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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와 용정을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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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두레 우물

이번 여행에서 내가 가장 가고 싶었던 곳을 간다. 물론 광복 80주년이기도 하지만, 윤동주 순국 80주기를 맞아 선생의 생가와 명동학교를 비롯하여 해란강, 용정 등 이름 없이 이국땅에서 조국 독립을 염원하며 스러져간 선구자들의 숨결이 느껴지고 있는 곳이다. 얼마 가지 않아 용정 시내가 나오고 용문교와 해란강을 지나는데 그냥 지나친다.

 역시 용두레우물도 길가에 조그맣게 표시되어 있는데 그도 지나친다. 아쉬었으나 어쩌랴. 윤동주 생가로 가는 도중 이곳이 과연 간도인가? 다른 곳과는 달리 농촌 풍경을 띠면서 어디서 많이 본 듯한 그림이었다. 조선인이 이주해 살아온 간도의 전형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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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두레 우물

용두레 우물은 1839년∼1880년 사이에 조선에서 온 장인석과 박인덕에 의해 발견되었다고 한다. 이 우물은 일찍이 여진족이 쓰던 우물로 물이 깊고 오가는 길손들이 두레박을 빌리는 일이 잦아 두레박 즉, 용두레를 한족과 조선족들이 해 놓아 그때부터 용두레 우물이라 부르게 되었다. 이 고장 이름도 용두레촌으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오늘날 연길이 중국 조선족의 행정과 소비의 중심이 되었지만, 조선족의 뿌리가 자라기 시작한 곳은 이곳 용정이라고 한다.

윤동주와 생가

윤동주의 생가가 있는 명동촌에 도착하니 마을 전체를 잘 보전하려 애쓴 느낌이 든다. 윤동주의 명성을 알고 중국 용정시 인민정부가 역사적 의의와 유래를 고려하여 이를 관광지로 지정하고 19948월 역사적 유물로서 윤동주 생가를 복원하였다. 윤동주 생가는 1900년 초 그의 조부인 윤하현이 이곳 명동촌에 지은 것으로 방 10간과 곳간이 달린 조선족 전통구조로 된 기와집이다. 윤동주는 1917930일 이 집에서 태어났다. 19324월에 윤동주가 은진중학교로 진학하게 되자 그의 조부는 솔가하여 용정으로 이사하고 이집은 매도하여 다른 사람이 살다가 1981년 허물어졌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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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 생가

생가 안팎으로 윤동주 시인의 모든 시를 대리석 등에 새겨 세웠는데 중국어로도 번역하여 같은 크기의 돌에 새겼다. 그 시가 정서적으로 제대로 번역되었는지는 모르겠으나 꽤 애쓴 것 같다.

병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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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

살구나무 그늘로 얼굴을 가리고, 병원 뒤뜰에 누워, 젊은 여자가 흰옷 아래로 하얀 다리를 드러내 놓고 일광욕을 한다.

한나절이 기울도록 가슴을 앓는다는 이 여자를 찾아오는 이, 나비 한 마리도 없다. 슬프지도 않은 살구나무 가지에는 바람조차 없다.

 나도 모를 아픔을 오래 참다 처음으로 이곳에 찾아왔다. 그러나 나의 늙은 의사는 젊은이의 병을 모른다.

나한테는 병이 없다고 한다. 이 지나친 시련, 이 지나친 피로, 나는 성내서는 안 된다.

 여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옷깃을 여미고 화단에서 금잔화 한 포기를 따 가슴에 꽂고 병실 안으로 사라진다.

나는 그 여자의 건강이―아니 내 건강도 속히 회복되기를 바라며 그가 누웠던 자리에 누워본다.

이숭원이 쓴 시평의 일부를 옮긴다.

사회는 거대한 병원이고 우리는 저마다 병을 앓고 있다. 어지러운 현실을 바라볼 때마다 마음 깊은 곳에서 울분이 치밀지만, 나약한 개인은 스스로 고통을 감내하며 살아간다. 이러한 공간에서 윤동주가 발견한 희망의 씨앗은 일상 속의 작은 위로와 연민이다. 금잔화 한 포기가 주는 소박한 위로, 동질적인 사람들 사이에서 느끼는 연민이 삭막한 세상을 견디는 힘이 된다.

어쩌면 세상은 영원히 우리에게 거대한 병원으로 남을지 모른다. 그래도 분명한 것은 이 시가 우리에게 은은하게 빛나는 금잔화로 다가와 삶의 고단한 순간마다 위로를 건네준다는 사실이다. 윤동주는 자신의 아픔을 드러내기 위해 이 시를 썼지만, 그 시가 시대를 건너뛰어 지금의 우리에게 위로한다

윤동주 시인의 집안은 1886년 윤동주의 증조부가 함경북도 종성군에서 두만강을 건너 북간도로 이주했고, 1900년 조부 윤하현 때 명동촌에 정착했다. 당시 간도는 조선인들에게 새로운 삶의 터전이자 독립운동 근거지로 여겨지던 곳이다. 명동촌은 특히 민족교육에 힘쓴 곳으로 시인의 민족의식을 키우고 문학적 감수성을 함양하는데 큰 영향을 미쳤다.

일제강점기라는 암울한 시대 속에서 민족의 고뇌와 독립에 대한 열망, 순수한 인간의 내면을 섬세하고 깊이 있는 언어로 노래한 시인 윤동주(19171945). 그 짧은 생애와 강렬한 시 정신은 시대를 초월하여 오늘날까지도 많은 이들에게 깊은 감동을 주고 있다.

윤동주의 본명는 윤해파尹海波였으나, 1938년 창씨개명 압력 속에서 윤동주로 이름을 바꾸었다. 어려서부터 문학에 대한 남다른 재능을 보였으며, 명동소학교와 은진중학교를 거치며 시를 쓰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 그는 동급생들과 함께 문예 동인지를 발간하며 습작활동을 활발히 펼쳤다. 1938년 윤동주는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입학하여 이양하, 정지용 등 당대 최고의 문인들로부터 지도와 영향을 받으며 역량을 키워나간다.

재학시절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라는 제목으로 시집 출판을 준비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자필본으로만 남게 된다. 19424월 도쿄 릿쿄대 영문과에 진학했다가 같은 해 10월 교토 도시샤대 영문과에 편입한다. 이 대학을 다니던 윤동주는 19437월 조선 독립을 선동했다는 혐의로 일본 경찰에 체포됐고 이듬해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2년형을 선고 받았다. 후쿠오카 형무소에 수감 중이던 윤동주는 1945216일 순국했다. 사인은 공식적으로는 뇌일혈로 알려져 있으나 생체실험으로 인한 사망설이 유력하게 제기되고 있다. 너무나 애석한 일이다.

윤동주 시인의 시가 이 세상에 빛을 발한 것은 여러 사람들의 드라마 같은 이야기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본다. 첫 번째는 서울대 교수를 지낸 국문학자 정병욱(19221982)이다. 경남 남해에서 태어난 그는 1940년 연희전문학교에 입학하여 윤동주와 만난다. 윤동주보다 두 학년 아래고 나이는 다섯 살 아래였다. 그들 두 사람은 하숙을 하면서 문학적 감성이 통하여 교분을 쌓았다. 이듬해 11월 윤동주는 시집 출간을 계획하면서 자필 원고 세부 중 한 부를 정병욱에게 건넸다. 윤동주는 19423월 일본으로 떠났고 정병욱은 19441월 졸업을 앞둔 상태에서 학병으로 징집되었다.

정병욱은 윤동주 자필 원고를 어머니에게 맡겼고, 어머니가 그 원고를 전라남도 광양 망덕포구 가까이 있는 가족의 사업장 마루 밑에 독을 묻고 보자기에 싸서 소중하게 간직했다. 그런 불확실하고 암울한 상황에서 선배의 한글 원고를 고이 간직하려 한 정병욱의 진심과 아들의 당부를 충실히 따라주신 어머니의 정성으로 윤동주의 정선된 19편 작품이 무사히 보존될 수 있었다.

정병욱은 윤동주가 옥사했다는 사실을 1946년 가을 윤동주의 동생 윤일주를 통해 알게 되었다. 정병욱은 자신이 윤동주의 원고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전했다. 여기에 연희전문학교 룸메이트였던 강처중이 보관한 원고가 더해지고 그 외의 보존 작품이 합해져 시집 출간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그러니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출간에 결정적 역할을 한 사람은 정병욱이다.

그리고 또 한 사람은 전 연세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 박사 마광수(19512017)교수다. 그는 1983년 발행한 마광수의 박사학위 논문 「윤동주 연구 – 그의 시에 나타난 상징적 표현을 중심으로」 결론에서 윤동주의 정서를 부끄러움이라 말했다. 이건 순전히 마광수의 지적 산물이라고 평한다. 그와는 별개로 1992년 그가 집필한 「즐거운 사라」가 외설이라는 필화사건으로 강의 도중 체포되고 유죄가 선고되어 복역했다. 교수직도 해임되었다. 그 후 1998년 복직돼 2016년 정년퇴임하였으나 우울증으로 2017년 자살로 생을 마감하였다. 안타까운 일이다.

어쨌든 정병욱, 강처중, 윤일주와 윤혜원 등 친지, 친인척들의 노력에 더하여 마광수 교수의 윤동주 재발견이라 할 만한 스토리가 오늘의 윤동주를 있게 했다 할 것이다.

최근에는 물리학자 김상욱이 하늘과 바람과 별과 인간이라는 책을 물리학적 측면에서 쓰고 그 서문에 이렇게 썼다.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는 윤동주 시인의 유고시집 제목이다. 하늘, 바람, 별은 그 시집에 실린 ‘서시’에 등장하는 단어다.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겠지만, 나에게 하늘은 우주와 법칙, 바람은 시간과 공간, 별은 물질과 에너지로 다가온다. 즉 물리적으로 존재하는 모든 것이라 볼 수 있다. 여기에 인간을 더하면 이 책이 다루는 내용이 된다.

김약연과 명동학교

명동촌을 나오면서 그의 외삼촌 김약연이 건립했다는 명동학교와 정신적으로 서로 의지한 그의 고종사촌 송몽규의 생가도 지척에 있어 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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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약연이 지은 명동학교

명동촌은 한국 근대사와 항일운동, 기독교 계몽운동의 중요한 무대 중 하나였다. 이곳에는 일제강점기 조선인의 교육과 독립정신 함양을 위해 세워진 상징적 학교인 명동학교가 있었고, 그 중심에는 김약연金躍淵(1869~1944) 이라는 인물이 있었다. 그는 윤동주의 외삼촌이자 당시 북간도 지역 조선인 사회의 정신적 지도자였다.

김약연은 황해도 출신으로 젊은 시절 미국 유학을 통해 서양의 문물과 기독교 정신을 받아들였고, 이를 기반으로 조선 민족의 자주적 성장을 모색한 계몽사상이 그의 생애를 관통하는 사상이었다. 1910년대 초 많은 조선인이 일제의 탄압을 피해 간도로 이주했을 때, 김약연은 이민자들의 삶의 기반을 다지고 자주적 교육의 필요성을 절감하여 1920년 명동학교를 설립하였다. 명동학교는 단순한 교육기관을 넘어 민족 정체성과 독립정신을 키우는 요람으로 기능했다.

김약연은 학교 설립 당시 민족교육을 핵심 목표로 삼고, 조선어와 조선 역사, 기독교 윤리, 실용 학문을 교육과정에 포함시켰다. 그는 우리 민족은 스스로의 힘으로 살 길을 개척해야 한다.”는 신념 아래 어린이와 청년들에게 언어와 문화, 종교, 역사를 가르쳤고, 이는 일제의 동화 정책에 저항하는 실질적인 민족운동이었다.

명동학교는 이후 윤동주를 비롯해 수많은 인재들을 길러냈다. 윤동주가 이곳에서 배운 도덕성과 민족의식, 인문정신은 그의 시 세계에도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다. 김약연은 외삼촌의 역할을 넘어, 윤동주의 정신적 스승이기도 했다. “민족 없는 교육은 존재할 수 없다는 그의 교육 철학은 시대를 앞선 민족주의 교육 실천이었고, 이는 오늘날에도 교육의 본질을 되새기게 하는 귀한 유산이다.

김약연은 광복 한해 전 세상을 떠났지만, 그의 뜻은 명동학교와 후손들에게 길이 남아 있다. 명동학교는 현재 복원되어 교육문화유산으로 보존되고 있다. 김약연은 교육자이자 목회자, 그리고 민족운동가로서 그 위상을 계속 이어가고 있다.

이번 여행은 광복 80주년 기념특집∼여드렛날에 동북기행이다. 그리고 1945216일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옥사 80주년이어서 그 뜻을 되새겨보자고 온 여행이었다. 막상 와서 보고 나니 만주, 간도, 조선, 일제, 식민 등 많은 단어들이 뒤엉켜 마음이 무거웠다.

일송정

일송정으로 향했다. 버스 안에서 동행한 S 선생이 얼마 전에 와 본 적이 있는데 일송정은 평지로 옮겨 좀 그렇다고 했다. 나는 산에 있는 게 맞을 것 같은데 하면서 말끝을 흐리고 말았다. 와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일송정 관광안내처인 비암산 풍경구에 도착하여 산꼭대기 쪽을 보니 정자가 멀리 보인다. 저게 일송정이 아니냐고 했더니 대답이 없다. S 선생이 아무래도 잘못 본 것 같다. 사람은 언제든 인식을 잘못 할 수 있는 것이니까. 그는 몇 번 고개를 갸웃하면서 본인의 인식 상태를 점검한다. 어쨌든 일송정은 비암산 정상에 있는 게 틀림없다. 우리는 전동카를 타고 일송정이 있는 비암산 꼭대기로 향했다. 전동카는 몹시 힘이 드나 보다. 거친 숨을 몰아쉬면서 겨우겨우 정상에 다다랐다. ‘一松亭이라는 선돌 세우기 공사가 한창이다. 그게 제일 중요한 지점인 줄 알고 사진도 찍고 그랬는데 그게 아니라 그 아래쪽으로 오 분여 내려가야 한다. 용정 시내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곳에 정자가 세워져 있고 그 앞에 소나무 한 그루가 심겨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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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구자

-윤해영 작사 /조두남 작곡-


일송정 푸른솔은 늙어 늙어 갔어도

한줄기 해란강은 천년 두고 흐른다
지난날 강가에서 말 달리던 선구자

지금은 어느 곳에 거친 꿈이 깊었나

너무나 잘 알려진 가곡이다. 나는 과거 이 노래를 여러 번 부른 적이 있다. 폼을 잡고 불러봤지만 그저 그렇고 듣기 거북하지나 않으면 다행이었다. 1절은 지금도 부를 줄 안다. 이 노래는 비목과 함께 어딘지 모르게 숙연하고 장중한 분위기를 자아내면서 가슴을 울려 부르게 된 것 같다.

노랫말에 나오는 지명이 일송정, 해란강, 용두레, 비암산 등이 모두 지금 보고 있는 여기, 북간도 만주에서 항일운동을 하던 독립군을 묘사한 것으로 알려지면서 1980년대까지 널리 불리던 노래였다. 운동권에서조차 민중가요 못지않게 부를 정도였으나 지금은 작사가, 작곡가 모두 친일 논란에 휘말리면서 외면받고 있다. 그래도 젊어서 즐겨 부르던 가곡이니 그냥 적어봤다.

선구자노랫말에 나오는 일송정은 정자모양의 소나무를 뜻하는데, 일제하에 일경과 밀정을 피하여 애국지사들이 밤마다 이 소나무 밑에서 암암리에 모여 독립운동을 모의했다고 한다. 이런 사실을 알게 된 일제는 이 소나무에 구멍을 뚫고 약품을 넣어 고사시켰다고 한다. 그 후 1991년부터 수차례에 걸쳐 용정시가 한국의 도움을 받아 소나무를 다시 심고 정자를 다시 세웠다. 사진에 있는 정자와 소나무는 그때 심고 조성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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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송정에서 바라본 용정시내와 해란강

비암산 일송정에 올라 용정시내를 내려다보면 평강벌과 오른쪽으로 공릉강과 비슷한 규모의 해란강이 흐르고 있다. 당시 독립운동을 하던 수많은 투사들이 일경 앞잡이들의 밀고로 체포되어 갖은 고초를 겪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