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주 역사산책-이기상
파주지역 곳곳에 서려 있는 선조들의 역사를 구름에 달 가듯 산책해 본다.
홍랑을 아시나요
파주에는 홍랑(洪娘)이라는 조선시대 기생의 묘가 있다. 조선시대의 기생은 ‘관물(官物)’ 취급을 받는 노비와 다름없는 천민신분이다. 그러나 기생은 미모와 지혜를 갖추고 선비와 풍류를 나누면서 양반사회에서 빼 놓을 수 없는 역할을 하였다.
홍랑은 황진이, 매창과 함께 조선 3대기녀로 불리는 기생으로 정절의 의무가 없지만 최경창과 짧은 인연을 맺은 후 일부종사한 여자이다. 당시에는 “살아서는 천민이지만 죽어서 양반된 사람은 홍랑 한사람뿐이다.”라고 알려져 있다.
홍랑은 함경도 홍원 출신으로 어려서 홀어머니를 봉양하다가 12살에 어머니가 죽자 그 지역의 관아인 북도평사의 기생으로 입적하였다. 그 후 16세가 넘던 가을에 홍랑은 당시 율곡 이이, 송익필과 함께 하는 조선 중기 8대 문장가이던 고죽 최경창을 만나게 되었다.
최경창은 병마절도사 보좌관으로 대개 2년이면 순환보직 되는 자리였고 어느날 고을 원님이 초청한 술자리에서 홍랑을 만났다. 두 사람은 가을에 만나 이듬해 봄에 보직을 마치면서 헤어지게 되었다. 이때 홍랑은 최경창을 따라 한양까지 동행하였다가 함경도에 돌아 오는 길에 함관령에서 송별시를 지어 보냈다.
산버들 곱게 꺽어 보내노니
주무시는 창밖에 심어두고 보소서
밤비에 새잎 나거든 나인가 여기소서"
이렇게 이별의 아픔과 사랑을 표현한 이 시는 당시의 신분을 떠나 둘의 각별한 감정을 표현한 글이다. 현대의 남녀라면 창 밖에 심어 두는 것이 아니라 방안에 심어 두라 하였을 것이다. 최병창은 이 시를 한문으로 옮겨 놓은 후 ‘변방곡’이라 하였고 ‘송별’이라는 답시를 보냈다.
말없이 마주보며 유란을 주노라.
오늘 하늘 끝으로 떠나고 나면 언제 돌아오랴.
함관령의 옛 노래를 부르지 마라.
지금까지 비구름에 청산이 어둡나니.
최경창은 다음 해에 병이 들어 겨울까지 자리에서 일어 나지 못하게 되었다. 그 소식을 들은 홍랑은 7일 밤낮을 걸어 한양에 들어와서 병 수발을 하였다. 그러나 1976년 봄에 사헌부는 최경창이 북방의 관기를 도성에 들여와 살게 한 것을 상소하여 파직시겼다. 최경창은 비천한 신분의 홍랑이었지만 자신의 명예를 버리고 사랑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홍랑과 또 한 차례 이별하게 되었다.
파직 당한 최경창은 본래의 깨끗한 성품을 인정받아 복직하게되었고 몇 번 변방의 한직으로 근무하다가 1583년 45세의 나이로 객사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홍랑은 파주의 무덤에 찾아와 대성통곡하고 자신의 얼굴에 상처를 내어 흉한 모습을 한채로 시묘살이를 시작하였다.
홍랑이 시묘살이를 한지 9년이 되던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최경창의 유작들을 모아 고향으로 피난하였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최경창의 유작을 가족에게 전하였고 홍랑이 죽자 해주 최씨 문중은 그녀가 비록 천한 신분의 관기였으나 집안 사람으로 여겨 최경창 부부의 합장묘 바로 아래 홍랑의 무덤을 만들어 주고 제사를 지내 주었다.
홍랑의 시조는 고등학교 국어 교과서에도 실렸으며 지난 2000년11월 한글로 된 시 원본이 발견되면서 세상에 더 알려졌다. 지금도 여러 블로그를 보면 홍랑의 묘에는 발 걸음이 끊이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4백년전 조선의 유교적 질서 속에서도 제도와 신분의 한계를 넘어서 이룬 사랑과 이별 이야기가 21세기 지금에는 그 옛날 교과서적인 이야기로 치부할 수 있다. 현대사회는 사람이 넘치면서 서로 쉽게 만나거나 이별을 겪는다. 그렇지만 홍랑처럼 누구나 변함 없이 늘 자신을 지켜주고 바라보아 주는 그런 사랑을 마음에 그린다.[2012.12.23일, 글·사진:이기상, 파주이야기]
2012년 당시 위치
조선을 바꾼 여인 정난정
*교하 당하동 정난정 묘
파주 교하지역 당하동에는 조선시대 유명했던 정난정(?~1565)의 묘가 있다. 정난정은 < 조선왕조 오백년 - 풍란,1985년>과 < 여인천하,2001년>이라는 TV드라마 소재로 나와 높은 시청률을 올리기도 하였다.
정난정의 아버지 정윤겸은 도총부 부총관을 역임힌 양반이었지만 어머니는 군영에 소속된 관비였다. 조선은 양반의 수를 제한하기 위해 양반과 천민중에 난 자식은 천민의 신분에 따른다는 종모법을 시행했다.
이 시대에 살아온 황진이(?1506~1567)도 천민 출신으로 기생으로 끝났지만 정난정은 국가에서 관리하는 외명부에 정경부인으로 등재 되기도 하였다. 두 여인이 비록 천민 출신이지만 삶의 질곡은 너무나 다르게 살아 왔다.
정난정은 대대로 이어지는 천민 신분을 벗어 나기 위해 집을 나와 기생으로 입적하였고 문정왕후의 동생인 윤원형의 눈에 들어 첩이 되었다. 그 후에 본부인 김씨를 몰아내고 자신이 정처가 되었고 자신의 자녀를 적자녀로 올리는 등 천민에서 벗어 나려고 노력하였다.
윤원형의 천거로 문정왕후의 궁궐을 자유롭게 출입하면서 그녀의 권세는 하늘 높은 줄 모르게 올라가고 있었다. 당시에 그녀의 권력에 힘입으려고 사돈이 되려고 하는 양반들이 많이 있었고. 이런 권세로 그녀는 많은 재산을 모으며 부귀를 누렸다. 그러나 유교사회의 사대부들은 그녀를 연산군의 후궁 장녹수와 광해군때 상궁인 김개시처럼 악녀로 불렀다.
윤원형은 누나인 문정왕후의 수태불공을 드리러 봉선사에 갔다가 보우대사의 소개로
정난정을 알게되었다. 처음 본 정난정이 마음에 들자 윤원형은 중전 윤씨의 동생이라는 신분으로 당시 도총관이었던 정난정 부친에게 소실로 줄 것을 애청하였다. 이에 정난정은 아들을 낳으면 정실부인이 되게 해준다는 서약서를 받고 첩 소실이 되었다.
정난정이 혼기가 되었을때 주위에서 청혼이 많았지만 모두 소실로 가는 혼사이어서 매몰차게 거절 했었다고 한다. 그러나 윤원형이 자신과 같이 불교에 대한 신앙심이 깊고 천민을 무시하지 않은 성격과 신분상승의 기회를 갖을 수 있는 좋은 기회라는 것때문에 소실도 마다하지 않았을 것이다.
정난정이 낳은 자식들은 종모법에 따라 천적에 오를 수 밖에 없었지만 문정왕후를 통하여 다른 적자에게 통혼할 수 있는 전교를 내리게 하여 천인을 벗어 날 수 있게되였다.. 또 이것에 만족하지 않고 윤원형에게 서자도 적자와 같이 벼슬길에 오를 수 있도록 ‘서얼허통법’을 상소하여 당시 신분제도의 근간을 바꾸게 하였다.
그러나 사대부들은 정난정이 문정왕후를 이용하여 불교를 재건하려 했을뿐 아니라 적자와 서자의 구별을 철폐한 배후로 지목하고 문정왕후가 죽기만을 기다렸다 .
정난정이 권력을 행사할 수 있었던 것은 남편 윤원형의 누나이면서 중종의 3번째 왕비인 문정왕후가 있었기 때문이다. 문정왕후는 아들인 명종이 10살에 왕위를 계승하자 수렴첨정을 명분으로 조정의 권력을 한 손에 잡았다.
문정왕후는 궁중에서 개인적으로 불교를 신봉하였지만 밖으로 드러내지 않고 있었고 정난정이 해다다 2~3차례씩 한강에 가서 물고기에게 밥을 주는 공양을 매우 기특하게 생각하였다.
이에 정난정은 문정왕후의 불교에 대한 깊은 신앙심을 알아차리고 자신을 윤원형에게 소개했던 보우대사를 문정왕후에 알현시겼다. 문정왕후는 그를 선종판사로 등용하고 불교를 공개적으로 부흥 시켰을뿐 아니라 도첩제를 부활시켜 승려들의 신분을 보장하였다.
명종의 아들 순회세자가 13살에 죽고 즉위한지 20년이 되어도 후사가 없자 문정왕후는 보우대사와 함께 양주 회암사에서 많은 시주를 하는 무차대회를 열어 득남을 기원하였다.
문정왕후는 조선의 사직을 잇기 위해 기도행사를 간절한 마음에서 지냈지만 수십일이 지나면서 병환이 생겨 갑자기 사망하게 되었다.
1965년 문정왕후가 죽자 조정에서는 명종의 뜻을 알아 차리고 그동안의 외척의 악행을 정리하기 시작하였다. 우선 승려 보우는 제주도로 귀양보내 사사시겼고 정난정은 본래 신분인 천인으로 강등시켰다. 이후에도 계속적인 사대부의 탄핵으로 남편 윤원형과 함께 황해도 강음 (현재 금천)으로 유배 되었다. 그러나 윤원형의 전 부인인 연안 김씨의 계모 강씨가 정난정이 김씨를 독살했다고 의금부 고발했다. 이 사건으로 점차 불리해지자 평상시 몸에 갖고 있던 독약을 먹고 자결했다.
전 부인을 독살한 것은 윤원형도 알고 있었고 정난정은 이 사건으로 고문을 당할것이 두려워 늘 비산을 지니고 다녔었다. 어느 날 집안 하인이 잘못 알고 의금부에서 잡으러 온다고 알리는 바람에 급히 자살하였고 윤원형도 술에 탄 독을 마시고 곧 자결했다고 한다.
정난정에 대한 사대부의 평가는 후하지 않았다. 그들은 ‘출세를 위해 권력자를 유혹한 여인’ 또는 ‘윤원형의 본처를 독삭한 표독스런 여자’로 말하지만 그녀가 영리하였고 불교에 대한 신암심이 깊었기 때문에 문정왕후가 그녀를 앞세워 불교를 중흥하려고 했었을 것이다.또 양반가들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만들어 놓은 서자 차별법을 바꾸어 사회적 약자를 보호한 여인으로도 평가하는 사람들도 있다.
정난정의 묘는 파평윤씨 정정공파 묘역에 있는 윤원형의 묘 옆 뒤에 일반인 크기의 봉분과 비석으로 이루어져있다. 전체적인 형상은 윤원형의 묘역에 포함 되어 있으나 본처가 아니라서 합장은 되지 않은것 같다. 정난정의 묘에는 당시 묘비가 없었지만 후손들이 윤원형의 부인으로 인정하여 비석을 세웠다고 한다.
정난정은 다른 여인들과는 달리 기가 넘친다고 한다. 지금도 그녀의 기를 받기 위해 정난정의 묘에서 기도하는 이가 있다. 추운 겨울날에도 정난정 정난정 묘비에는 오백원짜리 동전이 올려져 있었다. 아직까지 정난정은 그 시대의 기운을 갖다 준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 것 같다. <2013.2.4. 파주이야기,파주의 여인들 3편, 글.사진 이기상,>
월롱면 지명유래에 대한 소고
월롱의 지명유래는 통상적으로 달이라는 월(月)과 바구니라는 롱(籠)의 의미로 ‘달바구니 지역”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월롱산에 휘영청 밝은 보름달이 걸려 있는 아름다운 정취를 상징하고 있어 어떤 주민은 달맞이 행사를 하여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일부에서는 ”달’은 산(山)이라는 옛말이고 월롱 지역에 다락골이라는 마을이 있어 ‘높은 산이 있는 지역’이라고 말하고 있어 지명유래를 정확히 하기 위해서는 문헌을 중심으로좀더 연구해야 할 것으로 봅니다.
다만 전문적인 문헌연구에 앞서 월롱산이 바구니처럼 생겼다는 것과 월롱산에 달이 담겨져 있다는 지명유래는 현재 지명을 지나치게 직역하여 해석한 것으로 생각 합니다. 보통 지명유래는 옛말의 변화과정과 음운, 다른 지명과의 연관 관계를 충분하게 고려하여 결정되어져야 한다고 봅니다.
월롱의 지리적 위치를 살펴 보는 것도 지명유래를 해석하는 도움이 될 것입니다. 우선 월롱산은 해발 229m로 남파주 지역에서는 가장 높은 산입니다. 이 곳에서는 임진강 건너편 산줄기가 한 눈에 들어오고, 멀리로는 장단반도, 가깝게는 오금리 벌판과 통일로 벌판이 잘보입니다. 지난 2004년에는 월롱산이 한성백제 시절의 퇴뫼식(산 정상 중심) 산성으로 조사되어 2004년에 경기도 문화재 제1966호 지정되었습니다.
특히, 맥금동 방향의 서쪽 절벽은 20m 높이의 암벽이 100m 길이로 천연요새로 활용되었고 일제 시대에 일부 석산으로 개발되었지만 전반적인 절벽형태는 잘 보존되어있습니다. 월롱 방향의 동쪽 절벽은 서쪽 보다는 규모가 작지만 멀리서 보아도 바위로 이루어진 산으로 쉽게 알 수 있는 지형을 갖추고 있습니다.
월롱산의 지형을 종합하면 월롱산을 중심으로 금촌, 교하, 탄현, 문산,파주 부근에서 가장 높은산으로 이 지역을 통과할 때에는 월롱산 줄기의 고갯길을 통과해야만 했습니다. 또 주변 지역에서 바라 볼때 월롱산 정상이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월롱산의 지형적 특성을 보면서 ‘월롱(月籠)이라는 지명의 유래를 살펴 보는 것이 지명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으로 봅니다.
우선 월(月)자라는 명칭을 갖게 된 것을 알아 보기 위해서 다른 지역의 지명유래를 소개합니다.
과천시 문원동(文原洞)에 있는 ‘다락터
지금까지는 지명에 좀 관심있는 학자라도 글자풀이 중심의 지명 연구를 많이 해 왔다. 그러나 지명 연구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지명을 단순히 현재에 나타난 글자에 맞출 것이 아니라 옛말·우리말의 변화 과정·음운·방언·역사성·다른 지명과의 유관 관계 등을 살펴 그 지명이 형성되기까지의 정황을 복합적으로 분석하여, 그 지명이 가진 뜻이나 정착 과정을 철저히 연구해야 한다.
예를 들어 과천시 문원동(文原洞)에 있는 ‘다락터’의 예를 들어 보자.
단순히 현재 지명 글자에 집착하는 사람은 ‘다락터’를 글자 그대로 ‘다락+터’ 즉, ‘다락이 있는(있었던) 터’의 뜻으로 새긴다. 그리고는 이것의 한자 지명인 ‘누기(樓基)’에 맞추면서 그 확신을 더욱 굳힌다. 지명 풀이의 함정은 바로 이런 데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전국 산지에 공통적으로 많이 분포한 이 ‘다락터’ 지명이 모두 ‘다락이 있는’ 곳으로만 알다가는 큰 오류를 범한다.
다락터는 달리 다라터 다래터 달터 등으로도 불리기도 했는데, 같은 뜻의 비슷한 땅이름으로 다라실 다래실 다래울 등도 있었다. 전국 곳곳의 누기(樓基) 외에 다라(多羅) 다래(多來) 월기(月基) 등의 한자식 지명은 이들을 한자로 옮긴 것이다.
‘다락터’와 ‘달터’는 같은 지명임에도 한자로는 전혀 다른 뜻의 글자로 표기되고 있지 않은가. ‘다락터’는 ‘달’과 ‘터’라는 두 명사 사이에 ‘늒’라는 소유격조사가 들어가 이루어진 말이다.
달늒터>다굊터(다라터)>다락터
‘달’은 ‘산(山)’의 옛말이다. 따라서 ‘달늒터(다라터)’는 ‘산(山)의 마을’ 즉, 산촌(山村)의 뜻이 된다.
따라서 땅이름 연구에 있어서 지금의 글자로 나타나 있는 그 지명만을 보고 그 글자대로 뜻풀이를 해 내려는 잘못은 저지르지 말아야 할 것이다. <과천문화원 지명유래 발췌>
김포 양촌면 누산 2리 누촌(樓村)
<조선지지자료>에 누리(樓里)라 기재했고 고유명칭을 ‘다락말’이라 병기(?記)했다.
다락말이 예전부터 부르던 지명으로 너른 들 한가운데 우뚝 솟은 언덕에 마을이 형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다락은 ‘달(達)+악(접미사)’의 구조로 분석되며 집안의 다락이 높은 곳에 있는 것처럼 ‘달’은 ‘높다’는 뜻으로 높게 걸려 있는 마을의 뜻이다. <김포 누촌 지명유래 발췌>
홍천 남면 월천리(月川里)
남면(南面) 북동쪽에 위치한 리.
본래 홍천군 금물산면(今勿山面, 남면) 지역으로 높은 곳이라하여 다락골, 또는 월천(月川), 월천동, 월천곡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안말(내곡(內谷)), 가작골(가작곡(佳作谷)), 헌텃골(구대곡(舊垈谷)), 양지말(양지림(陽地林)), 욕골을 병합하여 월천리라 함. <홍천 남면 월천리 지명유래>
위에 소개된 글처럼 ‘달’은 ‘다락’이라는 우리 말에서 월(月)자로 한자로 표기하면서 뜻이 달라진 것으로 판단됩니다. 국어사전에도 다락은 ‘ 주로 부엌 위에 이 층처럼 만들어서 물건을 넣어 두는 곳으로 출입구는 방안 쪽에 있는 것이 통상적이다.’라고 설명되어 있습니다.
국어사전적으로 보면 ‘월롱’의 월(月)자가 ‘다락’과 같이 높은 산이라는 의미로 쓰인다는 것을 충분히 알 수 있고 지형 특성도 일치하고 있습니다.
다음은 월롱에 롱(籠)을 살펴 보겠습니다. 월롱산 주변에 있는 용주서원(龍洲書院)과 용상사(龍床寺)는 용(龍)자를 이름에 사용하고 있지만 하필이면 월롱산에는 ’롱(籠)’ 자를 사용했습니다.
월롱의 롱자는 대나무 그릇을 총칭하는 뜻과 물에 ‘젖다’라는 뜻을 갖고 있을뿐만 아니라 옷과 일상용품을 넣어 두는 농(籠)을 의미하고 ≪임원경제지 林園經濟志≫에 따르면 “농은 본래 죽기(竹器)”라는 기록을 보면 초기의 농은 대나무와 싸리·버들가지 등을 엮어 만든 큰 상자 형태에서 유래되었을 것입니다.
이런 사례로는 경상남도 통영시 산양읍 연화리에 농바우(籠巖)라는 마을이 있는데 이는 : 농(籠)처럼 생긴 큰바위가 있어 붙여진 이름이라고 합니다. 월롱산 정상에도 사각형태의 바위산으로 이루어져 있어 아마 롱자가 붙여지지 않았나 생각해 봅니다.
*동쪽 방향에서 본 월롱산
그렇다면 월롱산을 높은산이라는 월(月)자에 바위가 있는 산이라서 악(岳)자를 이용해 월악산(月岳山)이라고 할 수 는 있지 않을까 생각하지만 월롱산은 바위가 정상부분에만 평평하게 있고 계곡이 많지 않아 악(岳)자를 붙일 수 없었을 것입니다.
월롱의 지명이 기존의 ‘달 바구니’ 로 유래되었거나 ‘바위가 있는 높은 산’ 으로 유래 되었어도 두가지 다 좋은 의미로서 쓰이고 있어 큰 문제는 없습니다. 다만 한글의 변화 과정과 지명을 한자로 전환하는 과정을 염두에 두지 않고 지명유래을 확정하는 것은 지나치게 단순한 결정이 아닌가 해서 여러가지 자료를 검색해 보았습니다.
지명유래는 그 지역의 스토리입니다. 그 스토리에 의해서 지역의 특성과 지역 주민의 자부심을 줄 수도 있는 것입니다. 한 차원 높이 생각하면 그 스토리를 통하여 지역 브랜드를 새로 만들어 지역 발전의 모티브를 줄 수도 있습니다. 앞으로 월롱이 한 차원 높이 발전하기 위해서는 월롱 지명유래에 대하여 좀더 전문적인 연구가 필요한 시점이 아닌가 생각합니다.[2014.1월, 파주이야기]
화석정 소각설의 논쟁에 빠져
파주의 임진강에는 조선시대에 서울과 의주를 국도1호를 잊는 임진나루가 있었다. 이곳 임진나루는 현재 문산읍 임진리에 위치하고 임진철교가 세워지기 전까지는 남과 북을 잊는 국도1호선의 도강구간이었다.
이곳 임진나루는 임진왜란 당시 선조가 왜군의 공격을 피해 한양을 버리고 북쪽으로 피난 갈때 급하게 도하했던 아픈 역사가 있는 곳이다.
그러나 임진왜란이 일어 난지 4백여년이 넘는 지금이지만 선조가 도하할 때 어둠을 밝히기 위해서 불태운 건물이 화석정이라는 것과 임진나루의 건물이라는 기록이 서로 대치하며 다르게 전해지고 있다.
앞으로 이 글에서는 편의상 화석정을 태워서 불을 밝혔다는 것을 ‘화석정 소각설’이라하고 임진나루에 있는 승청(선사 관리 건물) 또는 승정(임진진 성곽 위의 누각) 태웠다는 기록을 “임진나루 소각설”이라고 할 것이다.
임진왜란 당시 화석정을 소각했다는 것은 대부분의 국민이 알고 있는 이야기이다. 1592년(선조25년) 4월30일 선조 임금이 벽제~혜음령을 지나 임진나루에 도착 했을 때 비가 억수같이 내려 주변이 칠흑 같이 어두워 제대로 방향을 잡을 수 없었다. 그때 임진나루 주변에 있는 화석정에 불을 붙여 뱃길을 밝히고 임진강을 건넜다는 것이다.
이 화석정은 1581년 당파 싸움이 치열했던 선조때 서인의 수장인 이이가 십만양병설을 주장했다가 동인인 유성룡이 반대로 무산되고 파직되면서 낙향한 곳이다. 이때 이이는 임진왜란을 예견하고 제자들에게 화석정이 불에 잘 타도록 기둥과 서까래에 들기름을 반질반질하게 바르도록 했다고 한다.
그러나 임진왜란에 대하여 저술한 유성룡의 징비록에는 화석정 소각설과 다르게 임진나루에 있는 승정 건물을 헐어 목재를 불태워 뱃길을 밝히고 왜군이 뗏목을 만들지 못하도록 하였다고 당시 상황을 상세하게 기술해 놓았다.
징비록은 임진왜란 당시의 전란의 원인과 전황, 실책들을 기록한 전란사로 임진왜란의 원인과 과정 그리고 자신의 잘못과 조정의 실책,백성들의 임금과 조정에 대한 원망 등을 담고 있으며 대한민국 국보제 132호로 지정되어 있다
화석정을 불태웠다고 주장하는 측에서는 기록으로 남겨 놓은 정사도 개인의 입장에 따라 사실을 왜곡하여 기록할 수 있기 때문에 유성룡이 기록한 징비록의 내용도 사실이 아닐 수 있어 믿을 수 없고 민간에 널리 퍼져 있는 화석정 소각설을 신뢰한다고 말한다.
선조가 임진강을 도하할때 화석정이나 승정을 소각하여 조명을 비추게 한 사건은 어느 건물 태웠는지의 사실 여부를 떠나서 기록된 역사를 보는 관점이 중요한 논란을 일으키게 하는 원인이다.
이 사건에 대하여 역사학자들도 화석정 소각설과 임진나루 소각설에 대하여 진위 여부를 구체적으로 밝힌 내용은 찾기 어렵다. 따라서 이 논쟁은 상대방의 역사관 탓으로 돌리며 또 하나의 역사 속으로 흘러갈 수가 있다.
역사는 객관적 사실로서의 역사와 이를 토대로 역사가가 주관적으로 재구성한 역사의 두 측면을 내포하고 있다고 한다. 지금은 그 당시를 더 합리적으로 관찰할 수 있는 시점이다. 상반되는 두 측면 중에 객관적인 사실에 대하여 이 소각설을 재조명 하려고 한다.
임진나루는 전략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있다. 임진나루 맞으편의 동파나루는 퇴적층이 있는 곳으로 거리가 가깝지만 수심이 깊은 곳이다. 또한 임진나루 상류인 화석정이 위치한 지역은 수직에 가까운 적벽이 있으며 임진나루 하류는 경사도가 가파른 산이 위치하고 강폭이 넓게 형성되어 있다.
임진나루는 강과 인접해 있으며 화석정은 적벽 상단보다 높은 산마루에 위치되어 있어 강변보다 60~70M 정도 높은 곳에 위치한다. 강 북단에 있는 동파나루에서 임진나루와 거리는 314M, 동파나루에서 화석정까지의 거리는 678M 이격되어 있다.
강 북단에 위치한 동파나루는 문헌이나 고지도에 나타나지가 않아 대동여지도에 동파역이 하류방향에 위치한 것을 미루어 임진나루와 직선 거리에 있을 것으로 추정하여 거리를 측정하였다.
1592년 4월30일 선조가 임진강을 건너는 날은 비가 억수 같이 내려 어둡기 때문에 가시거리가 짧아 지척을 분간할 수 없을 정도이었다고 한다. 이 정도의 상황이면 가시거리가 50미터 이내일 수 있다.
요즘 시대 기준으로 보면 보통 안개로 가시 거리가 제한 되는 기준을 1km 이상으로 정하고 있다. 또 안개로 비행기의 이착륙이 금지되는 가시거리는 공항 등급에 따라 다르지만 인천공항의 경우에는 200m 이상으로 정하고 있다.
그날 비가 억수같이 온다는 날의 저녁때라면 가시거리는 상당히 짧았을 것이다. 화석정이 거의 7백여m 떨어져 있고 70미터 이상의 고도에 위치해 있어 사실상 화석정을 소각하여 임진나루에 영향을 줄 확률은 거의 없다고 볼 수 있다.
아울러 왜군이 추격하고 있는 상황에서 화석정을 소각하기 위해 사람을 보내는 데는 산악지형으로 인하여 20여분 이상 소요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임진나루에 있는 승정을 소각하는게 훨씬 손 쉽게 선택할 수 있는 대안 일 것이다. 특히, 왜군이 뗏목을 만들기 위해 임진나루 주변에 있는 건물을 헐어 재사용할 수 있기 때문에 전략적으로도 승정을 소각했을 것이다.
국민 대부분이 알고 있는 화석정 소각설은 객관성에서 임진나루 소각설보다 논리적이거나 과학적이지는 못하다.그러므로 임진나루 소각설이 사실이 확률이 높은 것이다. 확률이 상대적으로 적다고 반드시 사실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피난 당시 선조 임금의 도하작전을 유성룡과 이이의 제자들이 서로의 입장에 따라 달리 기록했다고 한 것에 대한 논란을 떠나서 어느 설에 더 객관적인가를 판단하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본다.
역사 기록은 역사가의 관점에 따라 입장이 달라 질 수 있다. 그러나 객관적 사실을 왜곡하면서 감정적으로 역사를 논쟁하는 것은 임진왜란이 한국 역사에 미치는 영향을 논쟁하지 않는 어리석음을 닮아 가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2015.4.16일, 파주이야기]
자료사진
광탄 독립지사 심상각의 재조명1
심상각 생애
국가보훈처 공훈록
경기도 파주(坡州) 사람으로, 3·1운동 때 파주군의 주동자로 활약하였고, 그 후 임시정부에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그는 1919년 3월 27일 파주군의 독립만세 시위운동을 주도하여 군 전체가 봉기할 것을 계획하고, 군중과 함께 면사무소를 습격한 후, 그 여세를 몰아 남파주(南坡州) 경찰 주재소가 있는 봉일천리(奉日川里)까지 시위행진하여 만세를 불렀다.
그 후 중국 상해(上海)로 망명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약 10년간 활동하다가, 광복된 후 귀국하여 후진양성을 위한 육영사업에 전념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파주독립운동사
-심상각(沈相恪, 1888~1963), 김포(金浦) 출생, 파주(坡州) 성장-
호는 우산(山), 현감 정택(定澤)의 아들로 본관은 청송 이다. 1919년 3.1운동 당시 3월 10일 파주지역에서도 임 명애
(林明愛) 등 보통학교 학생들의 시위가 일어났고, 3 월 25일에도 구세군(救世軍)인 염규호(廉圭浩)가 김수덕(金守德), 김선명(金善明), 임명애, 김창실(金昌實) 등과 더불어 시위를 계획하여 3월 26일 와석면 일 대에서 대대적인 시위를 벌였다.
만세시위가 격화되는 가운데 김웅권(金維權)등 과 함께 군내 월롱(月籠)ㆍ교하(交河)·아동(街洞)·조리(條理)면 등지의 시일 을 이용하여 군 전체가 봉기할 것을 모의하였다. 이에 따라 3월 27일 2천명의 시 위군중이 광탄면사무소 앞에 집결하여 독립만세를 외치며 대대적인 시위를 벌 였다.
시위대는 조리면 봉일천리(本日川里) 장터로 행진하여 그 곳에 있던 1천여 시위군중과 합세하여 봉일천 헌병주재소를 습격하는 등 격렬한 만세시위를 벌였 다. 이러한 시위를 주동한 후 중국 상해(上海)로 망명하여 상해농업전문학교여 적을 두고 신교육을 받으면서 상해임시정부에 참여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약 10년간의 임시정부 활동을 마감하고 국내에 돌아와서는 신간회(新幹會)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이후 파주군 광탄면에 광탄보통학교(廣灘普通學校)를 설립하고 그 교장에 취임하여 후진 양성을 위한 육영사업에 전념하였다.
정부에서는 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했으며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2019.8.15일 파주시 발간,165쪽>
*심상각 독립지사의 생애 기록 - 파주위키 참고
심상각 지사의 재조명
신산국민학교 부지 기증 분야
1.학교부지 기증 확인서(신산국교)
- 발행 : 신산국민학교장 (직인 날인)
-
일자 : 1988, 2. 22일
-
심상각 실제 사망일 : 1954.11.9일 (호적 및 보훈처 1969.3.7일)
2.학교부지 기증 확인서(파주교육청)
-
발행 : 파주교육장 (직인 날인)
-
일자 : 1988.3.3일
3.기증 확인서 분석
심상각 지사의 독립운동을 인정한 정부는 1977년에 대통령표창을, 1991년에는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국가보훈부 공훈록에는 1919년 3월 27일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고 임시정부에서 10년간 활동하다가 광복 후 귀국하여 후진양성을 위한 육영사업에 전념한 것으로 소개하고 있다.
국가보훈부 공훈록은 심상각의 아들 심정택이 1988년부터 2년간 준비하여 제출한 공적심사 내용을 요약했다. 이 중 육영사업은 광탄보통학교 교장으로 취임하고 학교 부지를 기증한 확인서를 참고한 것으로 보인다.
독립유공 공적심사 신청서에 첨부된 확인서는 1988.2.22일 신산국민학교 교장(1번 확인서)과 1988.3.3일 파주교육장(2번 확인서)이 발행했다.
'1번 확인서'에 따르면 광탄면 신산리 33-1번지외 5필지 토지 중 일부를 희사하였고, 이 사실은 심상각이 사망하고 지사의 장례식에 참석한 당시 교장의 조사서를 참고했다고 기록했다. 심상각은 실제 1954.11.9일(공부상 1969.3.7일) 사망한 것으로 보아 장례식에 참석했던 교장은 34년 후 '1번 확인서'를 작성할 때 증언한 것으로 보인다.
파주군교육청에서 발행한 '2번 확인서'는 신산국민학교 부지 12,662㎥ 중 일부를 기증한 것으로 기록하면서 해당 필지의 지번은 생략했다. 이는 '1번 확인서'를 근거로 작성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2번 확인서'에 기록된 "현재 신산국민학교 부지 12,662㎥ 중 일부를 기증"이라는 표현은 당시 신산국민학교 전체 필지와 면적이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심정택이 독립유공자로 신청할 당시에 부친 심상각이 기증한 토지 지번과 면적을 정확하게 알지 못하여 포괄적으로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
'1번 확인서'에서 명시한 신산국민학교 부지 전체는 6개 필지이다. 2025년 현재 이 필지들은 광탄면 신산리 199번지로 통합됐다. 통합 이전의 과거 필지는 파주시에서 별도로 관리하고 있으며 일제가 1918년에 마친 토지조사부는 국가기록원에 보관되어 있다.
파주시 공부자료를 확인하면 신산국민학교 부지 6필지에 대한 소유권이 1962년부터 1974년까지 파주군교육청 또는 파주군으로 이전됐다. 이중 5필지는 심상각이 아닌 오세남 등 다른 개인이 전소유자이고 신산리 33-1번지 1필지만 1961년 국가가 소유한 것으로 나타난다.
그렇지만 신산국교 부지중 신산리 201-1번지 1필지는 일제가 조사한 토지조사부에 심상각과 심경섭이 공동 소유자로 기록되어있다. 이는 해당 토지를 신산국교에 기증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지만 기증되기 전 마지막 소유자가 오세남이라는 것이 문제로 부각된다.
이 토지를 심상각이 공동소유의 토지를 기증한 것으로 증명되기 위해서는 토지조사후 명의가 등기로 확정된 것과 1962년 오세남에게 소유권이 이전된 과정에 대한 조사가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2025.3.25일]
신산국교 토지 소유자 현황(1988년 기준)
기증번지 |
면적(평) |
1918년 조선총독부 토지조사부-연번 (국가기록원 자료) |
토지대장 소유자 |
소유자이전 |
33-1 |
임야 1,414 |
자료없음 |
국가(1961년) |
파주군교육청(1965년) |
198-1 |
전 680 |
자료없음 |
윤덕원,우유두(1961년) |
파주군교육청(1965년) |
200 |
답 210 |
김홍식(1913년)-82 |
조용환외12명(1964년) |
파주군교육청(1964년) |
201-1 |
전 1,152 |
심상각+심경섭-84 |
오세남(1962년) |
파주군교육청(1962년) |
201-6 |
대 127 |
자료없음 |
우수호(1964년) |
파주군(1965년) |
204-1 |
대 656 |
자료없음 |
조용환외 12명(1962) |
파주군교육청 (1974년) |
4. 과거 등기부 확인
독립유공자 신청서에 첨부된 기증 관련 확인서를 근거로 파주시에서 관리하고 있는 토지대장으로 소유자를 분석했다. 그 중에 신산리 201-1번지는 1918년 작성된 토지조사부에 심상각과 심경섭이 공동소유한 것으로 확인됐다. 해당 토지가 1962년에 파주군교육청으로 이전될 때에는 소유자가 오세남이었다.
최근 인터넷등기소 홈페이지가 개편되면서 폐쇄등기 이미지를 제공하는 서비스가 신설됐다. 종전에는 몇 일전에 사전 예약 신청하고 해당 등기소에서 수령하는 방식이었으나 신설된 서비스는 인터넷에서 즉시 발급된다.
인터넷등기소에서 발급한 신산리 201-1번지의 폐쇄등기에는 최종 소유자가 오세남이고 1963년12월30일 파주군 교육청에 기부된 것으로 나타난다. 1964년 4월14일 등기 이전이 완료됐다.
이 폐쇄등기는 오세인의 부친이 사망해 1949년 3월22일 호주상속을 통해 1949년 4월4일 (단기 4282년)에 등기부가 처음 만들어 졌다. 그후 1963년 3월27일 호주상속으로 오세남에게 이전되고 그 다음해에 파주군 교육청에 기부된 것으로 나타난다.
1918년에 조사된 심상각의 토지가 오세인의 명의로 변경된 과정은 알 수 없다. 그렇지만 신산국민학교가 1926년4월7일 개교될 당시 이 토지가 학교부지에 포함됐다면 오세인으로 명의가 변경되지 않았을 것이다.
이런 정황을 보면 심상각의 소유이었던 토지가 매매 등을 통해 이전되고 오세남이 파주군교육청에 기증한 것으로 나타난다.
이 토지에 대하여 등기 또는 토지대장 등의 공공기관의 문서를 보면 신산국민학교 토지 6개의 지번 중에 토지대장과 등기에는 심상각의 이름이 존재하지 않아 기증자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신산리 33-1번지는 임야로서 국유지로 회복등기가 됐다. 혹시 심상각이 기증한 학교부지여서 국유지로 남아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할 수 있다.
파주시에서 발급한 (구)임야대장에는 신산리 33-1번지가 1964.12.30일 유정희외 6인으로 회복등기됐다. 1979.3.20일에는 국(국방부)외 1인으로 소유자가 변경되었다.
신산리 33-1번지의 기증자를 명확히 파악하기 위해서는 1964년 회복등기 이전의 소유권 변동 관계에 대한 추가 조사가 필요하다. 다만 현재의 공부상에서는 심상각이 기증자이라는 것을 증명할 수는 없다.[2025.3.28.]
신산국민학교 부지 신산리 201-1번지 폐쇄등기부
- 발행 : 인터넷등기소
- 내용 : 신산리 201-1번지의 소유자 변동 사항
5.학교보관 기증문서 확인
과거 폐쇄된 등기부 등본에서 심상각 이름을 발견할 수 없었다. 등기에 나타나지 않아도 당시 기증과 관련된 내부 문서가 파주교육지원청에 보관되어 있을 것으로 추측됐다.
2025.3.31일 정부 정보공개포털에서 파주교육지원청에 정보공개를 신청했다. 공개 신청 문서는 신산초등학교 개교 이후 학교 부지에 관련하여 기증 또는 토지 지번 통합, 토지 기증 확인서 발급 내용 등의 문서를 포함했다.
파주교육지원청에서는 관할 신산초등학교에 공개신청서를 이첩했고 2025.4.1일 신산초등학교를 방문하여 재산관리대장을 열람했다. 학교 측에는 재산관리대장 이외의 토지와 관련된 문서는 보관하고 있지 않았다.
재산관리대장은 주로 1960년대 이후부터 관리되었고 그 중에 토지의 소유권보존, 매입, 기부채납의 연혁이 있는 것을 중점적으로 분석했다.
학교 부지 자료 중에 1968년대에 5천여평의 운동장을 조성하면서 매입하거나 기부채납 받은 토지를 발견할 수 있었다.
이 토지들은 심상각이 사망한 1954년 이후에 소유권이 이전된 것으로 이번 조사와는 관련이 없다고 판단된다. 기증이 발생한 시기가 1910년부터 1960년 이전의 관련 서류이어야 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당시 일제가 작성하거나 해방 이후 작성된 문서는 한국전쟁시 소실될 수 있어 사실상 확인이 어렵다고 본다.[2025.4.1.]
재산관리대장 토지변동 내역
지번 |
지목 및 면적(평) |
전 소유자 |
등기이전 사유 |
등기일자 |
용도 |
33-1 |
대 1331 |
파주군교육청 |
소유권보존 |
1966.1.17 |
교지 |
34-6 |
대 65 |
정영철 |
매입 |
1971.4.1 |
사택 |
34-7 |
잡종지 74 |
파주군교육청 |
소유권보존 |
1979.4.27 |
도로 |
201-1 |
대 93 |
오세남 |
기부채납 |
1964.4.14 |
교지 |
198-1 |
대 690 |
파주군교육청 |
소유권보존 |
1965.10월 |
체육장 |
207-1 |
답 1063 |
박해룡 |
매입 |
1968.10.5 |
체육장 |
207-2 |
답 267 |
박해룡 |
기부채납 |
1968.6.18 |
체육장 |
207-3 |
답 389 |
박해룡 |
기부채납 |
1968.6.18 |
체육장 |
208 |
답 872 |
박점필 |
기부채납 |
1668.6.18 |
체육장 |
205-1 |
답 1097 |
김대변 |
매입 |
1968.10.5 |
체육장 |
206-2 |
답 522 |
김대변 |
매입 |
1968.10.5 |
체육장 |
209 |
답 1140 |
우봉호 |
매입 |
1968.12.4 |
체육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