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 젖은 두만강 사영
두만강과 조·중·러 삼국 경계
국경지대라서 그런지 검문이 심했다. 아마 한 시간 이상 소요되었던 것 같다. 오고가고 하는 차량도 그리 많지가 않고, 낯이 익은 안내원이 늘 관광객들을 버스로 안내하는데도 불구하고 뭐가 그리 오래 걸리는지 모르겠다. 방천에 거의 다 와서는 왼쪽으로는 러시아 국경 표지석이 오른쪽으로는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북조선과 경계로 접근을 못하도록 철조망을 설치해 놓았다.
방천에 도착하니 조선족이 운영하는 허름한 식당으로 안내한다. ‘뚱보식당’이라는 간판이 쓰여져 있었다. 음식은 겉모습과는 달리 맛이 있었다. 과거에는 두만강 건너 북조선 사람들이 여기로 놀러 오기도 했단다. 그야말로 지척에 북조선 함경북도다. 점심 식사 후 조금 더 가니 방천국가풍경명승구란다. 한마디로 관광단지다. 커다랗게 조성해 놓았는데 평일이어서 그런지 관광객들은 별로 없다. 이곳을 오는데 그렇게 까다로우니 누가 오겠나 싶기도 하다. 우리는 버스에서 내려 관광구의 셔틀버스로 갈아타고 삼국 변경 전망대로 향했다. 조·중·러 삼국의 경계를 바라볼 수 있는 전망대가 높게 설치되어 있다. 몇 층을 올라가서 내려다보니 두만강과 철교 그리고 러시아 연해주 쪽이 훤히 보인다.
두만강 명칭
두만강豆滿江이라는 명칭은 고려강高麗江, 도문강圖們江 등 여러 가지로 표기된 바도 있다. 특히 중국에서는 도문강圖們江이라고 쓰는데 발음을 투먼Tumen강이라 하니 두만강인지 헷갈릴 수밖에 없다. 다음에 가는 코스가 도문圖們이니 더욱 혼동된다. 그리고 콩의 원산지가 한반도 북부지방과 만주이기 때문에 두만강은 ‘콩이 가득한 땅의 강’이라는 설도 있다. 배에 콩을 가득 싣고 건너는 모습이 연상된다.
파주에서는 매년 11월 하순이면 임진각 너른 마당에서 ‘파주장단콩축제’가 열린다. 관람객이 참 많이 온다. 축제장 위치가 수도권에 있고 접근성이 좋은데다 축제장이 워낙 넓어 상당히 편리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장단콩의 효능이 관람객을 부르는데 결정적인 요인이리라. 장단콩축제에 출품되는 장단콩은 옛날부터 명성이 높았다. 고구려의 영토가 만주뿐만 아니라 한강과 임진강 이북 쪽까지 광범위했을 때 만주에 심겨지던 콩 품종이 고구려의 장천현인 지금의 장단에 심게 되었다. 장단 토질이 만주와 같이 콩의 생육에 적합하기 때문이다. 옛날이라면 임진강에서도 두만강에서와 같이 콩을 가득 실은 배가 오가지 않았을까.
동해와 일본해
두만강과 철교를 내려다보면서 중국이나 러시아가 두만강을 통하여 동해로 나가는 통로를 개발하면 서로 좋지 않을까하고 순진한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안내 표지판에 ‘일본해’라는 단어가 내 눈에 띄었다. 순간 이게 아닌데 라는 반감이 일었다. 마침 안내원이 우리 쪽으로 다가오기에 물었더니 국제기구에서 ‘일본해’로 명명해서 그렇게 표기했다고 하면서 가버렸다. 썩 좋은 기분이 아닌 상태에서 관람을 마치고 타워 1층으로 내려와서 셔틀에 타려고 하는데, 타워 입구 벽 전체에 그려진 대형 지도에도 역시 ‘일본해’라고 표시되어 있었다. 그런데 그 안내원이 ‘일본해’라는 명칭이 당연하다는 듯이 아무렇지도 않게 또 설명을 한다. 우리 일행이 적지 않다. 나는 순간적으로 속초 앞바다까지 일본해라고 불러야 한단 말인가 하는 생각이 퍼뜩 떠오르면서 ‘그게 아니에요!’라며 발끈하고 말았다.
마침 옆에 있던 어느 분도 ‘동해와 일본해를 병기한다고 하는데…’라고 보조를 맞추는 말이 내 귀에 들려왔다. 안내원은 당황하면서 뒷말을 잇지 못하고 셔틀로 안내한다. 물론 나도 더 이상 언급하고 싶지 않았다. 이 문제는 굉장히 예민한 문제이기 때문에 아무렇게나 언급할 사항이 아니다. 국제적으로 논란이 되면서 ‘병기’ 문제까지 거론되고 있으니만큼 신중해야 한다. 특히 안내원과 같이 여러 사람에게 영향을 주는 사람은 그간의 진행과정을 잘 설명해야한다. 예를 들면 ‘지금 국제기구에는 일본해로 되어 있지만 대한민국에서 이의를 제기하여 지금은 동해와 일본해를 병기하는 나라가 있고 세계적으로 의견이 바뀌고 있는 상태이다.’ 이렇게 만이라도 언급하면 될 게 아닌가. 내가 ‘애국’에만 경도되어 욱했다면 성질 고약한 사람이 되겠지만, 이 문제는 그렇게 간단히 치부해 버릴 일이 아니다.
‘동해’는 한국인이 이천년 이상 사용해 오고 있는 명칭으로 삼국사기의 동명왕편, 광개토대왕비, 팔도총도, 아국총도를 비롯한 다양한 사료와 고지도에서 이 같은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일본해’라는 명칭은 1602년 마테오리치의 곤여만국전도坤輿萬國全圖에서 처음 사용된 명칭이라고 주장하는데, 일본인 스스로가 동해 수역의 명칭을 일본해로 인식하지 않았음이 다양한 사료를 통해 증명되고 있다. 특히, 일본은 19세기에 ‘일본해’ 사용이 증가하게 되었다는 서양고지도 조사결과를 제시하며 ‘일본해’ 명칭이 19세기에 확립되었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일본변계략도日本邊界略圖, 신제여지전도新製輿地全圖 등 당시 일본에서 제작된 다수의 지도가 동해 수역을 ‘조선해朝鮮海로 표기하고 있는 사실은 ’일본해‘명칭이 일본에서조차 확립된 것이 아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외교부 홈페이지 참고
오늘날과 거의 같은 모습의 세계지도가 본격적으로 제작되던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일본이 아시아의 강국으로 부상하면서 ‘동해’ 수역은 ‘일본해(Sea of Japan)’라는 표기로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다. 특히, 1929년 국제수로기구(IHO)가 ‘해양과 바다의 경계(Limits of Oceans and Seas)’초판을 발간했을 당시 우리나라가 일본의 식민지하에서 국제사회에 동해 명칭의 정당성을 주장할 수 있는 기회를 갖지 못했던 점은 ‘일본해’ 표기의 국제적 확신을 가속화시키는 원인이 되었다.
이 ‘해양과 바다의 경계’ 책자는 국제기구 차원에서 지명을 결정하여 수록한 책자로 세계 해양의 경계 및 명칭의 중요한 인용 자료가 되었다. 동 책자 2판 발간 시(1937년)도 여전히 일본의 식민 지배하에 있었고, 3판 발간 시(1953년)에는 6.25전쟁 중이었다.
6.25전쟁 이후 국가를 재건하면서 우리는 ‘동해’ 표기가 정당하게 반영될 수 있도록 지속적으로 노력해왔다. 가령 1965년 「한‧일 어업협정」 체결 당시 한‧일 양국은 해역의 명칭에 합의하지 못해 결국 ‘동해’와 ‘일본해’를 자국어판 협정문에 각각 별도로 사용하기로 결정한 적이 있다. 또한 민간차원에서도 동해 지명을 되찾기 위한 각종 활동을 추진해왔다. 이 같은 노력에 힘입어 정부는 1991년 우리나라의 유엔 가입 이후 1992년 유엔지명표준화 회의(UNCSGN)에서 처음으로 동해 표기 문제를 국제회의에서 공식 제기하게 되었다.
이에 세계 언론, 각국 지도제작사, 출판사 등에서 최근 ‘동해’와 ‘일본해’를 병기하는 사례가 양국 외교부의 조사에 따르면 2000년에는 2.8%, 2009년에는 28.1%로 발표되었으며, 현재는 40%를 초과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국제수로기구는 2020년 11월 IHO총회에서 바다 명칭을 대체하는 ‘숫자로 된 고유 식별자 체계(S-130)’를 도입하기로 결정했다. 이는 기존의 지명 표기 대신 숫자로 된 명칭을 사용하겠다는 것으로, 디지털 시대를 맞아 새로운 표준을 만들기로 한 것이다. 이 결정으로 IHO가 발간하는 해도와 문서에서는 ‘Japan Sea’가 사용되지 않고 숫자로 된 명칭이 사용된다. 이는 한국과 일본이 모두 한 발짝 물러선 형태로 향후 해양 명칭 표기 논의에 중요한 전환점이 될 것으로 보인다.
결론적으로 볼 때, ‘일본해’ 단독 표기에서 ‘동해/일본해 병기’로의 전환은 점진적으로 확산되는 추세에 있다. 특히 국제수로기구의 새로운 디지털 표기 방식 도입은 향후 이 문제에 대한 새로운 접근방식을 제시할 것으로 보고 있다.
*오른쪽 벽면에 ‘일본해’라고 표시되어 있다
눈물 젖은 두만강의 사연
마음 한편이 찜찜한 상태에서 다음 여정으로 접어들었다. 북조선 남양시가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바라다보이는 중국 도문에 도착했다. 여기서는 사진도 찍지 못하게 할 뿐만 아니라 핸드폰 자체를 꺼내지 못하게 한다. 아마 그 동안 남한 관광객들이 북조선을 향하여 지나친 액션을 취하지 않았나 추측한다.
과거 여기를 다녀간 관광객 중에는 북조선 남양시를 바라보면서 어떤 목적으로 요란하게 굿 같은 것을 하여 북조선을 자극하는 행위를 하였다고 한다. 그 이후 중국 당국에서 남한 관광객에게 일정한 행위를 못하도록 제재를 가했다고 한다. 여기야말로 지척이다. 남양시와 도문시는 조그마한 하천과 같은 넓이의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있다.
과거에는 유람선을 띄우고 유람도 했고 도문국경대교를 통하여 간단하게 왕래했다고 하는데 지금 그게 안 되는 모양이다. 지금도 두만강 변에는 오성기가 달린 유람선이 정박해 있어 중국관광객은 사용하는 것 같은데 우리는 얼씬도 못하게 한다. 그리고 북·중간에는 같은 공산국가였고 우방으로서 그렇게 경계할 것 같지 않은데 그렇지도 않은가보다. 남한 사람들만 경계하는 건지 중국 사람도 경계하는 건지는 모르겠다.
두만강하면 아무래도 김정구선생의 ‘눈물 젖은 두만강’이 떠오른다. 이 노래에는 애달픈 사연이 있다.
1935년 이 노래를 작곡한 이시우는 순회공연을 위해 두만강 도문시 한 여관에서 묵게 되었다. 그런데 옆방에서 한 여인이 비통하게 우는 소리가 났다. 이튿날 이시우는 여관 주인에게 물어보았는데, 그 여인은 여관 주인의 친구인 김증손녀金曾孫女였다. 그 여인의 남편 문창학文昌學이 독립운동을 하러 갔는데 몇 년 동안 오지 않았다. 남편을 찾아 나선 부인은 닷새 전 서대문형무소에서 사형이 집행되었다는 사실을 접한다. 공교롭게도 남편 문창학이 사망한 날이 그의 생일이었다. 그녀는 남편의 생일상과 제사상을 함께 차렸다. 제사를 마친 부인은 두만강으로 뛰어들어 생을 마감하였다고 전해진다. 이 사연을 접한 이시우는 충격을 받아 ‘눈물 젖은 두만강’을 작곡하면서 망국의 원한과 민족의 설움을 통탄하는 감정을 실었다 한다.” 도문이라고 하니 이 앞 두만강에 투신한 거다.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왼쪽이 도문시, 오른쪽이 북한 온성군 남양마을이다.
눈물 젖은 두만강
-김용호 작사/이시우 작곡, 김정구 노래-
두만강 푸른 물에 노젖는 뱃사공
흘러간 그 옛날에 내 님을 싣고
떠나든 그 배는 어데로 갔소
그리운 내 님이여 그리운 내 님이여
언제나 오려나
중국 어디에서나 남녀들이 어울려 사교댄스를 추는 모습은 흔히 볼 수 있는 일이다. 여기 도문시 두만강 변 광장에서도 남녀 노인들이 어울려 댄스를 추면서 오후 한때를 즐기는 모습은 참 신선해 보였다. 나는 댄스를 추는 노인들과 북조선 남양시가 겹쳐 보이는 모습을 뒤로 하고 버스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