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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의 효심이 가득한 소령원 찾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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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의 어머니 숙빈최씨 묘 -소령원昭寧園

강근숙 파주작가

 숙빈최씨(1670~1718)는 숙종의 후궁으로 조선조 제21대 임금 영조의 어머니이다. 반상班常의 구별이 뚜렷한 조선 시대에 무수리 출신으로 숙종의 승은을 입어 후궁이 되었고, 내명부 최고 품계인 숙빈淑嬪에 올랐으니 하루아침에 신분 상승을 한 행운의 여인이다. 허드렛일을 하던 나인이 왕의 여자가 되었고, 왕의 어머니가 되었으니 하늘에서 별을 딴 여인 아닌가.

 숙빈최씨는 7세의 나이로 궁에 들어갔다. 전해오는 일화에는 인현왕후(1667~1701)의 아버지 민유중이 영광군수로 있을 때 관아 문 앞에서 놀고 있는 불쌍한 아이를 데려다 키웠는데, 민씨가 간택되어 궁으로 들어갈 때 몸종으로 딸려 보냈다 한다. 숙빈최씨는 어려서 입궁하여 24세에 숙종의 승은을 입어 후궁이 되기까지는 한낱 중궁전 무수리로 세상 사람 아무도 그를 알아주지 않았다.

 숙종 시대는 조선왕조를 통틀어 당파 간의 정쟁이 가장 심했던 기간이다. 숙종 155월에는 기사환국己巳換局과 더불어 인현왕후가 폐위를 당하고 희빈 장씨가 중전 자리에 앉게 된다. 폐위는 곧 서인으로 강등되는 것이기에 시중을 드는 나인도 데리고 나갈 수 없는 처지였다. 그 후 4년쯤 지난 어느 날, 남인이 정권을 독점하여 중전 장씨에 대한 감정이 악화되어 숙종은 잠을 못 이루고 궐내를 거닐다가 오직 한 방에 불빛이 빛나는 것을 보았다. 폐위된 중전의 생일날 음식을 차려놓고 복위를 비는 모습을 가상하게 여긴 숙종은 최씨에게 마음이 끌렸다. 나인이 후궁으로 신분이 바뀌는 극적인 순간이었다.

 숙빈최씨는 무수리 신분에서 6년 만에 내명부 최고 품계에 올랐고, 그동안 왕자 셋을 출산했다. 첫째와 셋째는 요절하였으며, 숙빈최씨보다 오래 살아 사후를 돌보아준 아들은 둘째인 금昑이 연잉군延礽君 이었다. 숙종은 인경왕후, 인현왕후, 인원왕후 세 명의 정비가 있었으나 자식을 얻지 못하고 장희빈과 숙빈최씨에게서 아들을 얻었다.

왕자를 낳은 공으로 최씨는 정1품 숙빈에 올랐다. 금昑이 태어났을 때 대신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환시宦侍와 의관醫官에게 내구마內廐馬를 상으로 내려준 것을 보면 아들을 얻은 숙종의 기쁨이 얼마나 컸는지 짐작이 간다. 숙빈최씨의 인품은 천부적인 바탕이 침착하고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한다. 연잉군과는 모자간이면서도 정을 나눌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연잉군은 후궁의 몸을 빌어 태어났을 뿐, 정식 어머니는 중궁전 왕비였고 왕비의 자녀라는 개념으로 자신의 소생에게 존댓말을 써야 했으며 어머니 칭호를 들을 수가 없었다.

 숙빈최씨가 갑작스레 병색이 짙어졌다. 숙종의 권유로 사제로 나가 요양을 하기도 했으나 끝내 차도를 얻지 못하고 171839, 49세로 생을 마감했다. 같은 해 512, 양주 고령동 옹장리 묘향卯向 언덕, 지금의 파주시 광탄면 영장리에 장사지냈다. 이때 연잉군은 25세로 왕세제에 오르기 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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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궁궐의 음지에서 살았던 후궁들의 상례는 일반인과 별반 다르지 않았으나, 숙빈최씨는 연잉군이라는 유력한 왕자가 있는 후궁이었기에 장례의 격은 왕족의 예장으로 연잉군 주관하에 치러졌다. 상례에 필요한 각종 물자와 비품은 최고로 궁중의 여러 부서에서 지원했으나, 정승과 판서를 비롯하여 조정의 백관들도 참여하지 않은 것은 물론 응당 있을 법한 조문이나 부의도 하지 않았다.

 무수리에서 후궁 반열에 오른 왕실 여성으로 축복받은 인생의 주인공인 숙빈최씨를 연잉군은 어떻게 바라보았을까. 자신의 어머니가 무수리였다는 것이 응어리로 남았고, 평생 측은하고 불행한 여인이라는 시선을 거두지 못했다. 연잉군이 어머니에게 지난 시절 제일 힘들었던 것이 무엇이었냐고 물었다.

숙빈최씨는 침선針線이라 대답했다. 그 말 한마디만으로도 왕실의 음지에서 나인들이 얼마나 힘겨운 세월을 살아야 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왕의 이부자리는 날마다 새것으로 바뀌는데, 영조는 왕이 되어서 이부자리를 매일 바꾸는 일을 하지 못하게 하였다.

 보위에 오른 이후 영조는 어머니를 생각하는 마음은 적극적인 형태로 나타났다. 즉위 다음 해에 무리를 감수하면서 숙빈최씨 묘 들머리에 거대한 크기의 신도비를 세우게 했다. 신도비는 정2품 이상의 벼슬아치의 무덤의 약 100m 지점에 세우며 인근을 지나는 사람들에게 묘의 위치를 알려주는 기능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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굳게 닫힌 비각을 열자 머리를 들어 올려 정면을 응시하는 거북이가 여의주를 물고 쳐다본다. 머리 위쪽에는 왕王자가 크게 새겨져 있고, 옥개석은 대궐의 지붕 모양에 용을 형상화하여 품계가 낮았던 어머니를 위로하는 영조의 효심을 엿볼 수 있다. 신도비의 귀대석龜臺石을 보면서 오직 사람의 힘으로만 가능했을 조선 시대에 이 방대한 돌을 어떻게 운반했을까 궁금해진다.

『淑嬪崔氏資料集-숙빈최씨자료집』을 보면 석재를 끌어다 운반하는데 1만여 명이 동원되었다 적혀있다. 운반과정에서 백성들의 농경지에 상당한 피해가 예상되고, 또 칙사의 행렬이 지나가면 이 지역 백성들의 고통과 원성이 클 것이라는 조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영조는 이를 멈추지 않고 강행했다.

 영조는 52년 재위 기간 중, 3459회 경연과 50여 차례 거리 행차를 나섰다. 어느 날 변복을 하고 무악재에서 한 노인을 만났다. 행색이 초라한 노인에게 어디서 무엇을 하는 누구냐고 물었을 때, ‘고령능 근처에서 숯을 구워 내다 파는 김세휘라고 대답했다.

영조는 고령능이라는 말이 고마워 김세휘金世輝를 종9품 능참봉에 봉하여 대대로 소령원을 지키게 하였으며, 그의 자손에게는 군역을 부과하지 말라는 명을 내렸다. 노인과의 대화를 보더라도 어머니를 생각하는 마음이 얼마나 깊은지 알 수가 있다. 지금은 문화재청에서 능과 원을 관리하지만, 후손은 아직 그곳에 살고 있다.

 소령원지『昭寧園誌』에는 소령원산도昭寧園山圖와 제물진설도祭物陳設圖, 친제진설협탁도親祭陳設俠卓圖, 친전향축례親傳香祝例, 기명록器皿錄과 어제‧ 어필 묘표와 내용까지 자세히 기록되어있다.

중간중간에 수봉관 수결守奉官 手決이란 글자와 숭정기원후삼계사계추상원 수봉관윤복후 근서-崇禎紀元後三癸巳季秋上浣 守奉官尹復厚 謹書라 쓴 내용이 보인다. 글씨 또한 명필이다. 1630(인조8), 능보다 위계가 낮은 원園에도 능참봉과 같은 직책 종9품 수봉관守奉官이 소령원과 수길원을 맡아 지키게 했음을 알 수가 있다.

 봉분 앞에는 有明朝鮮國後宮首陽崔氏之墓-유명조선국후궁수양최씨지묘라 새긴 묘표를 세웠다. 유명有明이란 두 글자가 거슬려 지워버리고 싶다. 조선왕실과 사대부들은 명나라가 망한 지 80년이 다 되었는데도 묘표에 유명조선국有明朝鮮國과 숭정기원후崇禎紀元後를 관행처럼 사용하고 있었다.

정세를 인식하지 못한 척화파로 인하여 정묘호란병자호란을 겪으며 온갖 수모와 치욕을 당하고서도 말이다. 괜한 생각을 떨쳐버리려 비신 위 가첨석을 바라본다.

묘역을 많이 다녀봤지만, 이렇듯 세밀하게 조각된 가첨석은 처음 본다. 실제 건물의 지붕을 얹어놓은 듯 서까래가 정교하여 뛰어난 장인의 솜씨가 느껴진다. 중앙에 자리 잡은 상석과 사각 장명등, 양옆에는 망주석과 문석인 석마를 배치했다. 밖을 향하여 묘역을 지키는 석호石虎와 석양石羊 등 이곳에 설치된 석물은 영조 시대 최고의 기술자 일류 장인들이 동원되었다.

석물에 대한 총책임은 최천약과 김하정이 맡았고, 석물의 세밀한 부분에 뛰어난 각수刻手 우흥민이 참여했다. 그들의 손길로 다듬은 비석과 석물은 위대한 예술성을 지닌 문화재로 남았다.

영조는 왕위에 오른 자신의 모습을 어머니께 보여주지 못한 것을 늘 안타깝게 생각했다. 원소 아래 비각 2동에는 어제‧어필로 정성을 다한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숙빈최씨가 세상을 떠난 24(영조 20)년 후 묘호墓號를 소령昭寧이라 하고 표석淑嬪海州崔氏昭寧墓-숙빈최씨소령묘을 세웠다. 또한 숙빈최씨가 내명부에 오른 회갑이 되는 해에는 시호를 화경和敬으로 올리고, 묘호廟號를 육상묘毓祥廟에서 육상궁毓祥宮으로, 소령묘를 소령원으로 추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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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령원비 朝鮮國和敬淑嬪昭寧園-조선국화경숙빈소령원후면에는 계유(1753, 영조29)6, ! 어머니가 봉작 받은 지 회갑이 되었다. 앞뒷면을 옛날을 더듬어 눈물을 머금고 내가 쓴다고 기록되어있다.

 소령원은 조선 시대 13기의 원소 중에 수복방이 유일하게 남아있는 곳으로, 정자각 우측 산자락에는 어머니를 시묘한 여막지廬幕址가 남아있다. 소령원은 소문난 명당으로 풍수가들이 즐겨 찾는 곳이다.

언젠가 풍수 공부를 한다는 이로부터 비공개인 소령원 해설을 부탁받았는데, 유적지 해설에는 관심이 없고 산세를 봐야 한다며 묘소 뒤쪽으로 올라간다. 평소 풍수학에 관심이 있어 한 수 배울 욕심으로 따라가려니 숨이 턱에 찬다. 묘소 위쪽으로 이렇게 높은 산줄기가 있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그는 산꼭대기까지 올라가 보고서야 이렇게 좋은 묫자리는 처음 본다감탄을 한다. 산줄기에 뭉쳐있는 혈 자리와 묘소를 겹겹이 싸고 있는 산자락의 설명을 들으며 문외한인 나도 뭔가 알 듯하여 고개가 끄덕여진다. 왕릉 부럽지 않은 숙빈최씨 원소, 용이 꿈틀대는 형태의 긴 사초지 아래 정자각이 조그맣게 내려다보인다.

사초지는 생기 저장 탱크나 다름없다. 영조가 보위에 올라 52년 간 왕의 자리에 있었으며, 83세까지 오래 산 것은 사초지에 가득한 기운 때문일 것이라 하였다.

 영조는 소령원 인근의 보광사普光寺를 숙빈최씨 원찰로 삼았다. 대웅보전과 만세루를 중수하고, 매월 초 어머니를 만나러 다녔다. 고령산 앵무봉 넘기가 힘들었던지 더 파라명하여 더파기고개라 불렀으며, 고개가 높아 곡식을 됫박으로 담아 넘는다 하여 됫박고개라고도 부른다.

보광사 빛바랜 대웅보전大雄寶殿편액은 영조의 친필이라 갈 적마다 눈여겨본다. 뒤편으로 몇 걸음 옮기면 숙빈최씨 위패를 봉안하고 명복을 빌던 어실각御室閣이 보인다. 어실각을 지을 때 영조는 자기를 대신해 어머니를 지켜주기 바라며 심었다는 향나무 한그루는, 효심을 아는 듯 3백 년 동안 그 곁을 지키고 섰다.

관련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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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인석 / 소령묘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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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령원 산도어실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