압록강은 흐른다
백두산 인삼
통화로 가는데 비가 추적추적 온다. 저녁이 되어 식사를 하러 들어가는데, ‘서울관’이라는 식당 로비에서 인삼 파는 청년이 인삼을 사라고 서툰 한국말로 호객을 한다. 인삼에 크게 관심이 없어 식사를 마친 후 그냥 지나쳐 호텔로 왔는데 거기까지 따라왔다. 비는 아침까지도 내린다. 인삼 파는 청년도 밤을 새웠는지 호텔 로비에서 인삼을 팔고 있었다. 알고 보니 여기가 인삼과 사연이 깊은 역사가 있고 개성인삼과도 연관이 있었다.
16세기 중후반 동아시아는 명나라의 재정 개혁과 후금의 성장이라는 거대한 변화를 겪고 있었다. 조선과 후금은 백두산 일대에서 자생하는 인삼을 둘러싸고 심각한 갈등을 빚었는데, 이는 단순한 경제적 마찰을 넘어 양국의 외교 관계와 동아시아 무역 질서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인삼은 예로부터 귀한 약재이자 건강식품으로 높은 가치를 지녔다. 이 시기 인삼을 둘러싼 갈등이 심화된 데에는 복합적인 원인이 작용했다.
먼저, 명나라는 조세 제도를 은으로 일원화하는 일조편법一條鞭法(여러 가지 방법으로 받던 세금을 은으로만 징수)을 시행하였다. 이는 상업 활성화와 은銀 유입을 촉진하여 부유층의 인삼 수요를 급증시켰다. 유럽과 일본에서 유입된 막대한 양의 은이 인삼 구매력을 증폭시켜 인삼의 국제 가격을 엄청나게 끌어올리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리고, 조선은 상업을 천시하여 인삼 역시 조공품 이외의 개인 거래를 엄격히 통제했다. 인삼은 주로 조정에서 관리하는 야생 산삼에 의존했기에 폭등하는 수요를 감당할 수 없었다. 반면, 만주 지역의 후금은 인삼을 중요한 교역품으로 인식하고 부족장들이 적극적으로 상업에 개입하여 명나라와의 교역을 활성화했다.
또한, 누르하치가 여진족을 통일하고 후금을 건국하면서 신생국가로서 막대한 재정이 필요했다. 인삼은 후금이 명나라와 교역하여 은을 확보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수단이었고, 누르하치 스스로도 젊은 시절 인삼 채취로 부를 축적했기에 인삼의 경제적 가치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이에 따라 백두산 등 주요 인삼 산지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기 시작했다.
더하여, 한반도와 만주 지역은 예로부터 국경이 명확하지 않아 조선인과 여진족이 비교적 자유롭게 드나들며 인삼을 채취했다. 그러나 인삼의 가치가 폭등하면서 양측의 월경越境 채취 경쟁이 격화되었고, 필연적으로 국경 침범 및 무력 충돌로 이어졌다.
이와 같이 인삼을 둘러싼 조선과 후금의 갈등은 여러 가지 중대한 결과를 초래했다.
첫째, 후금은 인삼을 국가의 중요한 수입원으로 여겼기에 조선인의 월경 채삼採蔘에 대해 강력히 항의하고 무력으로 제압하는 일도 잦았다. 조선 또한 월경 채삼을 금지했지만, 인삼의 막대한 이득 때문에 밀거래는 끊이지 않았다. 후금은 조선에 공식적으로 항의 서한을 보내 월경 문제를 비난했고,
조선은 이에 대해 사과하며 수세에 몰리는 상황이 반복되었다. 이러한 국경 갈등은 훗날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으로 이어지는 조선과 후금(청) 간의 전면적인 무력 충돌의 중요한 배경이 되었다.
둘째, 조선은 인삼 사무역私貿易을 통제하고 조공무역에 의존하려 했으나, 인삼의 높은 국제적 수요와 후금의 적극적인 상업 활동은 이러한 정책을 유지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후금은 국가 운영에 필요한 물자를 조선에서 확보하기 위해 개시開市, 즉 공식적인 시장 개방을 끊임없이 요구했다. 결국 조선은 회령개시 등 일부 무역 시장을 개설하여 후금과의 교역을 부분적으로 허용하게 되었다. 이는 조선의 엄격한 상업 통제 정책이 현실적인 경제 상황 앞에서 한계를 드러낸 결과였다.
셋째, 16세기 중후반의 인삼 갈등은 야생 인삼 공급의 한계와 폭발적인 수요 사이의 불균형을 명확히 보여주었다. 비록 인삼 재배 기술이 본격적으로 활성화된 것은 18세기 이후였지만, 이러한 극심한 공급 부족은 인삼의 인공 재배 필요성을 절감하게 만들었다. 고려시대부터 인삼 재배 시도가 있었고, 특히 개성 지역에서는 17세기부터 '양직묘삼농법養直苗蔘農法'(어린 인삼을 길러 본밭에 옮겨 심는 농법)과 같은 재배 기술이 확산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는 16세기 갈등을 통해 확인된 인삼의 막대한 경제적 가치와 수요가 재배 기술 발전을 촉진하는 동기가 되었음을 시사한다.
넷째, 인삼 무역을 둘러싼 조선과 후금의 갈등은 당시 동아시아 무역 질서에 중요한 변화를 가져왔다. 인삼은 후금이 명나라에 반기를 들고 성장하는 데 필요한 재정 마련에 큰 역할을 했다. 결국 동아시아 패권이 명에서 후금(청)으로 넘어가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 청년은 백두산에 심은 장뇌삼으로 사포닌이 많이 들어 있어 약효가 우수하다고 혼신을 다하여 설명한다. 저렇게 열심히 홍보하는데 사는 사람이 없으면 어떡하나 내심 괜한 걱정을 했다. 그래도 사는 사람이 있어 다행이었다. 매년 10월 중순이면 임진각 광장에서 개성인삼축제가 열리니 나는 거기 가서 사면 될 일이다. 사실 어떤 인삼인지도 알 수 없고 개성인삼에 견줄 수 있을까 생각하면서 그냥 보기만 했다.
신흥무관학교
통화는 신흥무관학교와 관련이 깊다. 통화는 압록강을 경계로 북한과 마주하고 있다. 20세기 초 한민족의 주요 독립운동 거점 중 하나였다. 이곳은 일제의 감시가 비교적 덜한 데다 험준한 산악 지형이 독립군 활동에 유리했기 때문에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활동 무대로 삼았다.
1910년 한일병합 이후 이회영 선생을 비롯한 신민회 회원들은 만주에 독립운동 기지를 건설하기로 결의했다. 이회영 일가 여섯 형제는 전 재산을 정리해 독립운동 자금으로 마련했고, 1911년 류하현柳河縣 삼원보三源堡에 경학사耕學社를 설립했다. 그리고 그 산하에 독립군 간부 양성소인 신흥강습소를 세웠는데, 이것이 바로 신흥무관학교의 전신이다. 신흥무관학교는 재정난 속에서도 무장 투쟁의 필요성을 절감하며 3,500명 이상의 독립군 간부를 배출하는 위대한 성과를 거두었다. 이들은 군사훈련뿐만 아니라 투철한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교육을 받으며 항일 무장 투쟁의 핵심 역량을 길렀다.
하지만 1920년 9월 일제가 훈춘 사건을 조작하고 만주 지역의 대대적으로 독립군 탄압이 시작되었다. 신흥무관학교는 더 이상 운영될 수 없게 되어 결국 그해 11월 폐교할 수밖에 없었다. 본부는 길림 교하시 액목현으로 옮겼다. 학생들과 교관들은 서로군정서, 북로군정서 등 여러 독립군 부대에 편입되어 항일 무장 투쟁을 이어갔다.
신흥무관학교의 정신은 폐교 이후에도 만주 전역, 특히 통화 지역에서 활발하게 이어졌다. 이곳을 거점으로 삼아 일제와 중국 군벌에 맞서 싸웠다. 통화 주변에는 당시 독립군이 사용했던 은신처와 훈련장 등 독립운동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 또한, 1930년대에 김좌진 장군이 설립한 한족총연합회 본부가 이곳에 있었으며, 한국독립군이 조직되어 활동한 무대가 되기도 했다.
신흥무관학교 출신들이 주축이 된 독립군 부대들은 1920년 청산리 전투와 봉오동 전투와 같은 역사적인 승리를 거두며 일제에 큰 타격을 입혔다. 이들의 활약은 해외 독립운동의 가능성을 보여주었고, 무장 투쟁의 의지를 전 세계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이들이 승리를 거둘 수 있었던 배경에는 험준한 만주 지형에 대한 뛰어난 이해와 신흥무관학교에서 체계적으로 배운 군사 훈련이 있었기 때문이다.
통화에서 활동한 신흥무관학교 졸업생들은 훗날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한국광복군 창설에도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지청천, 김학규 장군과 같이 신흥무관학교 출신 장교들이 광복군의 핵심 인물로 활약하며 조국 광복에 기여했다. 이들은 해방 이후에도 대한민국 육군 창설에 기여하는 등 대한민국의 초석을 다지는 역할을 했다.
결론적으로 통화는 우리 민족의 독립을 향한 염원과 희생, 그리고 위대한 승리의 역사가 살아 숨 쉬는 곳이다.
압록강, 신의주 풍경
단동에 도착하자마자 유람선을 타기 위해 압록강 공원 선착장으로 이동하였다. 하필 중국 최대의 명절인 5월 1일 노동절이라 인산인해였다. 비가지 뿌리는 바람에 모두 애를 먹었다. 유람선을 타고 압록강 중간쯤 북조선과 경계로 해서 하류 쪽으로 돌아오는 유람이었다. 30분정도 걸렸다. 건너편 신의주가 빤히 보이는데 사람은 별로 없다. 앞에서도 잠깐 말한 바 있지만 참 이상한 게 조·중이 우호지간이라고 하면 서로 왕래하는데 불편이 없어야 할 것 같은데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압록강 철교 관람하는데도 아주 엄격하다. 중간까지 가면 콱 막아놓아 되돌아와야 한다. 북조선 쪽에서는 골재채취가 한창이다. 중국은 골재채취를 엄하게 단속하고 처벌도 강하여 골재채취를 못한다고 한다. 그래서 북한으로부터 수입해 쓴다고 한다.
단동의 옛이름 안동
단동의 옛 이름은 안동이다. 단동은 고구려 영토였으나 고구려 멸망 후 당의 안동도호부 관할에 있다가 발해의 영역으로 포함되었다. 금, 원 시기에는 ‘파속부’라는 지방행정단위에 속하였다. 청이 중원을 장악하고 봉금지대를 설정하면서 사람이 살지 않는 땅이 되었다. 봉금령이 해제된 이후 1876년 안동현이 설치되었으며, 1903년 대외개방 항구가 되었다. 1931년 만주사변으로 일본군이 점령한 후 일본제국주의의 대륙 진출기지가 되었다. 1934년 만주국에 의해 안동성 안동현이 되었다. 1965년 단동시로 개칭하였다.
위화도 회군
위화도도 보인다. 안내원이 손으로 가리켜 멀리서 보고 말았지만 역사적인 곳이다. 위화도 회군은 고려 말기 명나라에 대한 공격 명령을 받은 무장 이성계가 군대를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 위화도에 이르렀다가, 명의 강력한 반발과 민심의 피로감을 이유로 명 정벌을 중지하고 도리어 군사를 돌려 개경으로 회군한 사건이다. “4불가론”을 내세워 출정을 반대했는데 그의 논리는 ① 여름철이라 질병이 창궐하고, ②식량과 군수물자가 부족하며, ③백성들의 지지가 없고, ④명과의 전쟁은 불의하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의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결국 출정하게 되었다.
그러나 압록강을 건너 위화도에 이른 이성계는 정치적 판단을 내린다. 그는 무의미하고 위험한 전쟁을 강행하는 대신, 군을 이끌고 개경으로 회군하여 정권을 장악하는 결정을 내린다. 이 회군으로 그는 군사적 실권과 민심을 기반으로 권력을 장악한 후, 최영을 제거하고 정치적 주도권을 잡는다. 이후 고려 왕조의 몰락과 조선 왕조의 성립으로 이어지는 역사적 대전환의 계기가 되었다. 그런데 위화도가 사만이나 되는 군대가 주둔할 수 있는 그렇게 너른 땅인가 하고 다시 한번 건너다보았다.
대련
오늘이 이번 만주기행의 일정이 사실상 끝이다. 압록강 끝부분 단동에서 북변 황해를 끼고 도드라지게 튀어나온 대련을 향하여 오래도록 달린다. 피로해서 그런지 잠이 온다.
대련은 요동반도 최남단 끝에 위치한 동북부 최대 항구 도시이며 만주의 관문이다. 지형은 삼면이 바다에 접하고 있어 해안선의 길이가 무려 이천여 킬로미터나 된다. 대련에서 반도 끝 쪽으로 안중근의사를 비롯한 독립운동가들이 순국한 여순旅順이 있다. 옛 전국시대에는 동북지역의 소수민족과 중원민족과의 교통중심지로 이곳을 차지하고자 서로 견제하여 오다가 명청明淸시대에는 군사방어의 요충지로 발전하였다. 1715년 청나라는 여순에 수사영水使營을 설치하였고, 1879년 청의 군사대권을 거머쥔 이홍장은 여순항에 포대를 건축하고 보루를 쌓아 선박수리소인 도크를 건설함으로써 세계적인 군항으로 성장했다. 여순 항구는 지세가 험하고 대형 군함도 정박할 수 있으며 부동항이다. 그래서 제국주의 열강들은 근대 100년 동안 여순항 쟁탈전을 벌였던 것이다. 여순 일대는 1894년 중일전쟁으로 일본에 점령당했다. 그 후 러시아를 비롯한 독일, 프랑스 등에게 점령당하고 일본에게는 사십여 년 간 지배당한 아픈 역사가 서려 있는 곳이다.
안중근
안중근과 여순 그리고 하얼빈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어려서부터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왔던 이름이다. 그 중 여순은 안중근 의사가 감옥에 있는 몸으로 순국할 때까지 계시던 곳이 아닌가. 대련에서 여순 감옥까지 불과 칠십 킬로미터 전후일 터이다.
안중근은 1879년 9월 황해도에서 태어나 1910년 3월 26일 여순 감옥에서 순국하였다. 그는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 역에서 대한민국 침략의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여 대한민국의 독립 의지를 전 세계에 알린 엄청난 사건의 당사자로서 독립운동가였다. 또한 단순히 민족주의에 머무르지 않고 ‘동양평화론’을 주창한 뛰어난 사상가였다. 그의 의거는 오늘날까지도 많은 사람들에게 공감을 주고 있다.
여순 감옥은 1902년 러시아가 중국인들을 제압하기 위해 건축하였다. 그 후 러일전쟁으로 일본이 여순을 점령하면서 중국, 한국, 러시아인을 수감하기 위하여 증축하였다. 일본의 만주 침탈 후 각국 항일운동가 수만 명이 수감되었는데 한국의 독립운동가인 안중근을 비롯하여 신채호, 이회영, 박희광 등도 수감생활을 하던 곳이다. 2009년 중국정부는 대한민국과 공조하여 ‘국제항일열사전시관’이라는 별도의 전시관을 마련하였다. 이곳에는 안중근 의사의 흉상을 세우고 그의 항일운동 사료와 기사들을 정리한 자료 전시관을 만들었다.
안중근 의사는 ‘나의 유해를 하얼빈 공원 옆에 묻어두었다가 우리 국권이 회복되거든 고국으로 옮겨다오.’라고 유언을 남겼다. 그러나 한국, 중국 정부 뿐 만아니라 여러 독립애국단체 등에서 유해발굴을 시도했으나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고 있다. 안타깝다.
그 역사적 현장을 지척에 두고 가보지 못하고 가야 한다니 뭔가 빠진 듯한 느낌이다. 꼭 한 번 여순 만 겨냥하여 다시 오리라 다짐하며 귀국선에 올랐다.
※ 참고문헌
- 중국으로 가는 옛길, 신 춘호
- 소현세자와 경안군의 슬픈 역사, 강 근숙
- 열하일기, 연암 박 지원
- 파주문화유산총람, 파주문화원
- 오랑캐 홍타이지 천하를 얻다, 장 한식
- 청태종과 월롱산성, 조용헌
- 동해명칭, 대한민국 외교부홈페이지
- 장단콩, 파주시홈페이지
- 윤동주 ‘병원’ 시평, 이숭원
- 조선족 재발견, 한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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