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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권침탈과 호머 헐버트의 조선입국

을사년 새해가 밝은지 어느새 두 달이다. 봄기운이 돌고 싹이 튼다는 우수雨水가 지나도, 바람이 강하고 기온이 떨어져 밖을 나가기가 을씨년스럽다.

푸른 뱀은 지혜와 풍요, 변화를 상징한다며 대운이 온다고 희망의 노래를 부르지만, 나라 안팎이 어수선해서인지 을사사화乙巳士禍, 을사늑약乙巳勒約, 을사오적乙巳五賊이란 단어가 뇌리에서 떠나지 않는다.

18K2KzDDeq.jpg왕권을 둘러싼 권력 투쟁이야 나라가 생길 때부터 있었던 일이나. 120년 전, 일본이 강제로 을사늑약을 체결해 대한제국 외교권을 박탈시킨 사건은 결코 잊을 수 없는 일이다.

 19051117, 을사늑약을 맺도록 겁박한 친일파 관리를 을사오적이라 부른다. 형조판서 민영환은 부당한 조약을 파기하고, 오적五賊(이완용, 이지용, 이근택, 박제순, 권중현)을 처형하라 소리쳤지만, 이미 대세가 기울어 나는 죽음으로써 임금의 은혜에 보답하고 2천만 동포에게 사죄하노라는 유서를 남기고 자결하였고, 각계각층의 지사들이 죽음으로 항거했다.

 고종은 을사늑약이 강압에 이루어진 것임을 폭로하고, 강제조약을 알리기 위해 헤이그에서 열린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 이준, 이상설, 이위종 세 명의 특사를 파견한다. 이때 고종의 밀사 호머 헐버트는 먼저 출발

해 평화회의장에 무사히 갈 수 있도록 이들을 도왔다. 일제의 방해로 회의장에는 들어가지도 못하고 결국 실패했으나, 그 일을 빌미로 헐버트는 일제에 의해 추방되고 고종은 폐위당했다.

나라에 힘이 없으면 백성들은 수난을 당한다.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 국력을 키워 앞서가는 민족만이 고난을 면하고 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다. 조선 말기 문을 닫아야 조선을 지킬 수 있다생각한 흥선대원군은 쇄국정책을 내세워 외세의 바람을 차단했다.

프랑스 선교사 9명을 처형하고 카톨릭신도들을 학살한 사건으로 병인양요(1866)가 일어났고, 그들은 돌아가면서 강화도 외규장각에 소장한 문화재와 보물, 의궤를 비롯한 서적을 약탈하고 전각에 불을 질렀다. 5년 뒤 미국이 강제 개항을 목적으로 들어온 신미양요(1871)는 처참했다.

헐버트 교사와 학생들.jpg

서양의 최신 무기를 대항해 맨몸으로 싸우던 조선 수군은 전원 떼죽음을 당했다. 조선은 뒤늦게 선진 문명을 받아들이고자 1886(고종23)년 최초로 근대식 국립학교 육영공원育英公院을 설립했다. 이때 서양의 문명을 보고 들은 개화된 정객들의 노력으로 마침내 육영공원이 세워졌다. 학교의 설립 목적은 총명한 인재를 길러 외국어를 익히게 하는 것이 가장 긴급한 일이었다.

근대식 공립학교에서 영어 교사를 모집한다는 소식에 미국인 선교사 호머 헐버트(Homer Bezaleel Hulbert)18867, 조선 땅을 밟았다. 신학문을 받을 학생들은 당상관이나 벼슬아치들의 자제들로 편성되었다.

인원은 모두 35명이었고, 두 반으로 나뉘어 헐버트 외 두 명의 선교사가 교육을 담당했다. 과목은 주로 영어에 치중했으며 각국의 언어와 역사, 지리, 수학 등을 가르쳤다. 그 당시 상황을 보고 낙담했으나 조선의 역사와 문화에 매료되었고, 한민족의 우수성을 확인한 헐버트는 조선의 근대화를 위하여 젊은이들의 꿈을 키우는 데에 앞장섰다.

같은 물을 마시고도 소가 마시면 우유가 되고 뱀이 마시면 독이 된다던가. 그 당시 함께 공부한 학생 중에 훗날, 이한응 열사는 나라를 위하여 목숨을 바쳤고, 이완용은 민족과 나라를 팔아먹은 매국노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