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왕조 신위를 모신 사당, 종묘
강근숙 파주작가
역사문화탐방 왕과 왕비 삶의 공간이 궁궐이라면, 죽음의 공간은 능陵과 종묘宗廟, 사적 제125호이다. 우리 민족은 조상의 뼈를 묻은 무덤과 신위를 모신 사당에 각별한 의미를 부여했다. 조상숭배에 대한 유교관이 지극했던 조선 시대에는 최고 통치자인 선대 왕을 존숭함으로써, 살아있는 통치자인 왕은 그 존엄한 신분과 권위를 유지하는 방편으로 삼았다.
태조 이성계는 개경에서 한양으로 도읍을 옮기고 가장 먼저 종묘를 짓기 시작했다. 유교의 예법에 따라 궁궐 왼쪽에 종묘를 완성하고 개경에 봉안되었던 태조의 조상 4대 위패를 새로 지은 종묘로 옮겼다. 2백 년 후 임진왜란으로 종묘와 궁궐은 모두 불타 없어졌으나, 1608년 광해군 때 재건되었고 모시는 신위가 늘어남에 따라 건물의 규모를 늘린 것이 지금의 모습이다.
정전 가는 길에 네모난 연못에 둥근 섬이 있는 연못을 지난다. 옛사람들은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지다는 천원지방天圓地方의 우주관을 담아 궁궐과 종묘의 면모를 갖추었다. 지세에 따라 조화를 이룬 종묘 건축물은 장식과 기교를 절제하여 단조로워 보이지만, 존엄하고 신성한 분위기를 위한 의도적인 장치이다. 자연미를 살린 조선 건축의 특성을 보여주는 정전正殿( 국보 제227호)은 한국의 건축물 가운데 가장 신비롭고 엄숙한 공간으로, 역대 왕 중에서 공덕이 큰 왕과 왕비의 신주를 봉안했다.
종묘는 창건 당시 '태묘'라 하였고, 지금은 정전과 영녕전을 합쳐 종묘라 부른다. 신주의 봉안 순서는 정전의 경우 서쪽을 상上으로 하고 제1실 태조 신위를, 신실神室 19칸에는 태조를 비롯한 왕과 왕비 신위 49위를 모셨다. 맞은편 공신당功臣堂은 살아생전 왕을 보필했던 공신 83위의 위패가 봉안된 건물이다.
영녕전永寧殿( 보물 821호)은 정전의 서북쪽에 있으며 '영녕'은 '왕가의 조상과 자손이 함께 길이 평안하라'는 뜻이다. 영녕전은 정전의 부족함을 보완하기 위해 세워진 별묘로 태조의 4대 조상목조-穆祖, 익조-翼祖, 도조-度祖, 환조-桓祖을 정중正中에, 정전에 모시지 못한 왕과 왕비 34신위가 16감실에 모셔져 있다. 재위 도중 폐위된 노산군, 연산군, 광해군은 공식적으로 임금이 아닌 왕자 신분으로 강등되어 신위가 오르지 못했다. 숙종 때 노산군만이 단종으로 복위되면서 조선 왕조 신위 25위가 모셔지게 되었다.
종묘 정전을 떠받치고 있는 열주를 바라보면, 내가 인간 세상이 아닌 영원의 공간에 서 있는 듯 아득하게 느껴진다. 세계적인 건축가 프랭크 게리frank Gehry는 종묘를 그리스의 파르테논 신전에 비유하며, 이렇듯 엄숙한 건축물을 만드는 것은 기적에 가깝다고 극찬했다. 종묘를 다시 찾은 그는 '무한의 우주를 담고 있는 장엄한 공간은 세계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며 최고의 건축물을 가진 한국을 부러워했다.
정전 동쪽에는 제물을 준비하고 제기를 보관하는 입 구'口'자 모양의 건물 전사청이 자리한다. 수복방 앞에는 제사에 바칠 40여 가지 음식을 미리 검사하는 찬막단饌幕壇과 제물로 바칠 소, 양, 돼지 등을 검사 판정하는 성생위省牲位가 있다. 제물은 가장 정하고 좋은 것으로만 가려서 말끔히 해야 하므로, 전사청 바로 옆에는 제정祭井이 있었다. 깊이가 4미터에 이르는 이 우물은, 병자호란 때 제기를 감출 곳이 없어 쩔쩔매다가 우물 속에 넣어 온전히 보존할 수 있었다 한다. 얼마나 깊을까 호기심에 달려가 들여다보았으나, 메워진 우물은 뚜껑을 덮어 놓았다.
사람이 죽으면 혼魂과 백魄으로 분리되어 혼은 하늘로 올라가고, 백은 땅으로 돌아간다 믿었다. 삶 못지않게 죽음의 공간과 의례를 소중히 여긴 우리 민족은, 국란을 겪으면서도 왕실의 기신제와 종묘제례를 옛 방식 그대로 6백여 년을 이어왔다. 이는 한 왕조의 역사와 가치관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자랑스러운 우리의 문화유산으로, 2009년 조선 왕조 왕과 왕비의 '능 40기북한2기:태조원비 신의왕후 제릉, 정종과 정안왕후 후릉-厚陵 제외와 제사를 받드는 사당 '종묘'가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재1995년되었다.
종묘 건축물은 현판이 없다. 궁궐 지킴이 조태희 선생과 황영자 해설사의 설명이 없었다면 건물의 쓰임새를 제대로 알지 못했을 것이다. 건물 앞 넓은 월대는 지면으로부터 단을 높여 종묘가 죽은 자의 혼이 머무는 천상의 공간임을 암시한다. 우리 민족은 손재주가 뛰어나지만, 과연 조선 어느 대목장大木匠의 솜씨일까. 빼어난 장인들의 솜씨가 보면 볼수록 경이로워 감탄사가 나온다. 한눈에 다 들어오지 못할 정도로 길고 거대한 정전 지붕과 일렬로 줄지어
정전 가까이 또 하나의 건물은 종묘제례를 위한 준비실 향청과 집사청이다. 향청은 제사 전날 왕이 친히 내린 향, 축문, 폐백과 제사 예물을 보관하고, 집사청은 제사에 나갈 제관들이 대기하는 곳이다. 제례를 지내기 전 왕이 선왕과 종묘사직을 생각하며 기다리던 망묘루望廟樓, 나도 임금이 앉았던 누마루에 올라 연못을 바라보며 쉬어가고 싶었다.
망묘루 뒤편에 공민왕 신당이 있는 것은 뜻밖이다. 조선 왕실 사당인 종묘에 고려 제31대 공민왕과 노국공주의 영정을 모신 것은 무슨 이유일까. 역성혁명을 한 태조 이성계가 고려 왕조에 대한 정치적 배려였다고도 하고, 종묘 창건 때 공민왕 영정이 바람에 마당으로 떨어져 조정에서 회의 끝에 그 영정을 봉안하기로 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조선은 의례의 나라였다.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길례-吉禮, 흉례-凶禮, 군례-軍禮, 빈례-賓禮, 가례-嘉禮 중 길례에 해당하는 종묘제례는 조선 왕실 권위를 매년 5월 첫째 일요일에 올리는 종묘제례는 그 옛날 국왕이 궐을 나와 제를 지내기 위한 어가행렬이 그대로 재현된다. 국왕과 함께 정사에 참여하는 문무백관이 총동원되고, 왕실의 위엄을 상징하는 의장물과 제복祭服을 갖춘 수많은 장수와 군사들의 행렬이 장관이다.
제례의 절차는 일반 사가와 기본 형식은 비슷하지만, 왕가의 제사는 성대하고 근엄하며 노래와 춤이 어우러진 종합예술의 정수를 보여준다. 종묘제례에 참석했던 파평윤씨 정정공파貞靖公派 윤상수尹相秀 회장은, 문정왕후의 외척이라 아헌관 자격으로 제례를 올렸다. 언제나 초헌관은 전주 이씨 종친이며, 아헌관은 왕비의 외친, 종헌관은 삼정승 집안사람으로 제관을 정한다. 제례가 봉안하는 동안 나라를 세우고 발전시킨 왕의 덕을 찬양하는 제례악이 연주되며, 절차에 따라 문치와 무공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무용인 문무文舞 무무武舞가 곁들여진다.
종묘는 한 왕조의 사라진 문화유산이 아니다. 국왕이 친히 제를 올린 격식 높은 종묘제례중요무형문화재 제56호는 역사와 전통이 뿌리내린 소중한 우리의 문화유산이다. 산 자와 죽은 자가 만나는 '종묘제례'와 신을 즐겁게 하는 '종묘제례악'은 2001년 유네스코 '인류 구전 및 무형유산 걸작'으로 등재되었다. 종묘는 서울 한복판 과거와 현재를 잇는 살아있는 역사 공간으로 국가 최고의 사당이다. 내 짧은 필설로 종묘를 온전하게 드러내기 역부족이나, 누구든 삶과 죽음을 초월한 영원의 공간을 마주하면 번잡한 인생사는 씻은 듯 사라지고 위대한 문화민족이라는 자부심으로 가슴 뿌듯해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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