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주를 담은 시어들-김선희

지역의 아름다운 자연과 삶을 노래하다.

회화나무

0206Kimsh-hhtree.jpg

동패동 언덕에는 회화나무가 사백오 십 년째 산다.
아득히 멀고도 가까운 수많은 이야기를 품어
높다랗고 우람한 모습 앞에
작은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았다

6월의 핏빛 바람 자국
작은 잎사귀 옆옆이 세우며
사운거리는 입술엔 심학산 자락이
살짝 엿듣고

그랬노라 찬찬히 더듬는
하늘이 둘로 쪼개진 그 날의 기억
횃대에서 소리친 닭 울음소리에 묻혀버린
아버지와 삼촌의 넋두리

촘촘한 잎맥 그물 사이로
붉은 끈으로 묶인 사람들 이야기를
검은 먹과 붓질로
잠시도 쉬지 않고 옹이에 박나보다

가지마다 하얀 꽃잎을 폴폴 풀어내고
겹겹이 쌓인 아픔을 벌겋게 달굼질 하니
숲가에 잇닿은 어둑한 무게에 눌려
우듬지 하나 툭 떨어져 나간다.

때론 실개천처럼 눕고 싶었을
까무룩 지우고 싶은 마음 곤두서지만
추슬러 질곡의 소용돌이에 초록을 담가
닿소리 홀소리로 낱낱이 새긴 그 기록
나이테에 감은 채
화해의 오롯한 새길을
초연히 열어가고 있다

구두수선공

0206구두수선5.jpeg

비가 휘적거리며 내리는 오후
빨간 우체국 앞 구두수선집
그 낮은 문 열려있다.

등허리를 굽히고 간이역 의자처럼
쪽마루에 간신히 궁둥이를 붙이면
장인인 구두 수선공
활짝 미소 짓는다

앞부리가 다 까진
뒷굽마저 닳아빠진 구두 한 켤레
이리저리 살피다 히죽
구두 주인의 형편을 눈치챈 듯

어릴 적 앓은 소아마비
한쪽 허벅지는 가느다래
반대쪽 허벅지에 낡은 신를 대고
밤색 끌로 사알살 구두를 달랜다

창칼로 구두선 둥글게 맞추며
오로지 이 작은 이동 컨테이너 속
여여한 시각에 입맞춤하며
긴 날들을 보냈으리

주름진 입술도 합 모아 오그라든 것처럼
그가 지나다니던 나날들은
수선해야 할 손님 구두보다
더 낡아있지 않을까

홀까닥 속창과 겉창이 뒤집어지며
서로 걸어온 길을 수선하듯
굵게 솟아오른 푸른 힘줄
검붉게 튀어오르고
궁글려지는 손목
불끈 솟아오른다

본 작품은 금촌의 실제 구두수선공을 소재로 했다 

사라진 골목길

0206Ksh새말.png

지그재그 낮익은 길
일제히 뿜어져 나오는 연둣빛 사이로
사람 나간 허물어진 집에
봄이 들어앉았다.
 
한 때 살림살이 맷돌 빨래방망이 놔둔 채
댓돌 아래 공깃돌 뒹구는데
박태기나무 알알이 진분홍
꽃그늘 그림자 흔들어댄다
 
무겁고 아릿함 들춰내는
낡은 슬레이트 지붕
처마 밑 겅중겅중 내리꽂히는 발걸음 
저절로 어깨 수그리며 지날 때
                          
지난 가을 푸르렀던 잎새 검게 물들고
검불에 걸린 낙엽 함께 뒹구는데
하얀 기억은 향내를 피우며 되살아난다.

복숭앗빛 손톱엔 어린 시절
꽃이 말하던 표정 그대로
나뭇잎이 재잘대며 들려주던 정다운 이야기
수런수런 고스란히 말개진다

다가오는 소란스러운 굴착기소리
낮선 작업 현장 차마 바라볼 용기
절레절레 고개 흔들며
검은 흙에 파묻고 싶다

아련한 기억
낡은 대문간에 놓아둔 채
쓰리도록 스산한 가슴 안고
자꾸만 뒤돌아보며 주춤주춤
빠져나온다

이 글은 금촌역 북편의 새말을 소재로 했다 

초발심

ksh초발심.jpg

팔작지붕 붉은빛 세월 기리고

천 년 동안 단백 밑에서

바람결에 풍탁이 읆조릴때

면 눈빛이 처음을 밝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