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하 탄현 지역의 옛 포구와 나루
*1861년 철종 12년에 편찬된 목판본 대축척 조선지도책 ‘대동여지도’
연천 고랑포구 에서 교하 탄현 지역의 포구와 나루를 생각해본다. 파주 교하와 탄현 지역은 예전에는 교하현이라 불렀다. 교하는 조선시대 독립된 군현이었으며 신라경덕왕때 부터 부르던 지명이다. 교하동, 운정동, 금촌동, 탄현면 일대가 교하군에 속했고 1914년 파주에 통합되었다.
1861년 철종 12년에 편찬된 목판본 대축척 조선지도책 ‘대동여지도’ 의 파주와 교하를 보면 반석과 석곶이 나온다. 반석은 신촌리와 갈현리 부근이 중심이었을 것이다. 갈현리는 교하현 읍치가 있었던 곳으로 1733년(영조 9)에 장릉을 이곳으로 옮기면서 현재 금릉동으로 읍치를 옮겼고 7년 후에는 현재 교하동 쪽으로 다시 읍치를 옮겼다. 이처럼 중요한 지역이었음을 알수 있다.
연천군과 김포시에 비해서 파주시는 포구와 나루터에 대한 연구와 보존이 부족한 상태로 보여진다. 김포의 경우, #마근포 를 비롯해 조강포 와 강령포 등 3대포구와 30여개 포구와 나루터에 대한 연구가 진행된 바 있으며 현 위치에 대한 조사도 진행되고 있다. 포구는 배가 드나드는 것을 말하고 나루는 배를 건너기 위한 곳이다. 임진강과 한강이 만나는 오두산 인근의 수역은 한강(임진강) 하구 남북공동이용수역이라 접근이 불가능하기에 관심이 높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이라도 더욱 연구하고 싶은 이유가 되기도 한다.
한강과 임진강이 마주한 옛 교하 일대에는 포구와 나루가 어디에 있었을까? 현재 김포 전류리 포구가 남아 있는 것을 생각할 때, 우선 지도에 표기된 석곶과 반석 일대가 먼저 떠오른다. 심학산 앞은 한강의 수위가 높았을 때는 심학산 앞까지 물이 들어왔다고 하여 수막산이라고도 불렀는데, 동네에 사셨던 분들은 분단 전에는 심학산 밑 한강 변에 심학나루가 있었다고 전한다. 파주시 마을 기록화 사업 보고서 ‘교하마을지’에 의하면 서울, 인천, 김포, 강화, 문산 등지로 왕래할 수 있는 나루터였다고 한다.
*반석포구 추정위치- 공릉천 하구, 한강하구와 만나는 송촌대교 모습
마을지명에서 한강과 임진강 부근에 마을의 지명에서 강가의 마을임을 알려주고 있으며 포구와 나루와 관계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석곶지역에 속하는 곳으로, 문발동의 뒷말, 양지말, 하촌 말이라는 지명은 문발 서쪽 한강 하류 강가에 있는 마을로 지혜를 드높이자고 하여 양지동이라고도 한다. 산남동에 도래말, 도내말 이라는 말은 산남동에서 가장 서쪽에 있는 마을로 한강물이 돌아간다하여 붙은 이름이라고 하며 마을을 떠난 사람은 반드시 돌아와서 살게 된다는 이름도 가지고 있다.
송촌동에는 감골, 시곡, 시골이라는 지명이 있다. 동성골 남쪽에 있는 마을로 감나무가 많아 붙은 이름인데 옛날 이곳에서 나는 감을 배로 실어다가 한양에 내다 팔았다고 한다. 신촌동에는 한강 변 깊숙한 골짜기 안쪽에 자리잡고 있어 골내, 궐촌, 궐내라고 불렀고 기사무골 이삼물골은 한강, 임진강, 휴율강(공릉천)이 합류하여 서해로 흘러드는 곳이다.
두려골은 반석 나루터가 가까이 있는 마을로 나루터가 가까워 행상인들이 이곳에서 숙식을 하고 길을 떠나곤 했는데 마을이 풍요롭고 말쌀밥을 지어 접대하였다고 하여 붙은 이름이다. 반석은 구들장 같은 반석이 많이 생산되어서 붙은 지명인데 서해에서 오는 배와 임진강을 올라가는 배는 반드시 이곳에서 기항하여 쉬어갔다고 한다.
물이 바뀌어 썰물 때가 되면 한강이나 임진강으로 갈 배는 다음 밀물을 기다렸다가 일제히 출항했다. 이곳은 고깃배들과 양곡의 집산지였다. 모든 것이 풍부하여 제2의 인천이라고 부르기도 했다고 하며 일제가 양곡을 통제하여 식량난에 허덕일 때에도 이곳만은 쌀이 넉넉했다고 한다. 공릉천 하구를 끼고 인근에 크고 작은 나루와 포구가 모여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탄현 금승리에는 낙하나루가 있었는데 이곳에는 주막거리라고 불리는 곳이 있다. 임진강 나루터 근처에 있는 마을로 나루터에 오가는 사람들이 쉬어가던 주막이 있던 곳이라고 한다. 대동리는 큰골이라고도 불렀는데 임진강 가에서 가장 큰 마을이라서 붙은 이름이다. 이곳에도 나루와 포구가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문지리는 임진강 가의 산줄기에 있어서 문줄이라고 불렀는데 낙하 나루 상단으로 개성으로 건너는 선착장이 있어서 임진강을 건너는 포구라는 의미에 도림포동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도림개, 도린개, 되린개라고 마을을 불렀다. 법흥리에는 전진개, 습포동이라는 지명이 있다. 항상 구름이 끼어있다고 하여 땅이 습하여 붙은 이름인데 이 마을 앞까지 조수물이 오르내렸고 작은 고기잡이 배들이 수시로 왕래하던 포구였다.
성동리에는 큰말 서쪽에 곤말이라는 명칭, 큰말 북쪽에 요풍동이라는 지명이 있는데 마을 앞으로 임진강이 흘러 여름에도 시원한 강바람이 불어와 복중에도 땀을 모르고 지낸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오금1리의 배골이라는 지명은 옛날에 배가 들락날락하였따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탄포말은 금승리와 축현리 지역에서 내려오는 냇물이 임진강으로 흘러 포구를 이루는 어귀라는 뜻으로 토탄이 많이 나 토탄의 탄과 포구의 포를 합쳐서 생긴 이름이다.
현재 신촌동, 송촌동, 문발동, 상지석동, 와동동, 야당동 등지에는 논농사가 운정신도시 개발전까지 경작되었고 구석기부터 조선시대에 이르는 집터 유적이 발굴된 곳이기도 하다. 연천 전곡리 유적에서 10년 동안 발굴된 구석기가 3000점 인데 비해 운정 1지구에서만 4000여점의 구석기가 발굴되었으며 명실상부한 한국 최대의 구석기 유적으로 보도되기도 했으나 현재는 흔한 안내판 하나 없다.
다율, 당하, 교하가 인접한 구릉지대에는 100여기가 넘는 고인돌이 무리를 이루고 있었는데 군사시설 조성과정에서 고인돌의 대부분이 파괴되어 20여기만이 남게 되었다고 하며 양호한 6기가 기념물로 지정받았다. 그외 인근의 고인돌은 면밀한 조사가 이루어지지 못한 상황에서 신도시 개발이 이루어진 점은 매우 안타깝다. 지금이라도 고인돌로 추정되는 바위에 대해서 조사가 시급하다. 다율동에서는 3~4세기 초, 백제 초기 토기가마터가 발굴되었다.
백제 초기 세력이 안정권을 찾았을 때에 토기 가마를 조성하였을 것이며 풍납 토성과 육계토성에서 같은 방식으로 제작된 타날문 토기들이 발굴되고 있다. 토기의 이동이 인근 포구를 통해 이루어졌을 가능성을 시사하는 부분이다. 옛 지명인 반석, 석곶 지역의 포구와 나루터를 찾아나서는 것은 현 파주 운정지역에서 살아온 사람들의 문화와 경제 생활을 열어주는 열쇠 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