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ip to main content

용상사와 거란전쟁

0205용상사.jpg *사진 : 용상사 대웅전 2013.12.15일 / 파주위키-

다음은 용상사에 대하여 이야기를 이어가고자 한다용상사를 언급하려면 먼저 고려와 거란전쟁을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고려와 거란 사이 세 차례에 걸쳐 벌어진 전쟁이다.

1차 고려와 거란전쟁은 993(성종 12거란(요나라)의 소손녕이 약 80만 명의 대군을 이끌고 고려를 침공하였다그러나 서희의 담판으로 오히려 강동 6주를 회복 설치하고 그 영토를 압록강까지 확장하였다이 전쟁은 고려와 송나라와의 관계를 단절시키고 요가 고려와 교류하려는 목적이 깔려있었다물론 요가 송을 치려는데 고려를 크게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그러나 고려는 요나라와 약조한 것과는 달리 비공식적으로 송나라와 계속 교류하여 재침략의 빌미가 되었다.

 2차 전쟁은 1010(현종 1요의 성왕이 직접 40만 대군을 이끌고 고려를 침략했다강조의 정변에 그 잘못을 묻는다는 구실로 침공해왔으나고려와 송나라와의 교류를 완전히 끊고 고려와 요와의 관계를 재확인시키면서 강동 6주를 되찾으려는 목적이 있었다거란은 개경까지 점령하여 항복론까지 거세졌으나 강감찬의 반대로 현종은 나주로 피신했다그 후 화친을 요구하여 고려 현종이 친조한다는 조건으로 거란은 물러갔다.

 3차 전쟁은 개경에 돌아온 현종이 요에 친조하지 않았음은 물론 강동 6주 반환 요청에도 응하지 않고도리어 1013년 거란과의 국교를 끊고 송나라와 다시 교류함으로써 1018년 소배압이 이끄는 10만 대군으로 다시 고려를 침공하였다소배압은 개경 인근까지 접근했으나 강감찬의 귀주대첩 등 승전으로 몇 천 명의 생존자만을 데리고 물러갔다. (고려 – 거란 제1, 2, 3차 전쟁은 위키백과를 참조함)

 세 차례에 걸친 고려와 거란의 전쟁을 통하여 현종은 나주로 피신하였고 그 전후에도 피신하였는데 그 때 잠시 머물던 곳이 월롱산성이 위치하고 개경에서 가까운 용상골이었다당시 피란하여 임시 거처로 추정되는 궁밭이라는 지명이 지금까지도 구전된다.

 용상사에 대하여는 일단 사찰 내에 있는 현판 내용을 그대로 쓴다용상사는 월롱산 남쪽 사면 중턱에 위치한다성종 12(993), 현종 1(1010), 현종 9(1018)에 소배압이 거느린 40만의 거란군이 개경까지 쳐들어오게 되자 현종은 민간인 차림으로 이곳 월롱산까지 피신하게 되었다다행히 강감찬이 귀주에서 승리하면서 나라 안이 평정되자 현종은 환궁하면서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절을 짓게 하고는 임금이 머물렀다는 뜻으로 용상사라 이름 지었다고 한다

그 뒤 덕은화주(德隱化主)가 세종 27(1445)에 중건하였으며이때 소불석상(小佛石像)을 인근 벽장굴에 조성해 봉안하였다임진왜란 때는 승병의 도량이 되었는데왜군의 시체가 근처 골짜기에 가득하여 한때는 무덤골이라 불리기도 했다

이후 조선 후기까지의 연혁은 전해지지 않으나, 1530년 편찬한 『신증동국여지승람 新增東國輿地勝覽』에 절 이름이 보이고 있고, 1799년에 편찬한 『범우고』에 보면 절이 지금은 없어졌다라는 말이 있어 임진왜란 이후 어느 때인가 폐사된 것으로 생각된다근대에는 1926년에 정염스님이 폐허가 된 절터에 사찰을 중건하였으나한국전쟁으로 폐허가 되었다

현재의 용상사는 옛터에서 약간 아래쪽에 터를 닦아 해방 전에 중건되었고벽장굴에 있던 석불을 대웅전에 모시게 되었다. 1967년 대웅전을 다시 개축하면서 서쪽에 삼성각(三聖閣)을 신축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는데소속은 대한불교 일승종(一乘宗)이다

정통십년명석불좌상 (正統十年銘石佛坐像)은 높이 61센티미터에 폭이 50센티미터 정도인 소형불좌상이다석불의 전면에는 회칠이 되어 있어 세부적인 특징을 자세히 관찰하기는 어려우나 목이 짧고 직사각형의 모난 얼굴에 육계가 두툼하다바닥에는正統十年 乙丑五月oo德隱이라 새겨져 있어 덕은에 의해 용상사가 중창될 때 조성된 것으로 보이며 이 조성연대는 1445년으로 조선 초기의 불상양식을 이해하는데 귀중한 자료이다.

 여기서 절이 없어졌다라고 기술되어 있는데 고려 현종과 관련하여 이룩한 사찰인 용상사는 현재의 위치가 아님을 몇 가지로 확인 할 수 있다첫 번째는 필자가 직접 겪은 일을 피력해 보겠다. 1980년대 초 현 용상사에서 동남쪽으로 400여 미터 지점에 박모씨 가족이 살았다

그의 부친이 돌아가셔서 현 배수지자리에 묘를 쓰기 위하여 땅을 팠는데돌약탕관과 청호리병이 각각 한 점씩 발굴되었다그 물건이 역사적 자료가 되지 않을까 해서 파주군 공보실을 거쳐 당시 문화재관리국에 보고했다얼마 후에 결과통지문을 받아보았는데, ‘고려시대 유물로서 특히 돌약탕관은 사찰에서 차를 끓일 때 쓰는 다관이며 청호리병은 당시 물을 담는 용기로 쓰였으나 질은 좀 떨어지는 물건이라는 내용이었다.

0205배수지.jpg

*사진 : 용상골의 배수지 전경

두 번째는 2010년 월롱산 배수지를 설치하면서 국방문화재연구원에서 문화재시굴조사를 한 결과 고려시대의 유물이 출토되면서 절터라고 보고된 바 있다이 외는 빈대가 많아 폐사되었다고 하는 설과 유생들이 못살게 굴어 폐사하였다는 설이 전해 내려오기도 한다어쨌든 월롱산 배수지 자리가 현종이 환궁하면서 기념으로 짓도록 한 절터로 추정된다.

 현판에 용상사가 승병의 도량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다용상사 바로 뒤 월롱산성 정상에서 LG디스플레이 쪽으로는 지형이 약간 비스듬하게 펼쳐져 있어서 옛날에는 승병들의 훈련장이었다고 한다말을 타고 훈련하기도 했는데사망자가 발생하면 무덤골에 매장했다또 임진왜란 당시 왜군의 시체가 많았다고 한다그래서 그런지 몇 십 년 전만 하더라도 월롱산과 기간봉 사이로 난 길을 따라 금승리 쪽으로 가다 보면 오른편에 낙엽송이 무성하게 자라 숲을 이룬 것을 볼 수 있었다

무덤골이라는 명칭과 무관하지 않은 듯하다승병의 지휘본부는 현재는 채석으로 절벽이 되었지만바래미산 뒤쪽에 있던 병무관(兵武館)이라고 한다


내가 월롱국민학교 다닐 때인 1960년 초 부터 친구들과 병무관을 여러 번 다녔다약수도 있고산중턱에 부처님이 모셔져 있어서 많은 사람들이 불공을 드리러 오는 걸 자주 보았다나는 떡이나 과일을 얻어먹고 바로 산 넘어 용상사 쪽으로 해서 집에 오곤 했는데지금 생각해도 병무관이라는 명칭에서나 규모 등으로 봐서 승병 도량으로 활용하기에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