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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북선 승전 뱃길을 따라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우리나라는 배를 설계하고 만드는 조선술이 발달했다. 고대부터 한민족은 육로 개척의 어려움을 알고 넓은 바다로 뻗어 나갔다. 신라의 대신 장보고는 중국과 한반도를 잇는 국제무역기지 청해진을 설치해 동북아시아 뱃길이 열었고, 청해진을 중심으로 뱃길이 열린 신라는 해상 활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동해에서 동춘호를 타고 러시아를 다녀오면서, 거센 풍랑에도 흔들림 없는 우리의 선박기술이 뛰어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강가에 사는 사람들은 먹을거리를 구하고 물자를 운송하기 위해 배를 만들었고, 전쟁의 승리를 위해 강과 바다에서 배를 사용하면서 대한민국 숙련된 명장들의 선박 기술력은 세계 최고를 자랑한다.

 고려 시대에도 내륙지방의 세곡을 선박으로 운송하였으며, 조선의 수도가 한양이 되면서 한강 주변에 나루가 많이 생겼다. 사람도 물자도 한양으로 몰려 경기도에는 나루터를 관리하는 벼슬인 도승渡丞(9)을 두었다. 충청도나 강원도에서 농산물이나 임산물을 싣고 하류인 한양으로 내려 왔다가, 생선과 소금, 생활용품을 사서 돌아갔으며, 파주의 낙하나루, 임진나루, 두지나루, 고랑포에서도 파주의 특산물 쌀과 콩 인삼 등을 싣고 가 마포나루에서 해산물과 소금, 진귀한 물건을 싣고 오기도 하였다. 두지리 나루는 지금도 임진강에 황포돛배를 띄워 자장리 고랑포 구간 옛 뱃길을 왕복 운행하는데, 40만 년 된 임진강 주상절리와 돌단풍을 감상할 수 있다.

 거북선 하면 누구나 임진왜란 때 나라를 구한 이순신 장군을 떠올리지만, 그보다 180년 전 임진강에 거북선이 떴다는 기록이 있다. 임진각 관광안내소 내에는 조선 최초 거북선 원형모형이 진열돼 있고, 임진강에서 왜적으로 가장한 배와 전투 훈련하는 동영상이 방영된다. 1413(태종 1325) 태종실록 25권 의하면 왕이 임진도를 지나다가 거북선과 왜선으로 꾸민 배가 서로 해전 연습을 하는 장면을 자세히 지켜보았다-上過臨津渡 觀龜船 倭船相戰之狀는 기록이다. 조선 초기에도 왜구의 침입이 빈번했기에 조선 수군은 미리부터 임진강에 거북선을 띄우고 왜적으로 가장한 배와 전투 훈련을 하였다.

 임진강 거북선은 조선 최초의 거북선으로, 임진왜란 당시 조선 수군의 승리를 이끈 이순신 거북선의 원형이 된다는 점에서 그 가치를 높이 평가한다. 동영상을 보면서 조선 초기와 후기의 거북선을 비교해 보았다. 임진강 거북선은 전체 길이가 19.6 미터, 높이 5.99 미터, 8.15 미터, 구조 2, 총통 8, 10, 승선 인원 60명이었으며, 조선 후기 거북선은 전체 길이 24.0 미터, 높이 5.67 미터, 9.64 미터, 높이 부분 3, 16, 총통 14, 승선 인원은 125명이다. 후기에는 노와 총통 수가 늘었고, 전체 길이가 길어짐에 따라 승선 인원이 배 이상 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조선 초기부터 임진강에 거북선을 띄우고 전투 훈련을 하였는데, 붕당 정치로 국론이 분열되어 왜적의 침략에 대처하는 국가 방위는 강화하지 못했다. 조선 중기 정치가이며 군사전략가인 율곡 이이는 십만 양병설을 외쳤지만 받아들이지 않았고, 일본을 다녀온 통신사 황윤길이 일본이 조선을 치러 올 것 같다며 전쟁에 대비할 것을 주장했지만, 조정 신료들은 정반대의 보고를 믿고 안일한 결론을 내렸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죄 없는 백성들은 목숨을 잃었고, 패망의 위기에 몰린 조선은 만신창이가 되었다. 그때 훈련을 하던 임진도臨津渡가 바로 조선의 14대 왕 선조가 왜적에 쫓겨 도성을 버리고 칠흑 같은 밤, 비를 맞으며 몽진을 떠난 임진나루이다.

올해는 경남 사천 방문의 해로, 전국 문화관광해설사들과 이순신 장군 승전뱃길을 따라가는 행사였다. 서둘러 점심을 먹고 해설사들은 사천 앞바다 삼천포 유람선에 올랐다. 우리가 탄 배는 3층으로 5백여 명이 넘는 해설사들과 승객들을 태우고도 자리가 남을 만큼 큰 배였다. 사천 앞바다를 미끄러지듯 흘러가는 갑판 위에서 사천해전 그날의 긴박한 전시 상황을 떠올리며 가슴이 뛰었다. 이곳이 바로 민족의 영웅 이순신 장군께서 처음으로 거북선을 타고 왜적과 싸운 바다이기 때문이었다. 임진왜란 때 새로 건조된 거북선 두 척은 사천해전에 처음 등장하였는데, 단순히 전투만을 위해 만든 것이 아니었다. 측면이 넓고 충격을 분산한 구조라 배가 잘 흔들리지 않고, 적선을 들이박고 병사들이 올라갈 수 있도록 튼튼하게 설계되었다.

1592529, 사천해전에서 최초로 거북선을 투입했다. 왜군이 통양리 연안에 배를 정박하고 뭍으로 올라와 진을 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 전라좌도 수군절도사 이순신은, 매복상태를 유지하면서 지형을 활용한 기습작전을 계획했다. 조선 수군의 움직임을 눈치챈 왜군은 재빠르게 항전 태세를 갖추었으나 적은 완전히 포위된 상태였다. 병사들은 포격 명령만 기다리는데, 이순신 장군은 침착했다. 쏘지 말고 배를 살리라는 지시는 적을 포획하고 왜선에 조선의 깃발을 꽂아 활용하려는 것이다. 조선의 바다는 단순한 전투장이 아니라 전략을 설계하는 무대가 되었다.

 왜군은 섬에 살면서도 해전에 익숙지 않았고, 조선에 비해 선박도 불리한 구조였다. 전라 좌수영의 함대 거북선 바닥은 거북의 배처럼 평평하여 방향 전환이 자유롭고, 상판은 덮개가 있어 적이 기습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용의 형상 뱃머리에선 불을 뿜었고, 전후좌우에서는 화포가 발사되었다. 썰물 때는 아군 함대가 작전상 후퇴하며 적선을 먼바다로 유인하였고, 시간이 흘러 만조가 되어 물살이 바뀌자 거북선 2척과 판옥선 23척은 왜군을 향해 돌격했다. 이순신 장군은 아군 주력선 판옥선보다 거북선을 먼저 적진에 보내 총통과 화포를 집중적으로 발사했다. 이에 놀란 왜군은 배를 버리고 사천 포구쪽으로 도주했다. 사천해전은 13척의 왜선을 격침하고 2백 명이 넘는 적을 전멸시키는 승리를 거두었다.

유람선을 타고 사천 앞바다를 바라보며 임진왜란 치열했을 전투 상황을 떠올린다. 평화로운 바다에는 그림 같은 섬과 기암괴석이 떠 있고, 작은 고깃배에서는 우리를 향해 손을 흔든다. 대나무를 이용해 멸치를 잡는 죽방렴도 간간이 보인다. 남해안 삼천포 해협에서만 생산되는 특산물 죽방 멸치는, 유속이 빠른 해협에 V자형 대나무 발을 설치해 밀물과 썰물에도 비늘 손상 없이 신선하고 맛이 뛰어나 귀한 대접을 받는다. 평온한 바다에서 우리가 이렇게 유람을 즐길 수 있는 것은 이순신 장군과 조선 수군들이 목숨 걸고 바다를 지켰기 때문이다. 사천해전 그날의 난중일기에는 나의 왼쪽 어깨에서 등까지 총알이 관통했고, 나대용 외 여러 사람이 총에 맞았다기록했는데, 유성룡에게 보낸 편지에 밤낮 뽕나무 잿물과 바닷물로 상처를 씻으나 좀처럼 낫지 않는다고 부상의 아픔을 털어놓았다니, 그 상처가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짐작을 해본다.

사천해전 40여 일 뒤 한산도 전투가 벌어졌다. 거북선은 앞세운 이순신 장군은 한산도 대첩에서도 전설의 학익진을 펼쳐 대승을 거두었다. 해적 출신인 왜장 와키자카 야스하루는 여러 육전에서 다양한 공을 세우고 임진왜란 수군으로 참전했으나, 한산도 대첩과 명량해전에서 굴욕적인 참패를 당했다. 60여 척의 왜선이 격침당하고, 남은 10여 척의 왜병들은 한산도에 배를 내버리고 퇴각했다. 와키자카는 살아남은 수군들과 달아나 무인도에 고립되어 미역을 따 먹으며 10여 일 표류하다 뗏목을 만들어 간신히 탈출했다. “적을 죽이지도 못하고 패배했다탄식하며 일본으로 돌아간 와키자카는 그때의 전시 상황을 그대로 기록했다. “나는 성급했고, 적은 침착했다. 나의 전술은 단순했지만, 그의 전술은 치밀했다. 나는 적장 앞에 꼼짝할 수가 없었다는 솔직한 고백은 그 당시 느낀 충격과 장군에 대한 존경이 드러난다. 한산도 대첩이 벌어졌던 음력 78, 치욕적인 날을 잊지 말자는 뜻으로 와키자카 집안에는 미역을 먹는 전통이 생겼다 한다. 적장임에도 불구하고, 와키자카는 동아시아 역사에서 압도적인 역경에 맞서 전세를 뒤집은 이순신의 뛰어난 전력과 지휘 능력을 증명하는 기록을 남겼다.

생즉사生即死 사즉생死即生은 임진왜란 당시 나라를 구한 이순신 장군의 좌우명이다. 명량해전에서 12척의 배로 130여 척의 왜적 함대와 싸워야 하는 극한의 상황에서 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요, 죽을 각오를 하고 전투에 임하면 살 것이다병사들을 독려하여 극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훌륭한 지휘관은 전투에서 이길 자리를 선택할 줄 알아야 하고, 뛰어난 심리 파악 능력이 있어야 한다. 그 당시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거북선으로 포격 위주의 전술을 구사하며 일시 집중타로 벽력같이 적선을 박살하는 전략을 사용했다. 두 차례나 백의종군하며 수많은 고난을 겪으면서도 충성과 용기로 조선을 구하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위대한 전술가로 지휘관이 가져야 하는 덕목을 모두 갖추고 거북선을 전략적으로 만들어 총 23번의 해전에서 23승을 거둔 충무공 이순신은 대한민국 역사상 가장 존경받는 위인이며, 불을 뿜는 거북선에서 호령하던 전술은 오늘날까지도 세계의 해군이 배우는 살아있는 전설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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