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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오동과 청산리 전투를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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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오동 전투

아침 일찍 우리는 두만강이 흐르는 조··러 국경지대인 훈춘 방천으로 향했다. 가는 도중 봉오동 전투가 벌어졌던 봉오동 골짜기가 있는 산을 가리키는데 정확하게는 알 수가 없다. 한번 가보고 싶었지만 그냥 지나치면서, 봉오동 전투와 함께 청산리 전투에 대하여 짧게 이야기로 들을 수밖에 없었다.

 

봉오동 전투는 19206월 만주 지역에서 활동하던 독립군이 일본 정규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둔 역사적인 사건이다. 이 전투는 3·1운동 이후 무장 독립 투쟁의 실마리가 되면서 독립운동에 큰 자신감을 불어넣었다.

19193·1운동 이후 만주로 건너간 수많은 독립투사들은 무장 독립군을 조직하며 항일 투쟁을 이어가자, 이에 일제는 독립군을 소탕하고자 대대적인 토벌 작전을 계획했다. 19205월에는 일본군 헌병이 독립군에 의해 사살되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본격적인 정규군을 동원하기에 이르렀다. 당시 대한독립군, 군무도독부, 대한신민단 등 여러 독립군 부대는 홍범도를 총사령관으로 추대하고 대한군북로독군부라는 연합 부대를 결성하여 일본군의 공격에 대비했다.

독립군은 봉오동 계곡의 지형이 길고 좁아 매복에 유리한 걸 알고, 소규모 병력으로 일본군을 유인했다. 이에 일본군은 독립군을 추격하여 봉오동 계곡 깊숙이 들어서면서 독립군의 계책에 말려들었다.

192067일 정오 봉오동 계곡으로 완전히 들어온 일본군을 향해 계곡의 유리한 고지에 매복해 있던 독립군 부대는 일제히 총공격을 개시했다. 사방에서 쏟아지는 독립군의 집중 사격에 일본군은 속수무책으로 4시간여의 치열한 전투 끝에 수많은 사상자를 내며 퇴각했다. 이 전투에서 독립군은 단 4명의 전사자와 2명의 부상자만 발생한 반면, 일본군은 무려 157명이 전사하고 300명이 넘는 부상자를 내면서 압도적인 패배를 당했다.

봉오동 전투의 승리는 단순한 군사적 승리를 넘어, 독립군은 일본군 정규 부대와 싸워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었다. 이는 국내외 한민족에게 독립에 대한 확고한 희망을 심어주었다. 또한 이후 청산리 전투의 성공적 수행에 결정적 디딤돌이 되면서, 독립 전쟁의 서막을 열어젖힌 역사적인 사건으로 평가받고 있다.

청산리 전투

192010월 만주 간도 화룡현, 안도현 일대에서 벌어진 청산리 전투는 한국 독립운동사에 있어 가장 빛나는 승리 중 하나로 기록되어 있다. 이 전투는 봉오동 전투에서 독립군에게 패배를 당한 일본군이 대규모 보복 작전을 감행하면서 시작되었다. 일본군은 훈춘 사건을 조작하여 이를 빌미로 약 2만여 명의 대병력을 만주에 파견하여 독립군을 완전히 소탕하고 한인 사회를 초토화하려 했다. 이러한 일본의 대대적인 공세에 맞서 김좌진이 이끄는 북로군정서군과 홍범도가 이끄는 대한독립군을 중심으로 여러 독립군 부대가 연합하여 청산리 일대에서 치열한 항전을 벌였다.

청산리 전투의 전개 과정은 크게 10여 차례에 걸친 게릴라전으로 이루어졌다. 김좌진 장군은 일본군의 병력 우세를 정면으로 맞서기보다는 청산리의 험준한 지형을 활용한 매복과 기습 공격을 주요 전술로 삼았다. 일본군이 독립군을 추격해 청산리 계곡으로 들어오자, 독립군은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고 있다가 좁은 골짜기에 들어선 일본군을 사방에서 공격했다. 이 첫 전투인 백운평 전투에서 독립군은 일본군을 크게 격파했다.

이후에도 천수평, 완루구, 어랑촌 등 청산리 일대에서 약 엿새 동안 독립군의 기습 작전은 계속되었다. 홍범도 장군의 대한독립군은 후방에서 일본군의 퇴로를 차단하고 측면을 공격하며 승리를 뒷받침했다. 특히 어랑촌 전투에서는 일본군을 독립군으로 오인하여 자기들끼리 교전하는 일까지 발생할 만큼 독립군의 전술은 효과적이었다. 독립군의 뛰어난 유격전술과 지형의 높은 활용도를 바탕으로 일본군은 거듭 패배할 수밖에 없었다.

이 전투의 결과에 대해서는 한국과 일본의 기록에 차이가 있으나, 독립군이 일본군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한국 측은 일본군 전사자가 1,200여 명, 부상자가 3,300여 명에 달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반면 일본 측은 이보다 훨씬 적은 수의 사상자를 보고했다. 하지만 일본군이 독립군 토벌이라는 원래의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고 퇴각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청산리 전투가 독립군의 압승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청산리 전투의 역사적 의의는 매우 크다. 먼저, 무기와 병력에서 절대적인 열세에 있던 독립군이 일본 정규군을 상대로 대규모 전투에서 승리를 거둠으로써 독립 전쟁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두 번째, 봉오동 전투에 연이은 승리는 독립운동가들에게 더욱 큰 자긍심을 심어주었고, 국내외의 독립운동 세력에게 희망을 주었다. 세 번째, 이 전투는 독립군 부대들이 연합하여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으며, 향후 독립운동의 중요한 본보기가 되었다.

반면 청산리 전투의 승리는 동시에 일본군의 무자비한 보복을 불러왔다. 일본군은 독립군을 돕는다는 이유로 청산리 인근의 한인 마을을 무차별적으로 습격하고 주민들을 학살하는 '간도참변'을 일으켰다. 이로 인해 수많은 무고한 한인이 희생되면서 독립군 부대들은 새로운 활로를 찾아야 했다. 이처럼 청산리 전투는 군사적 승리와 함께 한민족 불굴의 항일 의지와 독립을 향한 염원을 보여준 역사적 사건으로 기억되고 있다.

간도참변

1910년 일제의 경술국치 이후 만주 간도에서는 어떤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을까. 수많은 변란이 일어났는데 그 중 간도참변은 청산리, 봉오동 전투와 직접 연관이 되었다. 너무나 원통하고 슬픈 일이다. 앞에서 언급되었지만 간도참변을 요약하면 이렇다.

19204월 일제는 만주의 관동군에 조선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제국 군대까지 합류시켜 대규모 군대를 간도로 보냈다. 명목은 조선 독립군을 토벌한다는 것이었지만 사실은 간도에 거주 중인 민간 조선인들을 무차별 학살한 대참변이었다. 봉오동, 청산리 전투 등에서 독립군에게 연달아 참패한 것에 대한 보복이다.

191931일 조선에서는 만세 운동이 있어났다. 만세 운동은 평화적 비폭력 운동이었지만 일제는 비무장 조선인을 총칼로 진압했다. 이후 독립군들은 무장투쟁의 필요성을 깨닫고 무장투쟁 준비를 하였다. 이 시기에 여러 독립군 양성기관과 독립군 부대가 편성되었다.

이후 무장 독립군 세력들은 일제의 식민통지기관에 커다란 타격을 주는 등 활발한 게릴라 활동을 하였다. 이에 일제는 위협과 회유로 만주의 중국 군벌까지 끌어들여 합동으로 독립군 토벌작전을 시작한다. 하지만 만주에 거주하는 조선인들의 저항과 중국 군대의 비협조로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게 된다.

192067일 봉오동전투에서는 독립군에게 전멸에 가까운 치욕스런 패배를 당한 일제는 정규군을 만주에 직접 투입하여 일거에 독립군을 소탕할 계획을 세웠다. 출병 명분을 만들기 위해 중국 마적을 사주해서 같은 해 10월 훈춘현 일본 영사관을 습격하여 조선인들에게 죄를 덮어 씌웠다. 일본군은 항일운동 근거지 초토화 작전을 진행하면서 대대적인 독립군 토벌작전을 펼쳤다. 그러나 독립군은 일본군이 공격해 오기 어려운 산속과 중소中蘇 국경지대로 미리 이동하였기 때문에 그 작전은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한편 1021일부터 26일까지 청산리전투에서 크게 패하면서 일본군은 그 보복으로 간도에 거주하는 조선인들을 초토화시켰다. 19214월까지 수많은 조선인 마을을 대상으로 방화, 약탈, 대학살을 저지른다. 이를 간도 참변 혹은 경신참변이라고 한다. 독립신문에 따르면 조선인 3,700여명이 사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