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년시절을 꿈에 담다 - 신산초42회 권오순
6월의 핑크빛 장미가 흐드러지게 피고 내 고향 청포도가 익어 간다는 7월이 멀지 않았음에 세월은 벌써 올해도 반년을 훌쩍 넘어서고 있나 봅니다.
내 어릴 적 유년 시절의 꿈이 묻어있던 고향을 떠나온 지 벌써 54년.
멀지 않은 날 칠십을 바라보며 회한과 그리움이 가득히 밀려오는 아스라한 기억들∼∼∼
이즈음에 어릴 적 꿈이 묻어있던 나의 모교가 어느새 탄생 100주년이 되었다는 소식에 가슴이 벅차고 만감이 스쳐 가는 추억의 기억들. 지금 그 희미해진 기억들을 더듬으며 미약하나마 몇 글자 옮겨 봅니다.
우리 집은 내가 입학했던 신산초교 바로 정문 앞이어서(지금은 아마도 후문) 말 그대로 엎어지면 코가 닿을 곳이었지요.
아주 조그마한 꼬맹이가 가슴에 손수건 하나 매달고 그 어린 꼬맹이를 친정 아버지께서는 자주 때때로 업어서 등교를 시켜 주시곤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엄마는 한 번도 안 해주신 걸로 기억하는데 아버지께서는 매번 해 주셨지요.
그래도 나는 엄마가 더 좋았습니다.
지금은 그 아버지 어머니는 아주 오래전 하늘의 별이 되셨고 그 시절은 자동차가 아주아주 귀한 때라 마장리 높은 고개를 넘고 넘어서, 서래울 산길을 걷고 걸어서, 새술막에서, 보육원에서, 내화산과 외화산 등에서. 그 울퉁불퉁한 흙길들을 따라서 광탄까지 등하교 했던 친구들이 참으로 많이 있었습니다.
어른이 되어서 지금 생각해 보니 그 아이들이 참말로 대단했던 친구들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 시절 여름은 왜 그리 더웠고 겨울은 왜 그리도 모질게 춥기만 했는지요. 처마 끝에 매달린 고드름은 왜 그리도 달고 맛있었는지 모를 일이었지요. . . . . . . . .
처마 끝에 매달린 고드름을 따 먹던 사내 녀석들의 코에서는 누∼∼런 콧물이 질질 흘렀고 그 콧물을 스∼욱 닦고 또 스∼욱 닦고∼∼ 그러고 나면 두세 번 걷어 올린 옷 소매가 반들반들 그 시절이 그랬답니다.
우리 모두는 그 시절을 함께 울고 웃으며 동시대를 살았지요♥♥♥
생각해 보니 다시 올 수 없는 소중한 추억 그래서 더 애틋하고 아련한가 봅니다.
나는 항상 키가 작아서 언제나 학교에서 맨 앞줄에 앉아야만 했지요.
지금 생각해 보니 그래도 그 시절 통신표에 '수'는 없었어도 '우'와 '미'가 있었고 키는 작아도 똑똑하다는 선생님의 칭찬 글이 실려 있었던 기억이 나네요. 그때 그 칭찬이 먼 훗날 나에게 있어서 커다란 울림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2500명 정도 되었던 시골 학교에 학생 수가 너무 많아 오전 오후반으로 나누어 수업했고 지금도 나는 자랑스럽게 이야기하곤 합니다. 한 반에 60명 정도 있었던 것 같았는데 나는 27∼28등 정도 했던 기억이 나네요.
어떻게 이처럼 많은 학생들이 있었을까 참 신기하기도 하고 그 시절은 산아 제한이 없던 터라 그랬나 싶기도 하네요. 어쨌든 그 역시도 대단히 자랑스러웠지요.
아마도 김진숙 선생님이 담임이었던 걸로 기억이 나는데 국어 시간이면 뺏어 읽기를 자주 했지요. 한 사람이 쭈∼욱 읽어 내려가다 철자가 틀리면 뺏어서 거기부터 다시 읽어 내려가는 방식이었지요.
나는 그 뺏어 읽기를 아주 잘했던 걸로 기억합니다.
그래서 그 국어 시간이 그렇게 재미있을 수가 없었지요.
4∼5학년 때인가 우리가 다녔던 학교는 운동장이 엄청 넓었고 가장자리에 스탠드를 만드는 바람에 우리 학생들이 돌과 흙을 날랐던 기억이 납니다. 지금은 그 스탠드는 모두 사라지고 없는 것 같습니다.
유그 운동장에서 운동회 때면 상하 하얀 운동복을 입고 청군 백군 나누어서 오재미 게임과 줄다리기, 기마전, 바통터치 하는 릴레이 경기를 늦가을 더위가 더운 줄도 모르고 뛰고 놀았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공릉 소령원에 봄가을로 두 번씩 소풍을 갈 때면 힘든 줄도 모르고 한나절을 걸어서 다녔던 기억, 계란을 삶아가면 최고의 간식이었던 시절, 너무도 가난해서 그 계란조차도 삶아가지 못했던 그때 그 시절.
서울에서 계셨던 오라버니가 내려오시면 용돈을 주었던 기억이 있어서 소풍 때만 되면 그 오라버니를 밤이 새도록 기다렸지요. 이제 나는 늙은 눈빛으로 그때를 돌이켜 보노라니 새삼 눈물이 그렁그렁하네요.
그래서 이 글을 쓰면서 잠시 울었습니다.
6학년 김인명 담임 선생님이 우리 집 뒷편 쪽에 방을 얻어서 자취하셨지요. 방과 후에 몇 명씩 짝을 이루어서 선생님 댁에 가서 시험 채점을 했던 기억이 있네요. 시험지 채점하는 선생님께 차출이 되면 우쭐해진 마음에 기분이 좋았던 기억도 있네요.
추운 겨울이 지나 쌀쌀한 초봄이 올 때쯤이면 어린 마음에 치마라는 걸 좀 입고 학교에 가고 싶었다. 가난했던 집에 뜨신 물이 있을 리 만무했던 시절이라 무릎에 때가 있었지요. 그 때를 가리려 내복을 무릎까지만 내리고 기어코 치마를 입었던 날씨만큼이나 쌀쌀했던 기억이 있지요.
그렇게 여섯 해를 보내고 졸업식 때 앨범값이 지금 돈으로 800원이었는데 그 돈이 없어서 사지 못한 친구들이 많았고 요행으로 나는 그래도 그 앨범을 살 수가 있었지요.
가끔씩 때때로 그 앨범 속 사진들을 보며 그리움을 찾게 해주는 귀하디귀한 800원.
늙어지면 추억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해질 수 있다지요∼∼
축구부까지 있었던 시골 아닌 시골학교 김선정 축구 선생님, 김청자 선생님, 키가 무지무지 크셨던 이진무 선생님 기억나는데 스승님들은 모두 하늘의 별이 되셨을까❓
발톱을 너무 바짝 깎아 며칠을 아리고 아팠다.
그 시절을 생각해 보니 그 발톱처럼 가슴이 아리고 시리다.
그처럼 많았던 친구들 지금은 어느 하늘 아래에서 멋진 노년의 삶을 살고들 있는지.
신산의 동문들이여❗
내년 4월 7일엔 모두 모여서 또 한 번 멋들어진 추억 한자락 만들어 보지 않으실래요❓
조그맣기만 했던 그 꼬맹이가 지금은 연천에서 오이꽃이며 가지꽃이며 고추꽃이며 텃밭을 친구처럼 남은 여생 한 줌의 소금이 되어 살고자 합니다.
자랑스러운 신산이여❗
희망찬 신산이여❗
영원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