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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사년에 찾은, 파평윤씨 종중 묘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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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지임, 전의이씨 묘

강근숙 파주작가

선거철이 지나자 들썩이던 나라가 조용해졌다. 어느 때보다 치열한 정치적 투쟁과 갈등을 바라보며 예나 지금이나 권력을 쟁취하려는 경쟁은 변함없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근대사는 물론, 조선 시대에도 수많은 난과 사화가 일어났다. 4대 사화(무오사화, 갑자사화, 기묘사화, 을사사화) 중 하나인 을사사화는 왕권을 장악하기 위한 외척들 간의 권력다툼이다. 올해가 을사년이기도 하고, 을사사화乙巳士禍 주역들이 우리 고장 파주에 잠들어 있어 파평윤씨 정정공파 묘역을 다시 돌아보았다.

 중종中宗은 세 명의 왕비를 맞았다. 정비 단경왕후 신씨는 아버지가 연산군 처남이라 즉위 후 폐위되었고, 계비 장경왕후는 인종을 낳고 엿새 만에 세상을 떠났다. 중종은 윤지임의 딸을 두 번째 계비로 맞았는데, 그가 바로 그 유명한 문정왕후(1501~1561)이다. 윤임은 당시 어미 없는 조카, 원자를 위해 믿을만한 파평윤씨 가문에서 처녀를 천거했다. 문정왕후는 딸 넷을 낳는 동안 원자를 잘 보살폈으나, 경원대군을 출산하면서 자신이 낳은 아들을 왕위에 올리려는 꿈을 꾸었다.

 중종이 38년간 치세를 마친 후, 장경왕후 아들 인종이 즉위했다. 효심이 깊고 너그러우며, 여자를 멀리하던 인종은 병약하여 9개월(제위1544.11.20.~1545.7.1.)남짓 왕위에 머물다 후사도 남겨놓지 않고 짧은 생을 마감했다. 문정왕후의 아들, 12살 명종이 즉위하면서 발생한 을사사화는, 윤임 일파가 윤원형에게 화를 입은 사건이다. 윤임尹任(1487~1545)은 인종 승하 두 달 만에 계림군桂林君(월산대군의 손자)을 왕으로 옹립하려 했다는 고변으로 남해로 유배 가던 중, 충주에서 세 아들과 함께 사사되었고, 아무 죄 없는 봉성군鳳城君(중종의 5) 또한 왕위를 넘봤다는 거짓 자백에 의해 사사되었다.

 윤임은 파평윤씨 선산에도 묻히지 못했다. 치열한 정치 싸움에 억울하게 죽어간 사람이 어디 그들뿐이겠는가마는, 종친들 간의 권력다툼으로 세 아들과 함께 사사된 영혼에게 술 한 잔 부어놓고 싶었다. 지리를 잘 아는 지인에게 도움을 청해 고양시 덕양구 향동동주소를 들고 찾아 나섰으나 쉽지가 않았다. 부동산 사무실과 지나가는 동네 주민에게 물어봐도 윤임이 누구냐고 되묻는다. 아파트를 둘러싼 산등성이마다 비석이 보이는 곳을 찾아 두어 시간 오르내리는데, 산자락 가득 연보라 꽃을 피운 광대나물이 쉬었다 가라고 손을 흔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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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번의 묘

 파평윤씨 종중 묘역을 가기 전에 정정공파 사무실로 향했다. 동행한 김태회님의 친구 윤상수 회장이 반겨 맞으며 보관 중인 자료와 유물을 보여주었다. 무엇보다 정희왕후 어머니 인천이씨의 묘역에서 나온 백자 묘지석墓誌石 여섯 편과 지석을 넣었던 돌함은 보물로 지정된 귀한 자료였다. 박물관에 보관했던 것을 찾아온 것이라는데, 말로만 듣던 유물을 직접 보면서 눈이 휘둥그레졌다. 다른 묘역에서 나온 지석이며 오래된 문서 등 유물이 가득한 자료실에서 명문대가는 역시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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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이씨 묘

윤번, 인천이씨 신주.jpg윤번, 인천이씨 신주.jpg

파주시 교하 당하리 정정공파貞靖公派 종중 묘역은 세조世祖가 내려준 땅으로, 7백여 기에 이르는 분묘 중에 부원군과 정승, 판서, 참판의 묘 96기가 경기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봉분의 형태와 석물 묘비 등 한곳에서 시대별로 관찰 할 수 있는 우리나라 유일의 묘역 박물관이라 할 수 있다.

술이홀, 파해평사현, 청정구현으로 불리던 우리 고장은 파평윤씨 가문에서 왕비가 나오면서 파주목坡州牧으로 승격되었다. 조선은 유교의 나라였음에도 정희왕후는 아버지인 파평부원군坡平府院君과 어머니 인천이씨仁川李氏의 명복을 빌기 위해 서른여섯 칸 절을 지었고, 세조는 성재암聖在庵이란 편액과 목불木佛을 하사하는 한편, 수호승군 이십여 명을 파견하여 지키게 하였다. 우리 일행은 인적없는 성재암에 들어 부처님께 삼배하고, 윤번과 인천이씨 신주 앞에서 화려하고도 아름다웠을 왕비가 부모의 왕생극락을 빌었을 모습을 그려보았다.

파평윤씨 선산에는 부원군 묘가 세 기나 된다. 세조의 장인 정정공貞靖公 번璠은 파평윤씨 15세손 중시조로 하여, 중종의 계비 장경왕후 아버지 윤여필尹汝弼(18세손)과 문정왕후 아버지 윤지임尹之任(19세손)을 비롯한 직계 후손들의 묘가 36만 평에 달하는 넓은 땅에 자리한다. 파평윤씨 종중 묘역은 파주의 유적답사에 빼놓을 수 없는 곳으로 고인돌이 군데군데 놓여있어 선사시대부터 명당이었음을 짐작게 한다. 모내기가 한창인 들판을 가로질러 산길을 올라가면 왕릉 못지않은 큰 규모의 묘역이 나온다. 상단에 윤번(1384~1448), 하단에는 부인 인천이씨

*윤번과 인천이씨 신주

(1383~1456) 묘역으로 봉분이 정방형이다. 이곳 파평윤씨 정정공파 묘역은 수백여 기의 묘가 자리하고 있어 찾기 쉽도록 차례대로 돌에 번호를 새겨 놓았다. 당연히 정정공 윤번이 1번이다.

인천이씨 지석.jpg 윤번은 딸이 왕비로 책봉되기 전에 죽고, 인천이씨는 왕비에 오른 후 세상을 떠났기에 얼핏 봐도 부인의 묘역이 더 웅장하게 꾸며졌음을 알 수 있다. 세조가 등극한 다음 해에 장모가 죽었으니 얼마나 성대하게 장례를 치렀겠는가. 왕위를 찬탈한 세조는 강력한 왕권을 보여주듯, 아마도 국장 버금가는 장례를 치렀으리라. 묘역 한가운데 서 있는 거대한 장명등은 그 시절 파평윤씨 세도를 짐작게 한다. 더욱 관심을 끄는 것은 2001년 묘와 상석 사이에서 발견된 묘지석墓誌石이다. 묘역을 오기 전에 사무실에서 본 바로 그 백자 묘지석과 돌함이 인천이씨 묘역에서 나온 것이다.

재실에서 올려다보면 파산부원군 윤지임 신도비가 우뚝하다. 이수와 비신이 하나의 대리석으로 비석은 이무기 두 마리가 여의주를 가운데 두고 다투는 형상으로 조각되어 묘역의 주인이 높은 신분임을 알려준다. 싱그러운 제비꽃이 다문다문 핀 묘역 맨 위쪽에는 왕릉 못지않은 윤지임(1475~1534)과 전의이씨 쌍분이 자리한다. 2002년 교하 신도시가 개발되면서 선산으로 도로가 지날 때, 이곳에서 조금 떨어진 종중 묘역에서 모자母子 미라가 발견되어 학계가 떠들썩했다.

*인천 이씨의 지석

윤지임 묘역에서 몇 발짝 가면 윤원형 묘역이다. 윤원형은 문정왕후의 소생 경원대군慶原大君을 세자로 책봉하려고 세자의 외숙 윤임과 알력이 생겨 외척 간의 세력다툼이 시작되었다. 장경왕후 오빠 윤임尹任(1487~1545)은 원자를 보호하였고, 문정왕후는 동생 윤원형과 함께 본격적인 대립이 시작되면서 파평윤씨는 대운大尹과 소윤小尹으로 갈리게 된다. 인종이 즉위 9개월 만에 승하하고, 12살 어린 명종을 대신해 문정왕후의 수렴청정을 시작하면서 정권은 소윤파 윤원형에게로 넘어갔다. 문정왕후는 조선의 통치자가 되어 아들 명종을 윽박지르고 동생 윤원형과 함께 무소불위 권력을 휘둘렀다. 윤원형은 천하의 권력을 독점하자 자신에게 불만을 품은 친형 윤원로까지 문정왕후와 한통속이 되어 유배 보내 사사했다. 애첩 정난정 손을 잡고 온갖 탐욕과 악행을 일삼았으며, 본처를 죽게 하고 천민인 그녀를 정경부인 자리에 올려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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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원형 묘, 뒷편 정난정 묘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 권불십년權不十年이란 말은 권력은 영원하지 않다는 경고의 의미를 담고 있다. 문정왕후가 죽자 윤원형(1503~1565)과 정난정의 횡포가 만천하에 드러나고 탄핵을 요구하는 상소가 빗발쳤다. 그동안 눈치만 보던 명종은 외숙부를 차마 사사하지 못하고 황해도 강음현으로 귀양을 보냈다. 어느 날, 암행어사가 지나가는 행렬을 보고 몸종이 뛰어가 정난정에게 알렸는데, 사약을 가져오는 줄 알았던 그녀는 미리 준비한 독약을 마시고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그 모습을 본 윤원형은 식음을 전폐하고 울며불며 괴로워하다 며칠 뒤 그 뒤를 따라갔다 한다. 역적 취급을 받던 윤원형은 자손들만 알고 몰래 제사를 지냈는데, 훗날 매국노 이완용에 의해 복권되어 묘비를 세울 명분을 주었다. 윤원형 묘 뒤편 웅크린듯한 정난정 묘는 사극 여인천하가 인기를 얻은 후 봉분이 점점 높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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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필의 묘

역사는 이긴 자의 기록이라 했다. 파평윤씨 묘역 답사를 수없이 다녔어도 역사 기록이 없는 윤여필(1466~1555) 묘역을 가본 적이 없었다. 윤상수 회장으로부터 대윤·소윤 가리지 않고 종친을 아우른다는 이야기를 감명 깊게 들으며 한참을 걸었다. 윤여필 묘역(교하읍 당하리 산4~1)에는 신도비가 없었다. 석물이 단출하고 봉분이 작아 파원부원군坡原府院君 윤여필지묘尹汝弼之墓라는 묘표가 없었다면 누구의 묘인지 알 수 없었을 것이다. 을사사화 때, 윤여필은 80세 노령에다 선후先后의 부친이라 간신히 화를 면하고 용인현에 부처되었다가 6년 만에 풀려났다. 쟁쟁하던 왕실 외척이 하루아침에 풍비박산되었으니, 살아도 산목숨이 아니었을 것이다. 윤여필의 납작한 봉분이 꼭 서슬 퍼런 권력에 기죽은 모습처럼 보였다.

권력은 부모 형제와도 나누지 않는다. 장경왕후 아버지 윤여필과 문정왕후 아버지 윤지임은 가까운 일가였지만 윤원형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정적을 제거했다. 문정왕후를 등에 업은 윤원형 일파를 견제할 세력은 아무도 없었다. 윤지임은 온화하고 현명했다는데, 아마도 그가 살아있었다면 칼자루를 마구 휘두르는 막내아들에게 그러다간 참혹한 최후를 맞는다타일렀을지 모른다. 명예와 출세를 싫어할 사람 있을까마는, 높은 자리에는 책임과 의무가 뒤따른다. 권력을 거머쥐면 못할 일이 없다. 그러나 그 막강한 힘을 나라 위해 쓰지 않고 일신의 영달만을 꾀한다면, 후세는 더럽혀진 이름을 영원히 기억할 것이다. ‘한 인격을 시험하려면 권력을 주라고 했다. 꽃잎 흐드러진 을사년 봄날, 을사사화 주인공들이 잠든 파평윤씨 묘역에서 역사의 교훈을 되새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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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석을 넣었던 돌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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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이씨 지석 큰모양 6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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