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ip to main content

안시성 전투와 심양 가는 길

th-manjugo.jpg

안시성 전투

안시성은 지금의 요녕성 해성시 팔리진 영성자촌에 위치한 영성자산성이라는 견해가 가장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다. 우리가 타고 가는 버스가 고속도로 표지판에 해성과 개주를 가리키고 있는 지점을 지나고 있어서 안시성은 어느 도시에 있느냐고 안내원에게 문의하였더니 개주라고 답한다. 아마 개주와 해성이 중국 행정구역상 상‧하위 개념이 아니면 두 도시가 연접한 것으로 추측된다.

안시성 전투는 서기 645년 당 태종이 직접 이끄는 삼십만의 군대가 고구려를 침공하여 안시성을 공격했다. 후방지원군까지 합하면 백만 이상의 대규모다. 그러나 끝까지 항전하여 이를 물리치고 고구려가 승리한 역사적인 싸움이다.

당 태종 이세민은 여러 성을 함락시키며 기세를 올렸으나, 안시성에서 강력한 저항에 부딪혔다. 안시성을 함락시키기 위하여 여러 가지 공성무기를 동원하고 심지어 성벽보다 높은 거대한 토산土山을 쌓아 공격하기도 했으나 고구려의 지략과 용맹에 토산까지 무너지고 역공까지 당하면서 당 태종은 물러갈 수밖에 없었다.

안시성 전투와 관련한 방어선이 되는 주요 거점은 다음 성들이다.

‧ 신성: 요녕성 무순시 순청구 고이산 고이산성으로 비정한다.

‧ 개모성: 요동성 동북쪽에 위치하는 요녕성 무순시 부근으로 추정한다.

‧ 백암성: 요동성에서 안시성으로 가는 길목에 위치하는 현재 요녕성 등탑시 부근으로 추정한다.

‧ 요동성: 요녕성 요양시 부근에 위치한다. 압록강을 건너 고구려 본토로 들어가는 길목에 있었던 가장 크고 중요한 성이다. 당 태종이 고구려 침공 시 가장 먼저 공격하고 점령한 대규모 성이다.

‧ 건안성: 요녕성 영구시 개주시 고려성자촌 동쪽 석성산에 위치한 산성으로 알려졌는데 현지에서는 고려성자산성 또는 청석관산성이라고도 한다.

‧ 오골성: 단동시 동북쪽에 위치한 봉황산성으로 비정한다.

‧ 비사성: 요녕성 대련시 금주구 대흑산의 대흑산산성으로 비정한다. 요동반도 끝에 위치해 있어 고구려 수군 방어에 중요한 거점 역할을 하였다.

당 태종은 안시성을 공략하기 전에 여러 성들을 점령하였다. 신성, 개모성, 백암성, 요동성 등을 점령하였으나 안시성에서 발목을 잡혀 패퇴하고 말았다. 이 전투에서 당 태종 이세민이 눈에 화살을 맞았다는 야사가 있으나 정사에는 없다. 그리고 안시성주는 양만춘으로 알고 있으나 실명은 알려지지 않았다.

th-goguryobattle.png
*고구려 ·당 전투 개략도

나는 십년 전에 요동성이 있는 요양에 잠시 들린 적이 있었는데, 요양의 옛 지명은 양평壤平이라고 한다. 북한에 있는 평양平壤은 원래 요양이라고 하면서 거기에 사는 사람들은 그렇게 알고 있었다. 요양시 시내에 있는 유명사찰인 광우사 앞쪽에 조성한 공원 한편에 요양의 옛 명칭은 양평이라는 내용이 새겨진 검은 비석이 세워져 있었다. 양평을 거꾸로 부르면 평양이라고 한다. 믿기지는 않지만, 거기 사는 사람들은 얼핏 한국인과 비슷한 이미지가 느껴져 믿고 싶었다.

아무튼 당 태종 이세민이 공략한 고구려의 안시성 전투가 벌어졌던 곳이 우리가 대련부터 지금 가고 있는 이 코스인 것만은 맞다. 고구려의 주 활동무대였다는 것이다. 당 태종이 요하를 지나 이 곳 일부 방어선을 뚫고 안시성까지 공략했다는 것이 이를 증명하는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니 묘한 느낌이 든다.

심양 가는 길

요녕성 일대는 봄이 한국보다 한 달은 늦게 오는 것 같다. 초봄 같다. 이 너른 만주벌판은 이제 밭갈이를 마쳤다. 아주 고르게 땅을 갈아놔서 산뜻하게 보인다. 그런데 농경지 가운데 무슨 무더기 같은 것들이 있다. 아무래도 꽃이 놓여있는 것으로 봐서 묘지인 것이 틀림없다. H 선생도 자세히 보더니 묘지라고 확신을 한다. 농경지가 넓기도 하지만 하필 묘지를 농경지 가운데 모시나 했더니 주위가 모두 벌판이고 산이 거의 없기 때문인 것 같다.

우리가 지금 가는 심양은 어떤 도시인가. 중국 동북3성 중 하나인 요녕성의 성도이다. 심양시는 청조 때에 수도로 정하면서 한때 성경盛京으로 불렸다. 그러나 추후 청조가 다시 수도를 베이징으로 천도하면서 봉천奉天으로 지명이 바뀌었고, 1929년 중국공산당정부가 들어서면서 현재의 지명인 심양이라는 도시명으로 정착되었다. 심양이란 명칭은 도시 주변을 흐르고 있는 혼하渾河의 옛 이름 심수沈水강의 북쪽에 있다는 뜻인 '심수지양沈水之陽'에서 유래된 것이다. 심양시는 요녕성 관할의 지급 시이자 성청 소재지로 지정되어 있는 인구 천만이 넘는 큰 도시이다. 심양하면 먼저 병자호란을 떠올리게 된다.

병자호란과 피로인

임진왜란이 끝난 후 17세기 초 조선은 전통적인 우호관계를 맺어 온 명明과 신흥세력인 후금後金사이에서 외교적으로 매우 어려운 처지에 놓이게 된다. 1627년 정묘호란으로 후금은 조선과 형제관계를 맺은 후 조선에 조공을 바치는 신하의 예를 요구한다. 조선은 재조지은再造之恩(나라를 다시 세워준 은혜-임진왜란 당시 명의 원조를 뜻함)의 명분론적 틀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조정은 대립이 극심해져 결국 병자호란을 자초하게 된다.

보광사 범종

파주의 전통사찰 중의 하나인 보광사에는 숭정칠년명동종崇禎七年銘銅鐘(2023년 보물로 승격 지정. 명칭은 보광사 범종으로 변경됨)이 있다. 인조 121634, 그러니까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난 7년 후에 새겨진 종이다. 2년 후인 1636년 병자호란이 터졌다. 숭정은 명나라 연호다. 이렇게 연관지어 봤을 때 그 당시 화이관華夷觀(중화문명이 세계의 중심이고 그 외는 오랑캐로 간주하는 관념)의 뿌리가 얼마나 깊이 박혀 있었는지 알 수 있다. 정묘호란을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후금을 한낱 오랑캐로 치부하는 것이 화를 불러온 것이다. 당연히 자기 자신을 알았어야 하지 않았을까. 주전론을 폈으면 그 대비가 있어야 하는데 별로 없었다. 무모하기 짝이 없었다는 것은 금방 입증이 되었다.

병자호란 전후

1619년 명과 후금간의 중원 패권의 결정적 전투였던 사르흐전투 때, 명의 지원군 요청에 대한 광해군의 결정을 미루면서 정세를 관망하여 처신하라는 밀지 여부, 강홍립의 임전자세와 후금에 투항 미스터리 등은 지금도 논란이 되고 있다. 광해군의 국제 정세관이 옳았다는 것에 무게를 두고 싶다. 그러나 반정에 의해 광해군은 폐위되고 죄인으로 강화를 거쳐 제주에 유배된 몸이 되고 말았다.

163612월 청 태종이 만족, 몽골족, 한족으로 이루어진 혼성군 10만 대군을 이끌고 조선을 침공하였다. 남한산성을 포위했을 때 최명길을 중심으로 청나라와 화친해야 한다고 주장한 주화파와 김상헌을 중심으로 결사 항전을 주장한 주전파와 의견이 대립되었다. 모두 부질없는 일이 되고 말았다. 이듬해 인조가 남한산성 밖으로 나와 삼전도에서 홍타이지에게 삼배구고두례三拜九叩頭禮(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예법)라는 항복의례를 치르고서 전쟁은 끝났기 때문이다.

그러나 심양으로 끌려가는 백성들, 즉 피로인被擄人인 조선의 백성에게는 가혹한 고난이 기다리고 있었다. 백성들은 청의 수도인 심양으로 전쟁포로가 되어 끌려가야 했다. 왕세자인 소현세자는 강화조약에 따라 볼모로 세자빈 강씨, 왕자 봉림대군(후일 효종), 대신과 자제들을 비롯한 60여만 명의 백성들과 함께 가야만 했다. 후대인들은 이 길을 피로노정被虜路程(병자호란 후 조선 백성이 청나라군에 심양으로 끌려갔던 길)이라 불렀다.

소현세자의 행적을 기록한 「심양일기」와 「심양장계」에 의하면 청인들은 붙잡아온 조선인을 날마다 성 밖에 모아놓고 몸값을 치르고 데려가도록 했는데, 그들이 요구하는 값이 너무 비싸 조선인은 국가차원에서 속환贖還을 호소하였다고 한다. 속환이란 포로로 붙잡힌 조선 백성들을 노예시장에서 돈을 주고 다시 구해 오는 것을 말하는데, 공식적으로 60만이라고 하니 그 외 이렇게 저렇게 붙잡혀 온 백성은 얼마나 될까 가늠이 안 된다.

패배한 나라 백성의 참상은 어디나 비참하다. 그 폐해는 특히 여성에게 극심했다. 처첩이 되는 등 높은 가격으로 매매되었다. 탈출하다가 붙잡히면 발뒤꿈치를 잘리는 형인 월형刖刑을 당해야 했으니 대부분 체념했을 것이다. 포로에서 속환되어 귀국한 여성을 환향녀還鄕女라 불렀는데, 이들을 대하는 조선 사회는 매우 부정적 분위기로 문제가 심각했다. 저희들이 무능하고 잘못해서 끌려갔다가 천신만고 끝에 돌아왔는데 색안경을 끼고 보았다. 더하여 아직까지도 환향녀에 를 덧붙여 심한 욕으로 사용하는 경향이 있다.

지금도 요동지역 곳곳에는 당시 포로의 삶을 살았던 조선인 후예들이 살고 있다. 조선인의 후예를 상징하는 족보와 성씨, 동성통혼 금지 등 조선 민족의 문화를 유지하는 후손들이 요녕, 길림, 하북지역에 박가보’, ‘박보촌’, ‘김가촌과 같은 집성촌을 이루어 살고 있다.

 삼학사

삼학사는 청나라와 화친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 척화파의 강경론자인 홍익한윤집오달제 3인이다. 이들을 일컬어 척화삼학사斥和三學士라고도 한다. 이들 셋은 청나라를 오랑캐라 하여 시종일관 주전론主戰論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결국 인조가 항복한 후 척화신斥和臣으로 찍혀 청나라에 끌려가 심양에서 죽임을 당했다. 그들은 현실 인식 유무를 떠나 주자학의 입장에서 충군애국忠君愛國의 정신과 명나라에 대한 모화慕華(중국의 문물을 섬기며 따르려는 사상)사상이 밑바탕에 깔려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나중에 1639 청 태종이 즉위한 지 13주년이자 청나라 중건 3주년을 기념하여 숭덕제 홍타이지는 삼학사의 높은 절개를 기리기 위해 심양에 사당과 비석 건립을 명했다. 특히 비석에는 삼한산두三韓山斗라는 휘호를 내렸다고 한다삼학사의 절의가 태산 같고 북두칠성처럼 변함이 없다는 뜻이다. 1932 “삼한산두라고 새겨진 비액이 발견되면서 심양의 춘일공원에 삼학사 유적비가 복원되었다.

남한산성에는 삼학사를 모신 사당인 현절사가 설치되어 있다. 매년 음력 910에는 삼학사를 기리는 제례를 지낸다

th-hyenjeulsa.png
*경기도 광주시 남한산성면에 있는 현절사

홍타이지는 그 시기에 왜 삼학사의 절개를 기리기 위한 사당과 비석 건립을 명했을까. 아직 중원을 장악하지 못한 홍타이지로서는 삼학사와 같은 충신이 절대 필요하지 않았을까. 마치 정몽주의 절개를 몇백 년이 지난 영조 시기에 국가적 차원에서 기리는 것과 다르지 않다. 후세 사람들은 현재를 살아가면서 시대적 상황과 필요에 따라 선현을 소환하여 재조명한다. 극진히 숭앙하기도 하고 또 비판하기도 한다. 공자가 죽었다 살았다 하지 않았던가.

인조와 슬픈 역사

파주시 탄현면 갈현리에는 조선 제 16대 비운의 임금인 인조와 왕비 인열왕후 한씨의 합장릉인 장릉이 있다. 처음에는 문산읍 운천리 대덕골에 있었으나 영조 7(1731) 석물 틈에 뱀들이 극성을 부려 지금의 위치로 옮겼다.

인조는 선조의 다섯째 아들인 정원군의 맏아들로 능양군에 봉해졌는데 광해군 15(1623) 반정을 통하여 왕위에 올랐다. 인조는 재위 27년 동안 많은 일을 겪었다. 이괄의 난, 정묘호란, 병자호란을 겪은 후 소현, 봉림 두 아들을 청에 인질로 보내야 하는 치욕을 당했다. 정치적으로도 당파싸움이 격화되어 대내외적으로 수많은 어려움을 겪다 164955세에 세상을 떠났다.

th=jangreung.png
*파주시 탄현면 갈현리 소재 장릉

인조는 승하하기 전에 아들이며 세자인 소현과 그 후손들을 모질게 내쳤다. 삼전도의 굴욕, 청에 대한 트라우마가 얼마나 심했으면 그러했을까? 그래도 자기 자식과 며느리를 죽이고 손자들까지 죽게 한 비정한 왕이라는 생각은 떨칠 수가 없다청나라에 볼모로 끌려갔던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은 8년 뒤인 1645년에 돌아왔다.

 소현세자는 당시 청나라에서 서양인들과의 접촉을 통해 새로운 문물과 사상을 받아들였고봉림대군은 철저한 반청주의자가 되어버렸다인조는 고국으로 돌아온 소현세자와 강빈손자들을 전혀 반기지 않았다소현세자가 청나라의 내부 사정과 서양 문물 이야기를 하며 책과 기계를 보여주자 분개하여 벼루를 들어 얼굴에 내리치기까지 하였다. 가슴앓이하던 소현세자는 병석에 누운 지 두 달 만에 의문의 죽음을 맞는다이후 소현세자 주변 세력과 강빈의 친정어머니와 남자 형제들을 귀양보냈고세자빈 강씨에게 사약을 내려 죽게 한 뒤 그들 모두를 사사했다.

 그것도 모자라 소현세자의 세 아들 석철석린석견을 제주도로 보냈다열 살도 안 된 인조의 손자들은 어머니 죄로 유배를 가서 석철석린은 다음 해에 죽었고셋째 경안군 석견은 겨우 젖 떨어진 나이에 제주도와 함양현을 거쳐 강화 교동도까지 9년 귀양살이를 견디며 간신히 목숨을 부지했다그때 경안군 나이 겨우 열세 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