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이전(1~20회)
신산초등학교는 1926년 개교하였지만 1950년 한국전쟁으로 졸업 명부가 소실되어 졸업생 명단 및 학생수도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100년사 편찬위원회는 모교 출신 선후배 부모 및 지인들을 통하여 졸업생 명단을 확보했다. 일부 확보된 명단의 졸업 기수는 연령 및 지인들의 기억으로 오류가 있을 수 있다.
졸업 기수 몇 졸업생 명단
제1회 조수천, 양재동, 김상원, 김영택
제2회 김경배
제3회 김형욱,김기성
제4회 김형욱
제6회 심세택 , 심재웅
제8회 안도승
제9회 박용학
제11회 최영덕
제12회 최경안
제13회 박용설, 이영복, 신종순, 김재성
제14회 우광호,박태영, 허경행 ,김응수 , 이영준 ,박용관 , 김성해,김대섭, 이달우
제16회 김순녀
제17회 이강직, 우세호
제18회 이수호,최봉순,이봉희,박선재 최정숙,이근찬,구덕회
제19회 심민택, 우대호, 김영식, 김진섭,김봉선,김정환
제20회 우전호 박수동, 조남성, 노건현, 한문석
(전체 48명)
기억나는 그때
만장산을 넘어 다녔던 6년간의 추억
이봉희 (제18회)
나는 송라동에서 경제적으로 어렵지 않은 전주이씨 대종가집에서 1932년에 태어났고 남들보다 1살 늦은 9살인 1939년에 신산국민학교에 입학을 했습니다. 당시 학교는 지금의 광탄중.고등학교 자리에 위치 했었습니다.
등굣길은 지름길인 만장산을 넘어 만장산 약수터를 지나는 산길을 이용 했습니다. 같은 마을사는 박선재,이수호와 함께 6년간 걸어서 다녔습니다. 겨울에는 추위를 피하기 위하여 만장산 바위틈에서 쉬다가곤 했었습니다.
당시의 신산초등학교 교정은 모양새가 이뿐 벚나무가 많았고 주변 사람들이 파주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했습니다.
나는 산수와 체육을 잘했습니다
특히 달리기를 잘해서 학교에 선생님들 보다도 잘 달렸으며 검전리 사는 최정숙이와 함께 학교 대표로 문산에서 개최된 파주군 학생 체육대회에 단거리 학교 대표로 출전하여서 다른 학교 학생들과 경쟁을 해서도 늘 1등을 했습니다. 그 당시 계주 경기에 썼던 바톤은 병에다가 짚을 넣은 것으로 사용 했습니다
문산까지 경기에 참가하기 위해서 오고갈 때는 차가 없어서 그 먼길을 광탄서 걸어서 다녀 왔습니다
그 당시에는 회충약이 없어서 학교에서 선생님들이 회충약 대용으로 풀을 띁어서 큰 가마솥에 넣고 고아서 학생들에게 한 컵씩 먹게 하였는데 먹기 싫어서 도망가는 학생들도 있었습니다.
소풍은 소령원, 용암사, 공릉,그리고 마장리 이씨 집안 사당으로 갔는데 소풍가는 날 어머니가 전날 쌀을 물에 담근후 절구에 찌어서 떡을 해줘서 선생님들에게 드리고 친구들과 나누어 먹었던 좋은 추억이 있었습니다.
지금으로 보면 축제 같은 학교 행사가 있었는데 당시 전교생 모두가 가위,바위,보를 해서 승부를 결정짓는 게임을 했는데 7번인가 8번을 연속해서 이겨서 상품으로 당시에는 아주 귀한 운동화를 선물 받아서 처음으로 운동화를 신어 봤습니다
초등학교 다닌 때 위생적으로 많이 열악했던 시기이라 여러번의 학질로 많은 고생을 했었는데 학질에 좋다고 해서 우물가에서 별 효과는 없었던 쥐며느리라는 벌레를 잡아먹기도 했어요
겨울이 되면 선생님들과 함께 전교생이 만장산에 올라가서 토끼 사냥을 한 것이 큰 즐거움이었어요
초등학교 2학년 부터는 어린 나이임에도 방축리 등으로 거머리가 뜯기는 어려움 속에 모내기를 하고 보리 베기등에 동원되기도 했습니다
지금 시대 같으면 아동학대라고 할 정도 었어요
일제 말기라 모두가 살기 어려웠기에 도시락 싸오지 못하는 학생들이 많았으며 겨울에 난로 피우기 위해 장작들도 학생들이 산에 가서 해서 학교로 가져오곤 햇습니다
그래도 학교에는 오르간도 있어서 음악시간에는 오르간에 맞추서 노래부르는 것이 재미 있었습니다
신산초등학교 당시의 교가는 학도가라는 곡에 “아세 아세 동방아세~”형식으로 작사를 한 교가를 열심히 불렀던 기억이 납니다
그 당시 선생님으로는 우리 오빠인 이용희 선생님,김동해 선생님, 그리고 담임을 하셨던 두만동에 사사셨던 박선생님이 기억 납니다
학교 생활은 일제 시대라 행진도 절도 있게 해야 했고 줄 맞추어 걸었고 교칙도 엄해서 학교에 오면 외출도 할 수 없는 데도 불구하고 학교에서 정한 기본 규칙을 잘지켰으며 6년동안 하루도 빠지지 않고 개근을 하며
1944년 1월에 졸업을 하였습니다
졸업후 남자 동창들른 최근 까지도 동창들 모임을 유지하였으나 몇 명 안되는 여자동창들은 안타깝게도 동창모임을 한번도 함께하지 못한 것이 아쉽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