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주에 대한 오랜 갈망
나는 평소 만주에 가고 싶다는 욕망이 있었다. 만주는 원래 한민족 고대국가의 활동 무대였다. 그런 고대사에서 또 독립운동사에서, 책에서 만주지방이 무대가 되는 경우가 많았다. 박지원의 열하일기에서는 지금의 심양인 성양盛陽이 나오고, 박경리의 소설 ‘토지’에서는 서희가 간도 용정으로 이주하여 활동하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또 황석영의 ‘철도원 삼대’에서는 지금의 장춘이 신경新京이라는 도시로 등장한다. 만주지역은 일제 강점기를 전후하여 우리 조선 동포들은 굶주림을 피하여 또는 독립이라는 웅대한 뜻을 품고 와서 정착해온 곳이다. 그런데 조상의 숨결이 아직도 숨 쉬고 있는 그곳을 한 번도 가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던 차 K기획사에서 ‘2025 광복 80주년 기념특집 동북기행’이라는 주제로 만주 동북지방 일대를 답사하는 계획을 발표하여 안성맞춤으로 가게 되었다. 대련에서 출발하여 심양, 장춘, 연길, 훈춘, 방천, 도문, 통화, 환인을 거쳐 단동으로, 다시 대련에 이르는 여정을 일주일 남짓 하는 기간에 다녀오는 프로그램이었다. 더욱이 시인이자 독립운동가인 윤동주가 2월 16일 순국 80주기를 맞아 일본 모교인 교토 도시샤 대학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받은 사실이 여러 언론에 보도되면서 시인의 생가 등을 가고 싶은 마음에 불을 질러 재촉하게 되었다.
중국을 몇 번 다녀온 일이 있지만 이번에는 정말 마음에 드는 여행이어서 그런지 가슴이 설렌다. 짐을 챙겨 떠나려 하는데 아내가 내 핸드폰을 보더니 미심쩍었는지 헝겊주머니를 내어주면서 핸드폰을 거기에 넣어 목에 걸고 가라고 한다. 그리고 걱정스런 말투로 상비약은 챙겼느냐고 채근한다. 초등학교 입학 때 어머니가 가슴에 콧수건을 달아주던 생각이 난다.
비룡호의 밤바다
인천 송도 국제여객터미널에서 수속을 마치고 기다리는데 붙임성이 좋은 중년 한 분이 능숙하게 여러 가지 출국절차도 미리 알려주고, 덧붙여 그동안 중국여행 경험담을 스스럼없이 이야기한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포천에 사는 S 선생이라고 하는데 그이는 주로 혼자 배낭여행을 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핸드폰 하나면 어디든 쉽게 여행할 수 있다고 말한다. 핸드폰의 기능과 앱 등도 잘 알고 능숙하다. 그럴듯하다.
배에 올라 동행한 H 선생과 예약된 211호를 찾아들어가니 6인실인데 4인만 배정되어 공간이 한결 여유가 있었다. 그러고 보니 조금 전에 만나 이야기하던 S 선생도 우리와 같은 방이다. 좀 늦게 들어온 목포의 Y 선생, H 선생과 나 이렇게 넷이 같은 방을 쓰게 되었다. 배로 떠나는 여행을 몇 차례 했더니 이제는 그리 지루한 걸 모르겠다. 아무튼 비룡호는 우리가 느긋하게 밤바다를 즐기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대련을 향해 굼벵이마냥 기어간다.
심심하여 바깥 구경을 나가는데 어디서 아기 울음소리가 들려온다. 우리 옆방 210호에서 나는 소리였다. 중국인이 입실한 방이었다. 얼마 만에 들어보는 소리인지 모르겠다. 태초의 소리, 갓난아기가 할 수 있는 언어, 그 소리는 한국, 중국, 일본, 서양 말도 아니고 그냥 세상을 향해 내는 고고呱呱의 성聲이다. 나 여기 있다고. 그런데 불편한지 자지러지더니 금방 잦아든다. 아마 소망이 이루어졌나보다. 그 아기는 우는 게 언어다.
입국, 안내원설명
대련에 입항하자마자 밖을 보니 비가 온다. 입국수속을 밟는 곳까지 그리 멀지도 않은데 버스에 타고 이동하란다. 불과 오십 미터도 안 되는 것 같은데. 그래도 고객의 편의를 위해서 그런 조치를 취한 것 같다. 어쨌든 고마운 일이다. 현지 안내원의 인솔하에 버스에 탑승하자 심양을 향해 떠난다. 대련은 마지막 날 들리기로 한 것이다. 심양을 향해 출발한 후 안내원은 자기소개와 몇 가지 참고사항을 일러두고는 중국, 만주와 관련한 여러 가지 현황과 역사적 사실들을 안내원답게 쏟아놓는다. 그중에서 홍산문화와 안시성 전투에 대한 언급이 특이했다.
앞선 홍산문화
기원전 오천년 중국 요녕성과 내몽골에 걸친 서요하 유역에 존재했던 신석기 시대 문화다. 황하문명을 비롯한 기존의 4대 문명보다 천년 이상 앞선 고대문명으로 평가받으며 요하문명의 핵심이다. 특징으로는 수렵과 채집이 주요 경제활동이었는데 청동기 시대로 들어서는 후기에는 기초적인 농경과 돼지, 양 등 가축 사육이 이루어졌다. 씨족사회를 넘어 여러 신분 계층이 존재하는 원시국가의 모습을 보이는데 특히 여성 우위의 사회적 구조를 보인다. 유적지는 우리가 가고 있는 심양지역의 요하 상류지역인 요녕성 능원시와 건평현 경계에 위치한 우하량牛河梁 유적지가 대표적으로 여신묘, 제단, 무덤 등 고대국가의 존재를 입증하는 유적들이 발견되었다. 유물로는 옥기와 빗살무늬 및 채문 토기, 타‧마‧세석기 등이 발견되었는데 홍산문화가 존재했음을 입증하는 유물들이다. 특히 옥기는 수암만족자치현인 요녕성 안산시 수암현에서 생산되는 옥玉으로 만든 그릇이라는고 한다. 유물이 나온 우하량 유적지가 수암에서 가깝고, 유물이 현재 수암에서 생산되는 옥과 같은 종류라고 하니 정확히 입증되는 것이다.
나는 십년 전후로 해서 몇 번 수암에 간 적이 있다. 오십만이 거주하는 수암은 분지 형태를 띠었는데, 옥과 관련한 산업으로 생활하는 지방이다. 도시 전체가 옥이다. 동행한 분은 많은 옥 관련 물품을 샀다. 나는 옥장신구를 산 일이 있다.
홍산문화의 유적과 유물이 한민족의 고대사와 밀접한 연관성이 있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토템 문화, 적성총 형태의 무덤, 빗살무늬 토기 등에서 고조선과의 유사성이 발견된다. 요동과 한반도 북부가 동일 문화권이었음을 나타내는 증거다. 홍산문화는 아직도 활발히 연구가 진행 중이라니 동아시아 고대사 연구에 중요한 전환점이 될 수도 있다. 허긴 우리가 배운 고조선, 고구려, 발해를 비롯한 고대사는 홍산문화가 발견된 지역이다. 지금 우리가 가고 있는 연길과 백두산, 두만강, 압록강 근처가 모두 홍산문화와 연결되어 있다고 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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