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 속에서 피어난 추억들 - 24회 서영우
해방 후에 신산초등학교에 입학했는데, 당시 초등학교는 일제 시대부터 있던 만장산 아래 지금의 광탄중·고등학교 자리에 위치해 있었다.
6.25 전쟁이 발발하자 초등학교에 인민군들이 주둔하게 되어, 우리 3학년만 면사무소 뒤 과거 양조장 터에 있던 광탄면사무소 소유의 일자형 창고로 옮겨 휴전될 때까지 공부했다.
그 후 다른 학년이 천막을 치고 재실에서 공부하고 있던 윤관장군 묘로 옮긴 후, 몇 년 후 다시 광탄농업협동조합 하나로 마트 쪽으로 학교를 옮긴 후 졸업했다.
휴전이 되고 일정 기간이 지난 후 미군의 도움으로 지금의 신산초등학교 자리로 학교를 옮기게 되었다. 6학년 때는 오후에 광탄삼거리를 지나 새롭게 학교를 신축하는 장소까지 걸어가서 흙과 자갈과 벽돌을 나르는 등 공사현장에 투입되어 많은 일을 했다.
6.25 전쟁 후 만장산 아래 초등학교에 인민군들이 거주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아침 우리나라 전투기가 만장산 넘어서 날아와 인민군들을 공격하기 위해 일자형 건물인 초등학교 건물 양쪽에 휘발유 통 2개를 떨어뜨려 순식간에 학교 건물이 불에 타는 것을 목격했다. 그 당시 학교는 학생도 없고 선생님들도 모두 피난 가고 인민군들만 있어서 불을 끌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소풍 갈 때 친구들과 줄을 서서 걸어가고 있었는데 미군들이 키우던 큰 개가 달려들어 우리를 공격하려고 했다. 주변에서 지켜보던 어른이 뛰어서 도망가면 위험하니 가만히 있으라고 했다. 친구들은 모두 도망갔으나 나만 서 있었는데 개가 나를 물었고 동시에 놀라서 넘어졌다. 넘어지며 나무 꼬챙이에 엉덩이를 찔려 몇 달간 고생했던 초등학교 시절의 힘들고 안 좋은 추억이 생각난다.
초등학교 때는 왜 그랬는지 모르지만 동네끼리 패싸움을 심하게 했다. 특히 신산리, 새술막, 화산 3동네 학생들끼리 학교 가는 길목을 막아놓고 많이 싸웠다. 그 당시에는 남의 동네도 함부로 가지 못했다. 자기 동네에 타 동네 아이들이 오면 함께 혼내 주었던 안 좋은 문화가 있었던 것 같다.
선생님들은 열악한 교육환경 속에서도 열심히 가르쳐 주셨는데, 한 가지 안타까운 것은 그 당시 어린 학생들이 감당하기 버거울 정도로 체벌이 심했다. 학생 인권을 중요시하지 않았던 시대였지만, 소래울쪽에 살고 계셨던 이○○ 선생님이 보리수나무 회초리를 여러 개 가지고 다니면서 머리에서 피가 날 정도로 지나치게 체벌을 하여 지금까지도 우리 24회 동창들이 만나면 그 선생님을 잊지 않고 많이 아쉬워한다.
6.25 전쟁 기간에는 인민군이 이북으로 올라가면 수업하고 다시 내려오면 수업을 못하는 상황이 반복되었다. 교실은 천막을 치고, 책상은 탄피 상자, 책가방은 보자기를 사용했다. 겨울에는 학생들이 반별로 집에서 장작을 가져다 난로를 때며 어렵게 학교생활을 하여 24회는 40명이 졸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