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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주의 고인돌을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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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은리 고인돌

우리나라 고인돌은 4만(북한 1만)여 기에 이른다. 고인돌은 큰 돌을 괴었다는 뜻의 굄돌, 고인돌, 지석묘支石墓라 부른다. 전 세계 6만여 기의 고인돌 중에 중국, 일본과 영국, 프랑스에서 발견되는 숫자보다 우리나라는 더 많은 66%를 보유하고 있다. 과거에 이것이 무엇인지 몰라 파손된 것까지 합한다면 아마 더 많은 고인돌이 남아있었을 것이다. 강화, 고창, 화순에는 수십 기에서 수백 기의 고인돌이 밀집되어 있으며, 2000년에 그 가치를 인정받아 세계 고인돌 중 유일하게 우리나라만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돌무덤은 선사시대부터 이어져 내려온 정형적인 무덤 양식으로 요동 반도에서 한반도 남쪽까지 분포되었다. 이십여 년 전, 고인돌에 매료되어 가까운 강화는 물론, 멀고 먼 화순까지 찾아다녔다. 화순에서 만나는 고인돌은 그 자체가 거대한 바윗덩이였다. 계곡을 따라 4~5킬로에 분포된 100톤에서 200톤이 넘는 고인돌을 보면서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발파 기술이 없던 청동기 시대에 당시 사람들은 이 바위를 어떻게 옮겼을까. 이렇듯 거대한 돌무덤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은, 이 지역에 사람들이 많이 살았으며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사회를 이루었다는 증거였다.

고인돌은 자연 형태 그대로 사용한 것이 아니다. 먼저 평평한 돌을 골라 나무쐐기를 박아 물을 부어 쪼개고, 단단한 돌이나 뾰족한 도구로 쪼거나 깎아서 원하는 모양을 만든다. 중장비 없이 채석된 거대한 돌을 세워질 장소까지 운반하는 과정은 엄청난 기술과 노력이 필요했으리라. 산꼭대기라면 언덕을 이용해 밀거나 굴렸겠지만, 가파른 산으로 옮길 때는 통나무를 바닥에 깔고 돌을 그 위에 올려 밧줄을 이용해 끌어올리느라 마을 전체의 인력이 동원되었을 것이다. 고인돌이란 단어는 원시시대를 떠올리지만, 고인돌을 만든 선사인은 미개인이 아니었다. 거대한 암석을 필요한 크기로 잘라내는 기술, 받침돌과 덮개돌에 닿는 면이 맞물리도록 깎고 쪼는 석공기술인 그랭이 공법을 사용할 정도로 깨어있었다.

까마득한 옛날, 우리 민족은 시신을 매장할 때 돌무덤을 만들었다. 시신을 놓고 돌을 무더기로 쌓아 올렸다 해서 돌무지무덤(積石塚)이라 하고, 땅을 파서 작은 석관에 시신을 넣고 나머지 공간에 부장품을 같이 넣은 형태로 돌을 덧댓다고 해서 돌덧널무덤이라 하였다. 무덤방에 4개의 돌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덮개돌을 올려놓은 탁자형 고인돌은 요동 반도에서 한반도 남쪽 지역까지 널리 퍼져있다. 깬돌을 사용하여 지하에 무덤방을 만들고 작은 굄돌 위에 덮개돌을 올려놓은 바둑판식 고인돌은 전라남도 화순지역에 밀집되어 있으며, 땅을 파서 무덤방에 석관을 둔 개석식 고인돌은 한반도 전역에 분포한다.

우리 고장 파주에는 고인돌이 많아 상지석리上支石里, 하지석리下支石里라 부르는 마을이 있다. 다율리, 당하리에는 1965년 100여 기가 넘는 고인돌 군락이 발굴되었고, 문산천 서쪽 낮은 언덕 월롱 덕은리 옥석리 유적에도 20여 기의 고인돌이 널려있다. 적성 가월리 주월리에서 주먹도끼와 석기, 찍개 등 많은 유물이 출토되었고, 강변 야산에 수많은 고인돌이 남아있는 것은 임진강이 흐르고 넓은 구릉지가 형성된 파주 일대는 선사인들이 살기 좋은 주거지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율리 당하리 고인돌은 군부대 시설물 공사 과정에서 대부분 파괴되었다. 현재 20여 기만 남아있는 가운데 상태가 양호한 6기가 경기도 기념물 129호로 지정되었다. 산비탈이나 나무 아래를 살펴보면 제 자리를 벗어난 고인돌이 여럿 보인다. 화덕자리가 발견된 움집터에서는 구멍무늬토기, 민무늬토기, 간돌검, 가락바퀴 등 다양한 유물이 출토되어 당시 사람들의 생활을 짐작하게 한다. 고인돌 중 가장 큰 덮개돌에는 성혈星穴이 암호처럼 남아있다. 큰 구멍은 밝은 별, 작은 구멍은 어두운 별을 의미하는 성혈은 아무리 들여다 봐도 어느 하늘 별자리인지 알 수가 없었다.

초록이 출렁이는 날, 월롱면 덕은리 고인돌을 보러 갔다. 국가 사적 제148호 ‘옥석리 유적’에는 산비탈에 아무렇게나 뒹구는 고인돌과 보호막 안에 온전한 형태로 남아있는 고인돌이 산등성이를 따라 이어진다. 덕은리 고인돌은 고창이나 화순지역처럼 크지는 않지만, 청동기 시대 탁자식 구조를 가장 잘 보여주는 고인돌이 산줄기에 퍼져있었다. 산등성이 맨 위쪽 보호막 안에 세 기의 작은 고인돌은 마치 한 가족이 둘러앉은 것처럼 다정해 보인다. 산 아래 움집터에서 토기, 간돌칼, 돌도끼가 출토되었고, 화덕자리에서 발견된 숯을 방사성탄소연대측정 결과 기원전 7세기 전후 유적으로 밝혀졌다. 인적 없는 능선을 따라가며 산쑥을 뜯다가 이곳에서 가장 큰 개석식 고인돌 또 하나를 발견했다.

일행은 덕은리 고인돌을 둘러보고 맞은편 채석한 흔적이 발견됐다는 ‘돌산’을 가보자 하였다. 산 아래는 문산천이 흐르고 거대한 엘지디스플레이가 산업단지가 훤히 내려다보인다. ‘돌산’ 또는 ‘옥돌내’라 부르는 이 동네는 조선 시대 병무관兵武館이 있던 자리이다. ‘옥돌내’는 ‘문산천 옆에 귀한 돌이 나는 곳’이라는 지명으로, 덕은리 고인돌군과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학술적인 조사나 암석성분 분석을 통해 입증된 사실은 아니라 해도, 구전이나 민간 전설로 전해지는 ‘옥돌내’라는 지명은 고인돌과 관련성이 없다고 볼 수는 없다. 이 지역을 훤히 알고 있는 지인은 “문산천에서 수영하다 빠져 죽을 뻔했다”는 어릴 적 이야기를 하며 채석장으로 차를 달렸다. 코앞에서 경비원이 길을 막는다. 바로 뒤, 몇 발자국만 가면 채석장 자리라는데, 금고 회사가 들어서 갈 수가 없었다.

고인돌은 선사인들의 삶을 알려주는 대표 유적이다. 거대한 고인돌이 처음 발견했을 당시 지배자 족장의 무덤이라고 여겼는데, 여자와 어린아이의 유골이 발견되면서 신분 성별에 관련 없이 고인돌 무덤을 쓴 것으로 밝혀졌다. 전국 여러 곳에서 유골과 함께 다양한 유물이 출토되었고, 300기가 넘는 고인돌 덮개돌에서 별자리 홈이 발견되었다. 우리 민족은 오래전부터 하늘의 별을 관찰하며 가뭄이 들것인지, 풍년이 들 것인지, 나라의 길흉을 점쳤다. 평양시 상군 번동 고인돌 덮개돌에는 북두칠성을 비롯한 80개의 홈이 파였는데, 약 5천 년 전 고대 별자리로 알려졌다.

가장 오래된 고인돌은 홍산 문화권에서 발견되었다. 약 6500년 전, 우하량 일대를 중심으로 한 문명권을 이룬 동이족은 우리 민족의 조상이다. 고인돌은 단순 무덤이 아니라, 선사인이 제천의식을 행하던 제단으로 추측한다. 배달국이나 고조선 시대 중심지였던 홍산에서 한반도 남쪽으로 이어지는 고인돌 문화는 매장과 신앙이 결합한 제단 형태의 탁자식, 바둑판식, 개석식으로 변형 발달하였다. 고대 별자리를 그대로 돌에 새겨 놓았다는 것은, 한민족은 이미 천문관측에 밝은 문명인이었음을 의미한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별자리가 그려진 고인돌이 있고, 고구려의 하늘 1467개 별자리가 새겨진 천상열차분야지도天象列次分野之圖를 보유한 우리 민족은 고인돌과 천문학의 원류原流라 할 수 있다. 한반도에 분포된 4만여 기의 고인돌은 반만년 이상 이어져 내려온 빛나는 우리의 역사를 상징하는 자랑스러운 세계문화유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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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은리 고인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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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율리, 당하리 고인돌

덕은리 고인돌 (3).jpg*덕은리 고인돌

성혈이 파인 다율리, 당하리 고인돌.jpg*성혈이 파인 덕은리, 다율릭 고인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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