끈이 되어
올해는 유난히 덥다. 내일이 말복인데 어제는 입추였다. 그래서 그런지 이제는 햇볕이 따갑더라도 그늘에 들어서면 살랑살랑 부는 바람에 시원하다.
육백 년 된 느티나무가 있다는 법원읍 삼방리가 가까워졌다. 삼방리는 오십 년 전 나와 관계가 돈독하던 마을이다. 그래서 지리랄 것도 없지만 내가 잘 안다고 생각했는데 이게 웬일인가. 상전벽해라 하더니 완전히 달라졌다. 광탄 방축리 쪽에서 삼방리로 들어섰는데, 고속도로 인터체인지가 생기고 사방에 공장이 들어서 있으니, 훤히 안다고 말했던 내가 ‘오만한 자’가 되고 말았다. 내가 기억하고 있던 나무는 어째서 어린나무로 변신했는지, 자리도 거기가 아니었다. 어쨌든 내 기억은 믿을 수가 없어, 전부 털어내고 새로운 걸 아는 사람의 말에 따라 그 노거수를 찾아갈 수밖에 없었다.
보호수 앞에 당도하니 내가 기억하던 은행나무가 아니고 느티나무였고, 육백 년이나 되는 나무라는 것도 새삼스러웠다. 파주 26호로 지정한 해가 1982년이니 육백 년도 훨씬 넘은 어르신 나무다.
파주-26, 느티나무, 수령 600년, 법원읍 삼방리
사인적원망死人的愿望(죽은 사람의 소원)이라는 현판이 우선 눈에 띈다. 조선 태조 이성계의 셋째 아들 익안대군의 부인 삼한국대부인 정경옹주 철원 최씨의 묘역을 만들 때 지표로 삼기 위해 심었다고 한다. 부인 최씨가 세상을 떴을 때 일이다. 부인의 시신을 남편인 익안대군과 합장하려고 이곳을 지나는데, 상여꾼들의 발이 땅에 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자손들은 최씨 부인이 이곳에 묻히기를 원한다고 여기어 이 자리에 묘를 썼다고 전해온다.
위 내용을 막 읽고 있는데, 어떤 세단이 우리가 세워놓은 차 옆에서 한참을 주춤주춤 망설이다 내차 뒤에 주차한다. 어떤 중년 여성이 무언가 가지고 내려오더니, 느티나무 앞에 가서 떡과 술, 자두를 차려 놓는다. 그녀는 붙임성 좋게 어디서 왔느냐고 묻길래, 이래저래 왔다고 하고는 나도 되물었더니, 법원리에 사는 무속인이라고 하면서, 이 오래된 나무가 영험해서 치성을 드리면, 소원성취할 수 있다고 또렷하게 말한다. 이 근처에 다른 영험한 나무도 찾아서 치성을 드린다고 한다.
나는 점심때가 겨워 배가 고프던 차에 떡을 보니까 먹고 싶어, 치성을 드린 후 그 떡을 먹을 수 있냐고 했더니 쾌히 승낙한다. 떡 본 김에 제사 지낸다고 어차피 치성을 드리는 것이니, 우리도 그녀 옆에서 두 손을 비비며 소원을 빌었다. 뭘 빌었는지는 모르지만 십 초 정도 빌고 우리의 치성은 끝났다. 그런데 그녀는 너무 오래 걸린다. 눈을 꼭 감고 한없이 중얼거린다. 빨리 끝나야 떡을 먹을 수 있을 터인데 하면서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한참 만에 치성이 끝났다. 술은 사방에 헌주하고, 조그만 시루지만 시루째 우리에게 권하길래 손으로 떼어냈다. 한입 무는데 떡이 물기가 없는 데다가 싱겁고 너무 퍽퍽해 맛이 좀 그랬다. 그래도 배가 고프니 맛있다고 하면서 한 덩어리를 더 먹고 흩어진 팥고물도 그러모아 먹었더니 간은 좀 맞는다. 아무튼 시장기는 면해서 고마웠다.
사실 이 나무는 오십 년 전 나와 인연이 있었다. 이 마을을 담당하고 처음으로 출장을 나왔다. 마을 입구에 이 나무가 우선 눈에 띄었다. 오월 중순 농번기여서 모내기가 한창이다. 그 당시는 벼 수확이 많이 나는 통일벼를 심으라고 독려를 해야 할 뿐만 아니라 줄모 내라고 강력히 지도해야 한다. 막모 내면 아무래도 수확이 줄어들기 때문이다. 이 마을만 해도 벽촌이라 줄모가 아닌 막모를 내는 농가가 많았다.
나는 처음이지만 마을 사람들 얼굴을 익히느라 그들과 어울려 같이 모내기했다. 점심때가 되어 밥을 같이 먹으면서 나에게 막걸리 한잔 권한다. 초면이라 어색했지만, 기꺼이 받아야 할 것 같았다. 막걸리 잔인 양재기를 받는데, 모내던 대충 씻은 엄지손가락을 막걸리에 첨벙 담가 준다. 물론 그런 수밖에 없기는 하지만 꺼림칙했다. 더욱이 그 기다란 손톱 밑을 보니까 흙이 잔뜩 끼어 있는 게 아닌가. 순간 구역이 나는 바람에 한참 망설였다. 억지로 한 잔을 마시고 돌려줬는데, 딴 사람이 또 권하는 거다. 한 잔에 취해서 그런지 역해서 그런지 그다음부터는 비위가 덜 상해서 한두 잔 더 할 수 있었다. 점심을 한 후 이 나무 아래 와서 휴식을 취하는데 잠이 들고 말았다. 아무리 여름이지만 느티나무 아래이니 한기를 느껴, 깨어보니 해가 서산 쪽으로 넘어가는 게 아침인 줄 알고 어리벙벙했다. 그런 추억이 있는 이 노거수라니 오십 년을 끈질기게 이어왔네.
“산천은 의구한데 인걸은 간데없네.”라고 야은 길재는 읊었는데, 삼방리에 오니 “산천도 인걸도 간데없고, 육백 년을 지켜온 느티나무가 반세기가 지난 지금까지 나를 알아보네”
오십 년 전 안마당만한 저 논에서 모를 내고 막걸리를 마시며 욕지기하던 기억을 접고 법원리로 향했다. 대능리로 넘어가는 삼방리 고개 언덕배기에 울긋불긋한 천들이 이리저리 날리고 돌멩이가 쌓인 서낭당이 있던 기억도 새록새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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