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와 소현세자의 비극을 만나는 장릉과 경안군 묘 2
*경안군 묘
제2편, 소현세자와 경안군의 슬픈 역사
조선조 제16대 임금 인조仁祖를 떠올리면, 삼전도 굴욕과 자기 자식과 며느리를 죽이고 손자들까지 죽게 한 비정한 왕이라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다. 청나라에 볼모로 끌려갔던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은 8년 뒤인 1645년에 돌아왔다.
소현세자는 당시 청나라에 수입된 서양 문물을 대하면서 서양인들과의 접촉을 통해 새로운 문물과 사상을 받아들였고, 봉림대군은 철저한 반청주의자가 되어버렸다. 인조는 고국으로 돌아온 소현세자와 강빈, 손자들을 전혀 반기지 않았다. 소현세자가 청나라의 내부사정과 서양 문물 이야기를 하며 책과 기계를 보여주자 분개하여 벼루를 들어 얼굴에 내리치기까지 하였다.
가슴앓이하던 소현세자는 병석에 누운 지 2달 만에 의문의 죽음을 맞는다. 시체에서는 새카만 피가 쏟아졌고, 낯빛은 중독된 사람처럼 알아볼 수가 없었다 한다. 이후 소현세자 주변 세력과 강빈의 친정어머니와 남자 형제들을 귀양보냈고, 세자빈 강씨에게 사약을 내려 죽게 한 뒤 그들 모두를 사사했다.
그것도 모자라 소현세자의 세 아들 석철, 석린, 석견을 제주도로 보냈다. 열 살도 안 된 인조의 손자들은 어머니 죄로 유배를 가서 석철, 석린은 다음 해에 죽었고, 셋째 경안군 석견은 겨우 젖 떨어진 나이에 제주도와 함양현을 거쳐 강화 교동도까지 9년 귀양살이를 견디며 간신히 목숨을 부지했다. 그때 경안군 나이 겨우 열세 살이었다.
낙엽 흩날리는 늦가을이면 경안군 이회慶安君 李檜1644,10,5~1665,9,22 묘역에 가고 싶다. 11월 초, 왜곡된 역사를 바로 세우자는 단체, 대한사랑大韓史郞 회원들과 고양시 덕양구 대자리로 향했다. 경안군은 소현세자 셋째아들로 김해허씨와 혼인하여 임창군, 임성군 두 아들을 두었다.
허씨 부인과 합장묘 뒤편에는 빨간 벽돌로 곡장을 둘렀다. 빨간벽돌 곡장은 본 적이 없기에 무슨 연유인지 궁금증이 인다. 봉분 앞에는 상석과 향로석, 좌우에는 망주석과 문석인, 동자석을 배치했다. 숙종 30(1704)년, 아들 임창군이 세운 묘비는 용의 형상을 새긴 머릿돌인 이수와 사각 모양의 비좌를 갖추고 있다. 오석烏石으로 만든 비 앞면에는 ‘朝鮮國 王孫 贈顯祿大夫 慶安君 兼 五衛都摠府 都摠營 行承憲大夫 慶安君 諱檜之墓 盆城郡夫人 許氏祔左-조선국 왕손 증현록대부 경안군 겸 오위도총부 도총영 행승헌대부 경안군 휘회지묘 분성군부인 허씨부좌 ’라 새겨져 있다.
경안군 묘역을 올 때마다 나는 제물을 준비한다. 상석을 깨끗이 닦고 어제 쑨 도토리묵과 과일 몇 가지, 덤으로 농익은 오가피 열매도 올렸다. 제주를 따르고 ‘유세차, 단기 4355년 11월 9일 대한사랑 회원들이 경안군께 인사드립니다. 차린 것은 보잘것없으나 소박한 정성이오니 지난 설움은 잊으시고 흠향하소서’ 절을 올렸다. 묘역 양옆에 서 있는 문석인이 빙그레 웃는다. 왕손으로 태어나 아무 죄도 없이 모진 고난을 겪은 경안군도 저렇게 선한 모습이었겠지 싶어 마음이 아리다.
경안군 묘 앞쪽은 낭떠러지라 절을 하면서도 굴러떨어질까 봐 조마조마했다. 광해군 묫자리가 경사져 절자손切子孫 터라 했는데, 경안군 묘는 그보다 더한 급경사였다. 경안군은 22살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으나 다행히도 임창군과 임성군 두 아들을 두었다. 숙종 대에 임창군도 왕권을 넘본다는 역모에 휘말렸으나, 다행히 임창군을 사사하지 않고 군부인 허씨와 함께 아버지 경안군이 갔던 제주도와 교동도로 귀양 보냈다. 그때 숙종이 임창군을 살려두지 않았다면 소현세자 핏줄은 지금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임창군臨昌君은 밀풍군密豐君과 밀남군密南君 밀원, 밀천, 밀본, 밀운 6남 5녀를 두었다. 소현세자 혈육들은 보위를 넘보기는커녕 살얼음판을 걷듯 조심스럽게 살았으나, 영조4(1728)년 또다시 밀풍군이 반역을 꽤했다는 소문이 나돌아, 영조의 명에 의해 결국 자결하게 된다.
같은 할아버지 자손이면서 소현세자 후손들에 대한 잔인한 숙청은 4대까지 이어졌다. 밀풍군 후손들은 선조의 억울한 삶을 알리고자 묘 앞에 비를 세웠다. 대체 왕권이 무엇이길래 한 핏줄을 타고난 혈육까지 무참히 죽여야만 했을까.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쓴 비문을 읽으며, 예나 지금이나 정적을 제거하려는 모함은 변함없다는 것이 마음 아팠다. 세상 어딘가 지금도 권력자들에 의해 억울하게 당하는 이들이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며, 명나라 마지막 궁녀 굴씨屈氏 묘역으로 내려왔다.
굴씨는 청나라로 끌려와 심관에서 소현세자를 모시던 시녀였다. 소현세자가 귀국할 때 따라와, 소현세자가 죽은 후에도 조선에 남아 명나라 예법을 전해주고 임창군을 기르면서 여생을 보냈다 한다. 고국을 멸망시킨 청나라에 분노하며 조선의 왕세자에게 의리를 지킨 굴씨에게 하늘은 포근하게 낙엽 이불을 덮어주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따뜻한 유택이 경안군 묘역 산자락에 있었다.
No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