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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나지 않은 전쟁

캠프 그리브스는 DMZ 남방한계선에서 2킬로 떨어진 민간인 통제구역에 주둔한 미군 기지였다. 1953년 정전협정이 체결되면서 대한민국 정부는 주한 미군에게 토지를 제공하고 군영을 설치하도록 하였다주둔한 지 50여 년 만에 부대가 철수하면서 미군기지가 우리에게 반환되었다경기도는 문화 재생사업으로 미군들이 볼링장으로 사용했던 건축물을 원형 그대로 활용해전장에서 이슬처럼 사라진 이름 없는 영웅들을 기억하기 위해 젊은 날의 초상을 기획했다전쟁의 참혹함을 모르는 젊은이들도 갤러리 그리브스에 전시된 전쟁 역사 사진과 자료들을 대하면이 땅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친 영령들에게 저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0205dsci0020.jpg *캠프그리브스 안내판

사진으로 보여주는 현상은 말과 글보다 몇 배의 설득력을 지닌다. 우리가 지금 영화를 보듯 생생한 전쟁 기록을 볼 수 있는 것은, 전쟁의 목격자 종군기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마거릿 히긴스’은 대학생 통신원 신분으로 1950년 도쿄 특파원으로 발령받았다. 부임하자마자 한국전쟁이 일어나 그녀는 재빨리 서울의 미8군 군사고문단을 찾아갔고, 그다음 날 한강 다리가 폭파되는 것을 목격했다. 한강 다리 폭파 소식과 가장 치열했던 낙동강 전투를 취재했고, 전쟁의 참혹한 현실을 직접보고 듣고 느끼며 체험 리포트를 뉴욕의 편집실로 보내기 시작했다. 임무를 끝내고 미국으로 돌아간 다음 해, 경험을 바탕으로 『자유를 위한 희생: War in korea』을 집필하여 여성 최초로 퓰리쳐상을 수상했다. 그것을 계기로 ‘마거릿 히긴스’는 미국 각지를 돌아다니며 참상을 알렸고, 한국전쟁을 세계에 알리며 지원을 요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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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본 또 한 사람은 미국 NBC방송 기자 ‘존 리지’였다. 그는 한국인들이 얼마나 고통을 받고 있는지 증언하려 애썼고, 전시 상황 속에서도 끈질긴 생명력을 이어가는 우리네 모습을 사진으로 기록했다. 그러면서 “내 바람은 이 사진을 보는 독자들이 한국전쟁을 과거의 역사로만 생각지 않았으면 하는 것이다. 이 사진들을 통해 전쟁의 참혹함과 그들이 겪어야 했던 희생과 아픔, 그리고 강인한 소생의 의지를 떠올릴 수 있기를 바란다”고 하였다. 위험을 무릅쓰고 전쟁터를 누빈 이들 종군기자가 아니었다면, 우리는 민족이 겪은 고난의 역사를 이렇듯 생생하게 볼 수 없었을 것이다.

군사분계선 팻말.jpg다 아는 일이지만 동족상잔의 비극은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군의 기습 남침으로 시작되었다. 소련과 중공의 지원으로 전쟁을 준비한 북한군은 T-34 소련제 탱크를 242대나 가지고 있었고, 170여 대의 전투기, 200여 대의 비행기를 갖고 있었다. 반면 국군은 탱크와 전투기는 한 대도 없고, 훈련용 연습기 20여 대가 전부였다. 남한은 무방비 상태였다. 무기도 없고 전투경험도 없었다. 더군다나 국군은 6월 24 자정을 기해 비상경계령을 해제하면서, 사병들에게 농사일을 도우라고 2주간 특별 휴가를 주어 병력 절반이 외출한 상태였다.

북한군이 황해도 옹진에서 남침하여 국군 제17연대와 격전이 벌어졌다. 그러나 1950년 6월 25일 오후 1시 35분, 김일성은 평양방송에서 ‘남한이 모든 평화통일 제의를 거절하고 옹진반도에서 해주로 북한을 공격했다’고 반대로 방송했다. 그러면서 26일 새벽 2시, 부산을 역습하려고 해군 특공대 600명을 내려보냈는데, 울산 앞바다 백두산함 손원일 제독이 야포를 쏴서 격파시켰다. 특공대를 막지 못하고 울산이 뚫렸다면 대한민국 임시수도 부산은 없었을 것이다. 사태가 위급해지자 유엔안전보장이사회가 소집되어 맥아더 연합군사령관에게 지상군 투입과 38선 이북의 군사목표 폭격 권한이 주어졌다. 27일 정부는 대전으로 수도를 이전하였고, 28일 새벽 한강 다리가 폭파되었다.

남침 3일 만에 서울은 점령당했다. 나라가 위태로운 지경에 이르자 일본에서 공부하던 유학생 642명이 바다를 건너와 총을 들었으며, 수원에서 500명의 학도대가 조직되었다. 침략당한 대한민국을 돕기 위하여 유엔 창립 후 최초로 유엔군이 한국전쟁에 참전했다. 유엔군의 일원으로 참가한 국가는 16개국, 의료지원 5개국, 물자와 재정지원국은 39개국이었다. 선발대로 부산에 첫 지상군이 투입되었다. 일본에 주둔하던 스미스 부대는 미 제24단의 21연대 1대대로 540명으로 구성된 특수임무 부대였다. 7월 5일 오산 죽미령에서 유엔군 지상 병력이 처음으로 치른 첫 교전에서 북한군 42명을 사살하고 T-34 전차 4대를 완파했으나, 스미스 부대는 540명 중 30%가 넘는 181명이 실종 포함 희생하면서 북한군이 만만치 않다는 것을 경험했다.

전쟁 발발 두 달 만에 대한민국은 10%밖에 남지 않았다. ‘이 나라를 지켜야 한다’ 학생들은 가방을 내던지고 전장으로 달려나갔다. 책 대신 소총과 수류탄 조작법만 겨우 익혔다. 자신보다 큰 M1소총을 들고 화개 전투에 참여한 학교는 매산고등학교를 비롯해 보성 광양고, 여수중앙고, 울산고, 순천제일고, 벌교상고, 여수직업고, 마산고, 등 벌교 강진지역 17개 학교였다. 겨우 183명은 북한군 정예부대 1,000여 명과 섬진강을 사이에 두고 전투를 벌였다. 하동과 마산이 뚫리면 부산이 위험해진다. 학도의용대 완장과 태극마크를 그린 띠를 달고 투입된 화개장터 전투는 학도병 최초의 전투였다. 절체절명의 순간 펜 대신 총을 들고 이 땅을 지킨 의로운 용기의 상징, 학도병은 화개장터 뒷산 전투 선봉에서 저지하여 3시간 30분을 버텼다. 바닥을 드러내는 탄약, 총알이 떨어지자 총 앞에 단검을 끼우고 적에게 미친 듯이 달려들었다. 그들이 가진 최고의 무기는 소총도 수류탄도 아닌 자신의 목숨으로 나라를 구하겠다는 ‘용기’였다. 군번도 계급장도 없이 직접 전투에 참여한 16세에서 18세에 불과한 꽃다운 학도병은 조국을 위해 피지도 못한 채 산화했다, 그들의 값진 목숨의 대가로 하동군민이 피난 갈 시간과 낙동강 방어선을 구축할 시간을 갖게 되었다.

7월 1일, 미국을 중심으로 16개국으로 구성된 유엔군이 속속 도착했다. 그러나 소련과 중공군의 지원을 받아 준비한 강력한 무기를 앞세운 채 대규모 병력으로 공격해오는 북한군을 막아내기엔 역부족이었다. 급기야 8월 하순에는 낙동강 전선까지 후퇴하게 되었다. 국토가 10% 남아있는 상태에서 낙동강 전선이 무너지는 것은 패배를 의미했다. 대한민국 최대의 위기였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낙동강 전선에 전쟁이 시작된 이후 국군과 유엔군은 철저한 대비를 한 방어선이었다. 북한군도 이 전선만 뚫으면 승리할 수 있음을 확신하고 전력을 쏟아부었다. 하지만 국군과 미군이 중심이 된 연합군은 낙동강을 방패 삼아 북한군을 45일 동안 맞서 버티며 방어선을 지켰다.

 1950년 8월 11일, 포항여자중학교 앞 벌판에서도 전투가 벌어졌다. 전투복 대신 교복을 입고 겨우 총 쏘는 법만 익힌 학도병 71명은 북한군 766 유격대 수백 명과 11시간 동안 격전을 벌였다. 이날 전투로 47명이 전사하고 실종 4명, 부상 6명 등 거의 전멸한 셈이다. 불과 2소대의 학도병들이 장갑차와 기관포, 자동소총으로 무장한 대대급 정예 유격대와 맞서 한 걸음 후퇴도 거부한 채 끝까지 싸운 처절한 전투는, 지역 주민과 주요기관이 안전하게 피신할 시간을 주었고, 3사단과 미군이 반격할 시간을 마련했다. 전사한 학도병 품에서 부치지 못한 편지가 발견되었다. 동성중학교 3학년 이우근 학도병은 겨우 15살, 포탄이 날아드는 전쟁터가 두려워 엄마한테 편지를 쓰며 위안을 얻었다. 

1950810, 어머니께 보내는 편지

평화가 꽃피기를기다리는 병사.jpg어머니! 나는 사람을 죽였습니다. 그것도 돌담 하나를 사이에 두고 열 명은 될 것입니다. 저는 2명의 특공대원과 함께 수류탄이라는 무서운 폭발 무기를 던져 일순간에 죽이고 말았습니다. 수류탄의 폭음은 저의 고막을 찢어놓고 말았습니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순간에도 제 귓속은 무서운 굉음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적의 다리가 떨어져 나가고, 팔이 떨어져 나갔습니다. 너무나 가혹한 죽음이었습니다. 아무리 적이지만 그들도 사람이고 더욱이 같은 언어와 같은 피를 나눈 동족이라고 생각하니 가슴이 답답하고 무거웠습니다. 어머니, 전쟁은 왜 해야 하나요. 이 복잡하고 괴로운 심정을 알려드려야 내 마음이 가라앉을 것 같습니다.

중략

이우근 학도병의 절절한 편지는 전쟁의 참혹함을 그대로 느껴져 가슴이 먹먹했다. 어린 나이에 바로 앞에 총탄이 빗발치는 전쟁터가 얼마나 무서웠을까. 한시바삐 달려가 엄마 품에 안기고 싶었을 것이다. 관람객들도 눈물을 찍어내며 그 앞을 떠나지 못한다. 피에 얼룩진 학도병의 편지는 영화 포화속으로의 모티브가 되었다.

 915, 인천상륙작전을 계기로 서울을 되찾은 아군은 평양 탈환과 함께 압록강까지 진격한다. 전쟁이 끝나고 통일이 눈앞에 다가온 듯하였다. 전세가 기울자 김일성은 모택동에게 파병을 요청했다. 1025, 30만의 대규모 중공군은 압록강을 건너 기습적인 공세로 밀고 내려왔다. 장진호에서 중공군과 미 해병대가 치열한 전투를 벌였고, 동부전선에서 중공군 6개 사단이 미 해병대와 보병부대를 포위하면서 유엔군 대부분은 무너지거나 고립되었다. 중공군 참전으로 흥남부두 대탈출이 시작되었다. 1224, 10만이 넘는 병력과 피난민 10여만 명, 17500대의 각종 차량과 35만 톤의 물자를 수송한 철수 작전이었다. 마지막 출항선에는 무기와 물자를 버리고 정원의 230배를 초과한 14000여 명의 피난민을 태웠으며, 선 채로 3일간 겨울 바다를 건너 거제도에 도착했다.

 19511, 중공군은 38선을 넘어 총공격을 개시했고, 10만 병력이 서부전선을 밀고 내려왔다. 서울을 진입했으나 유엔군의 진격으로 중공군은 완승이 힘들다고 판단했는지, 얼마 안 가서 청평 근방의 교두보를 포기하고 북방으로 총퇴각했다. 1년간 격전 끝에 38도선 부근에서 머물자 휴전회담에 대한 논의가 제기되었다. 유엔 주재 소련대사 말리크는 휴전으로 평화를 회복하자는 의견으로 기울었고, 1953727일 정전협정이 조인될 때까지 2년간 협상이 이어졌다. 비무장지대 설치를 위한 군사분계선을 설정을 놓고 본격적으로 협상이 시작되었다.

 0206휴전협정서yY70205.jpg *휴전협정서

포로교환 문제가 교착 상태에 빠진 무렵, 195335일 스탈린이 뇌출혈로 쓰러지자 전쟁은 휴전협상으로 치닫게 되었다. 한국정부와 14차례 걸친 협상 끝에 공동성명에서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 합의에 동의했고, 1953727, 판문점에서 정전협정이 체결되었다. 역사상 가장 긴 협상, 217일의 기간 동안 158번의 협상 끝에 국제연합군 총사령관 마크 클라크와 북한군 최고사령관 김일성, 중공군 인민지원군 팽덕회가 최종적으로 서명함으로써 전쟁은 일시적으로 정지되었다. 한국전쟁 31개월 3일째 되는 날, 유엔군 캠프에 한국군 대표로 최덕신 장군이 참석했지만, 판문점 정전협정에 한국 측 서명은 없다. 대한민국의 운명은 내 나라 사람이 아닌 다른 나라 사람들에 의해 결정되었고, 남과 북을 가르는 군사분계선 248킬로에는 서에서 동으로 1,292개의 나무 팻말이 세워졌다.

 전선의 포화는 멎었지만, 전쟁이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니다. 그러나 대한민국은 평화롭다. 초록으로 물든 산과 들, 자유로운 도시는 나날이 발전하여 전쟁의 상처는 보이지 않는다. 세계의 원조를 받는 나라에서, 도움을 주는 나라로 바뀌었다. 정전 이후 대한민국은 강한 의지로 위기를 극복하고 세계 10위권 경제대국을 이룩했지만,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라는 오명은 벗지 못했다. 갤러리 그리브스에는 날마다 내·외국인 관람객이 붐빈다. 가끔 유엔군 참전용사 후손들도 만난다. 6·25전쟁을 겪은 할아버지 체험담을 직간접으로 들었을 후손들은 사진을 통해 전쟁의 참혹함을 확인하며, 불과 70여 년 만에 몰라보게 발전한 대한민국에 박수를 보낸다. 이 땅을 지키기 위해 얼마나 많은 젊음이 목숨을 잃고 피를 흘렸던가, 나라가 위기에 처하자 가방을 내 던지고 자진해서 전선에 뛰어든 5만여 학도의용군 중 7,000명이 전사했다. ‘오로지 조국을 지키겠다는 일념으로 장렬히 싸우다 산화한 이름 없는 영웅들의 젊은 날을 대한민국은 영원히 기억해야 한다.

0206AuM0205.jpg *한국전쟁때 임진강변에 멈춘 탱크

0206kir0205.jpg *한국전쟁때 고아

0206jlL0205.jpg *임진강을 건너는 곤돌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