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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격 속에서 이어진 동창들의 우정 - 25회 이주형

우리 집안은 성종 대왕 아들 후손으로 17대째 500여 년간 광탄에 살고 있다. 육이오 전쟁 전에는 새술막에 살았는데, 1.4후퇴 때 광탄에서 가장 큰 마을 중 하나였던 새술막이 폭격으로 우리 집을 포함해 모두 불에 타서 전주이씨 집성촌인 이웃 마을 외화산으로 이사를 가서 지금까지 살고 있다.

육이오 전쟁 전에 신산초등학교에 입학했는데, 당시 초등학교 위치는 만장산 아래 지금의 광탄중·고등학교 자리에 있었다. 그후 육이오 전쟁으로 학교에 인민군들이 상주하게 되어 분수리에 위치한 윤관장군묘재실로 옮긴 후 몇 년 후 다시 광탄농업협동조합 하나로 마트 쪽으로 학교를 옮겼다.

휴전이 되고 일정 기간이 지난 후 미군의 도움으로 지금의 신산초등학교 자리로 학교를 옮긴 후 졸업을 하게 되었다. 새술막에서 학교 다닐 때는 지금의 1사단 전진성당과 광탄테니스장을 지나 만장산 아래 학교까지 걸어 다녔다. 윤관장군 묘에서는 천막과 재실에서 공부를 했으며 친구들과 밤나무에 올라가서 놀곤 했다.

광탄 농협 하나로 마트 쪽 넓은 공터에 천막을 치고 공부할 시기에 미군들이 중장비를 이용해 만들어 놓은 넓지 않은 공터에서 운동회를 했는데, 선생님들께서 청솔가지를 엮어서 개선문을 만들어 놓고 줄다리기, 계주 등 여러 종목의 경기를 했다. 소풍은 고학년은 보광사로 갔고 저학년은 소령원과 공릉으로 걸어서 갔다.

휴전 후 일정 기간이 지난 후 지금의 초등학교 자리로 옮겼을 때는 처음에는 천막 치고 공부를 하였고 미군 공병대의 지원으로 학교 건물을 짓게 되었다. 학교를 짓느라 고학년은 오전 수업만 하고 오후에는 공사현장에서 벽돌과 자갈을 나르는 등 모두가 함께 늦게까지 일을 했다. 얼마나 일을 많이 했으면 그 당시 "신산국민학교 졸업하면 노무자 부대인 103연대 중대장은 할 수 있다"라고 우스갯소리를 하곤 했었다.

어려운 시기다 보니 도시락을 못 가져오는 친구들이 반이 넘었다. 그래서 대부분 굶고 생활을 했는데 지금의 초등학교 자리에서 공부할 때는 미국의 지원으로 분유를 나누어 주어 집에 가져가서 먹었다.

우리 25회는 2개 반 65명이 졸업을 했는데 나이가 나보다 한두 살 많은 것은 보통이고 5살 많은 동창들도 있었다. 나는 초등학교만 졸업했어도 광탄농업협동조합 조합장, 새마을협의회 파주시회장, 신산초등학교 총동문회장 등 많은 직을 맡았다.

어려운 직을 맡아서 큰 어려움 없이 그 직을 원만하게 수행한 것은 열악한 교육환경 속에서도 방과 후에도 남아서 공부를 시키는 등 열정을 가지고 우리를 지도해주신 그 당시 선생님들이 계셨기 때문이라고 본다. 기억나는 선생님은 김성해 선생님, 윤장현 선생님, 김학수 선생님, 심영택 선생님이다. 생존해 계시지는 않는 분들이지만 우리 선생님들에게 존경과 깊은 감사를 드린다.

초등학교 졸업 후 18년간 열과 성을 가지고 25회 동창회장을 했었고 그 덕분에 지금도 우리 25회는 동창회 모임을 하면 20명 정도는 항상 모여 옛 이야기로 정담 나누는 귀중한 시간을 이어가고 있다. 25회 동창회 총무를 18년간 맡아서 함께 해준 두만동에 살았던 朴來玉 동창의 수고에 고맙고 감사한 마음을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