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침략에 맞선 고종의 밀사
헐버트는 일제의 침략을 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고종의 밀사로, 민권 운동가로 일본과 맞서 싸우며 정의와 평화, 올바른 인간애가 무엇인가를 온몸으로 보여주었다.
한국에 대한 깊은 관심과 애정으로 일제의 만행을 세계에 알리는 헐버트는 일본의 눈엣가시였다. 러일전쟁 직후인 1905년 일제의 국권의 위협이 극에 달하자 고종은 1882년 미국과 조선이 맺은 ‘조미수호통상조약’의 이행 촉구를 위해 헐버트를 특사로 밀파한다.
조약 제1조에는 ‘조선이 제3국으로부터 부당한 침략을 받을 경우, 조약국인 미국은 즉각 이에 개입하여 조정을 행사함으로써 조선의 안보를 보장한다’ 하였는데, 미국은 헐버트와의 만남을 계속 거절하고 1905년 7월, 일본과 손을 잡고 미국은 필리핀을, 일본은 대한제국 지배권을 인정하는 <테프트 가쓰라 밀약>을 체결했다.
고종의 밀서는 제때 전달되지 못한 채, 1905년 11월 을사늑약이 강제 체결되고 만다. 헐버트는 정식으로 맺은 조약을 파기한 루스벨트 대통령과 대한제국 상황을 보고 침묵하는 세계 열강들을 향해 통렬하게 비판했다.
헐버트에게 전해진 고종의 마지막 밀명은 “상해 덕화, 독일 은행에 예치한 내 비자금을 대신 찾아달라”는 것이었다. 고종의 개인 명의로 예치한 현금 242,500엔 비자금은 당시 나라 전체 세입 1.5%에 달하는 고액으로 후일을 대비한 독립운동 자금이었다.
하지만 상해를 찾은 헐버트는 한 푼도 찾을 수 없었다. 헤이그 밀사 사건 후 조선의 자금줄 차단을 위해 고종의 비자금을 조사하던 일제에게 발각되어 예치금 관련 서류 날조 등 일제의 계략으로 이미 전액이 인출된 뒤였다.
1949년 40년 만에 한국을 찾은 헐버트는 당시의 예치금 증서와 모든 서류를 건네며 “일본 정부와 담판을 지어 그 돈을 이자와 함께 꼭 받아내라” 부탁했다. 조선을 사랑하는 헐버트가 계시지 않은 지금, 누가 나서서 그 일을 하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