!’ 등 수많은 농弄들이 쉴 새 없이 쏟아진다. 그런 놀이를 하면서 막걸리 잔을 주고받는다. 오래 전에는 마을 농기패가 있어서 이런 날은 꽹가리, 북, 징, 제금 등을 치면서 한 마당 놀이판이 벌어졌다. 다만, 이런 놀이들이 대보름이 지나면 봄 아지랑이처럼 아른 거릴 뿐 거의 자취를 감춘다.
대보름에는 화투도 친다. 화투는 육백, 섯다, 도리짓고땡이 고작이었는데 고스톱으로 전환되면서 초상집 등 장소와 때를 가리지 않고 세 사람 이상만 모이면 판을 벌리곤 했다. 얼마 후부터는 ‘맞고’라고 해서 두 사람이도 친다. 특히 도시에서 일찍이 이런 현상이 있었으나 최근에는 슬그머니 꼬리를 감춘 것 같다. 다만 노인정에서는 아직도 성행하는 것 같다. 필자가 못 봐서 그런가. 아마 시대의 흐름에 따라 놀이문화가 확 바뀌어서 그런 게 아닌가 여겨진다.
대보름과 관련하여 자료를 찾아보니 귀밝기술 마시기, 지신밟기, 달집태우기 등 더 많은 유래와 음식 및 기복과 놀이가 있으나 나에게는 위에 열거한 것들 마저 아련한 추억으로만 남아 있어 매우 아쉽다.
새마을호 열차
2월 25일은 결혼한 지 46주년이 되는 날이다. 계산해 보니 552개월, 16,800일이다. 숫자로 늘여 놓으면서 엄청난 세월이 흘렀다는 것에 깜짝 놀랐다.
아내에게 식사라도 한 번 하는 게 어떤지 물었다. “우리가 살아 있음에 감사하면 됐지 뭘 해요.”하며 그냥 흘리는 말처럼 대꾸한다. 나는 속으로 감탄했다. 평소 감사함을 알고 사는지 부끄럽기 까지 했다.
신체 건강을 위해서 운동을 하고 정신 건강을 위해서는 책을 읽고 글을 쓰는 게 좋다고만 말을 해왔지 그 외는 생각지 못했다. 그러나 건강에 더 나아가 행복에 근본적인 건 심적 건강이 아닌가 얼핏 뇌리를 스친다. 아내가 말한 것과 같이 스스로 만족감을 넘어 감사할 줄 아는 마음이 중요하다.
나는 매일 잠자리에서 일어나자마자 기도하는 게 있다. “새로운 하루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건강한 하루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 새롭고 건강한 하루를 값지게 쓰겠나이다.”라고 입으로만 기도했지 아내처럼 마음속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진정성 있는 감사의 마음은 느끼지 못했다. 가물에 콩 나듯 느낄 때도 있었지만 어느 틈엔가 습관적으로만 하는 기도에 불과한 기도가 돼버리고 말았다.
하루 전날 그러니까 2월 24일 “며칠 전 미리 양해를 구한 것처럼 결혼기념일 당일은 아산에 가야할 일이 있으니 오늘 드라이브라도 하면서 하루를 보내면 좋지 않을까요?”라고 다시 제안 했더니 또 부정적으로 응답한다. 먼저 한 말이 진심이었던 것 같다. 결혼기념일로 조촐한 여행계획이라도 세워 제안했어야 했나 하는 쑥스러운 마음이 들기도 했지만 한편으론 특별한 사정이 없다면 두 번씩이나 제안했으니 못이기는 척하고 함께 하루를 보내는 것도 괜찮은 것 같은데 하는 서운한 마음도 들었다. 하는 수없이 내 제안을 거두어들일 수밖에 없었다. 요즘 ‘아보하’라는 신조어가 있다. ‘아주 보통의 하루’라는 말이란다.
아내는 그런 삶의 소중함을 깨우친 것인지. 코로나19 때 ‘일상’이라는 말이 유행하여 별일 없이 온전한 하루를 보내는 것이 얼마나 소중하고 행복한 가를 일깨운 것처럼. 하지만 내일은 ‘아보하’라는 일상에 ‘유별난’이라는 분장 좀 해도 되지 않을까 우겨봤지만 별무신통이다. 앞에서 계산해 본 것처럼 그 많은 세월을 살아오면서 몇 가지 역경도 있었지만 아내가 말한 대로 지금까지 살아있음에 감사하지 않은가. 달포 전 나이도 한참 아래인 동생의 남편이 세상을 떠나면서 아내의 심기가 바뀌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 당시 ‘살아있음’이라는 말을 꺼낸 걸로 봐서 그와 연관이 있는 걸로 여겨진다. 2월 25일 아침 전철을 타고 용산역에 내려 동행들과 만났다. 용산에서 아산 온양까지 가는 열차편은 새마을호로 예약했다고 S선생이 알려주었다. 나는 순간 숨이 멈추는 줄 알았다. 1979년 2월 25일 오전 결혼식을 마치고 우리는 친구들과 남산에서 시간을 보낸 후 저녁에 부산까지 가는 새마을호 열차(침대칸)에 올랐던 것이다.
그날로부터 46년 후 2월 25일 같은 날 새마을호를 타다니. 그 동안 다른 종류의 열차는 타 본 일은 있으나 새마을호를 탄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이렇게 스토리가 전개되다니 기이하기 까지 하다. “아내와 함께 새마을호를 타고 어디든 여행을 가면 어땠을까? 내가 왜 그 생각을 못했을까?”라고 후회한다. 다음에는 꼭 아내와 함께 새마을호 열차를 타고 여행을 해야지 다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