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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르하치와 장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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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르하치와 후금탄생

아침에 호텔에서 일어나 동쪽을 바라보니 붉은 해가 시내 한복판을 비추고 있었다. 사백여 년 전 과거의 슬픈 역사가 여기서 있었는가. 어떻게 있었는지는 기록으로 남아 있을 뿐이다. 그런 역사가 있었는지 없었는지 심양은 오고 가는 사람들과 차량들로 붐비고 있었다. 그 사이를 비집고 심양 시내를 빠져나왔다. 장춘으로 향했다. 장춘은 대련에서 심양까지 온 것만큼 심양에서 비슷한 거리라고 한다. 끝없는 만주벌판을 가로질러 한없이 간다. 이 고속도로는 대련에서 하얼빈까지 놓였다고 한다. 이 도로를 몇 번 가 본 적이 있지만 휴게소를 들릴 때마다 그 모습이 매번 달랐다. 이제는 너무나 깨끗하다. 그만큼 쇄신한 것 같다.

마침 후금을 세운 누르하치의 고향이 고속도로 표지판에 보인다. 그는 1559년 중국 랴오닝성 무순撫順에서 태어났다. 그는 20대 초반 명나라와의 전쟁에서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사망한 사건을 계기로 복수를 다짐하며 세력을 확장하기 시작했다. 결국 여진족을 통일하는데 성공한다. 특히 건주, 해서, 야인 여진으로 분리되어 있던 부족을 통합하여 후금을 건국한다. 마치 고려가 후삼국을 통합하여 명실상부한 나라를 세운 것에 견주어 볼 수 있다.

후금을 건국하고 자신을 칸Khan으로 칭하면서 명나라에 대한 전쟁을 선포한다. 누루하치는 후금의 군사적 기반을 다지기 위해 팔기제라는 독특한 군사조직을 도입하여 청나라가 만주족 중심 국가로 발전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누르하치는 1619사르흐전투에서 명나라의 대군을 격파한 것은 후금의 역사에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이때 조선은 명의 지원 요청에 의하여 강홍립이 일만 삼천 명의 조선 병력을 이끌고 참전하였으나 누르하치에 투항한다. 누르하치는 명나라와의 영원성전투에서 패한 후 1626년 사망하지만 그 위업은 그의 아들 홍타이지에 의해 이루어진다. 홍타이지는 1636년 국호를 청淸으로 변경하면서 중국 본토로의 확장을 본격화하였다.

만주는 요녕, 길림, 흑룡강 등 중국 동북 3성만 하더라도 면적이 한반도의 네 배나 되고 외만주를 포함하면 무려 열 배에 이른다. 인구는 동북 3성만 구천만 명이다. 외만주를 포함하면 일억 삼천만 명이다.

만주는 수천 년간 다양한 민족이 살다 떠나고 정착한 혼종의 땅이다. 고조선과 부여, 고구려, 발해의 숨결이 살아 있는 공간으로 우리 한민족의 역사가 깊게 뿌리 내린 강역이다. 또한 청 제국의 근원이었고, 일본 제국의 그림자도 얼씬거리던 터이기도 하다. 현재 이 중국 땅이 누르하치로부터 시작되었다.

만주와 월롱산성

만주라는 지명은 만주족에서 비롯했다. 만주족滿洲族이라 말하지 않아도 만족滿族은 중국어로 그 자체가 만족manzu이니 만족이라고도 한다. 명칭은 1635년 청 숭덕제 홍타이지가 자신의 민족인 여진족을 만주滿洲라고 개칭하여 부른 것이 시초다. 그 후 건륭제는 1777흠정만주원류고를 편찬하면서 만주라는 명칭은 문수보살의 원 명칭인 범어 만주사리manjusri에서 유래했다고 규정했다. 여기서 문수보살과 홍타이지의 아버지 누르하치는 어떤 관련이 있을까. 2015년 일간지에 게재한 조용헌의 청 태종과 월롱산성이라는 글 중 원문 일부를 싣는다.

을미년 새해를 맞아 파주 월롱산성月籠山城에 올라갔다. 해발 246m 밖에 안 되는 낮은 산성이지만 주변 일대의 풍광이 한눈에 들어오는 전략 요충지다. 가난에 시달리면서도 항상 수불석권手不釋卷(손에서 책을 놓지 않음)의 풍모를 지니고 있는 묵개默介 선생이 한번 올라가 보기를 권유했기 때문이다.

월롱산성은 1636년 병자호란 때 청 태종인 홍타이지가 서울 입성을 앞에 두고 3일간 머물며 제단을 쌓고 제사를 올렸던 터이다. 왜 서울을 코앞에 두고 한가하게 3일간이나 머물렀을까? 홍타이지는 월롱산성에서 북한산을 바라보다가 죽은 아버지인 누르하치의 모습을 보았다. 북한산 모습이 아버지 문수보살文殊菩薩로 보였던 것이다. ! 문수보살이 여기에 계시는구나! 누르하치는 생전에 자신을 문수보살의 화신이라고 주장했다. 홍타이지는 조선을 치러 왔다가 전혀 생각지도 않게 월롱산성에서 죽은 아버지 얼굴을 발견하고 문수개념을 체득한 것이다.

누르하치는 왜 문수보살을 강조했을까? 그때까지만 해도 여진족은 건주, 해서, 야인으로 분열돼 있었다. 민족을 통합하자면 문수보살이 필요하다. 문수는 지혜를 상징한다. 문수는 화엄사상의 지혜를 상징하는 보살이다. 화엄華嚴은 일즉다一卽多 다즉일多卽一'이 핵심이다. 문수는 통합을 상징하는 인격이다. 여진족 발음으로 '만주滿洲''문수文殊'라는 뜻이라고 한다. 백두산은 문수보살이 상주하는 산이라고 여겼다.

당시 30만 인구에 불과했던 여진족이 1억이 넘는 명나라를 먹기 위해서는 인력 보충과 함께 조선·몽골과 연대하는 일이 당면 과제였던 것이다. 전쟁을 하더라도 상대방이 항복만 하면 죽이지 않고 살려주는 것이 문수보살의 지혜로운 무력행사 방식이었다. 이렇게 해서 여진은 몽골도 통합했다. 남한산성에서 항복한 인조가 큰절 몇 번 했다고 해서 목을 치지 않고 살려준 것도 이런 맥락이다. 당시 조선은 주자 성리학의 화이관華夷觀에 사로잡혀 있었다. 화이관에 따르면 여진족은 천박한 오랑캐였다. 병자호란은 문수 화엄주자 성리학의 대결이기도 하였다. 월롱산성에 올라가 만주의 의미를 되새겨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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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롱산 정상에서 바라본 북한산

장춘과 철도원 삼대

세계의 근대는 철도 개척의 역사로 시작되었다. 한반도에서 대륙으로 이어지던 철도는 식민지 근대와 제국주의 상징물이다. 황석영이 지은 철도원 삼대에 일제 식민지 시대의 철도와 관련된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철도 기관수인 이일철이 아내와 아들 지산을 데리고 지금의 장춘인 신경에 사는 고모댁을 가는 여정이다. 장춘은 경성에서 경의선을 따라 신의주까지 간 다음 압록강 건너 단동을 거쳐 만주벌판을 종단하여 밤새도록 달려 지금의 심양인 봉천에 도착한다. 봉천에서 북동쪽으로 신의주에서 온 거 만큼 달리면 신경에 도착한다. 신경에 도착한 장면과 일철의 아내와 고모 사이에서 이런 대화가 오고간다.

어째서 그맘때 주위의 몇몇 아는 사람들이 사라질 때마다 찾아보면 모두 만주로 가버렸을까.

신경역에 내리니 이미 저녁때가 되었다. 플랫폼에는 마중 나온 이들이 가득했고….

, 여기선 일본말이 아니면 대접받지 못한다. 시장에 가면 중국말이 대접받지만 호테루나 까페나 차부에선 일본말을 써야 고분고분해.’

조선말은요?’

마차나 택시를 타려고 마부나 운전수에게 조선옷 입고 조선말 하면 못 알아듣는 척하구, 아니면 그냥 걸어가라며 안 태워준다. 그러군 만주족 한족 것들이 우리 보구 쑥덕거린다. 망국노라구 그래.’

여기선 그런다더라. 일본인 일등국민, 조선인 이등국민, 만주족 한족 몽골족은 삼등국민이야.’”

위만황궁과 마지막 황제 부의

청나라는 심양에서 나라를 세우고 장춘에서 멸망했다. 그곳으로 가는 것이다. 장춘하면 먼저 청의 마지막 황제 부의溥儀가 떠오를 것이다. 위만황궁은 부의가 1932년부터 일제가 패망한 1945년까지 만주국 황제로 직무를 보며 생활하던 곳이다. 현재는 위만황궁 박물관으로 당시를 보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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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의의 위만황궁 집무실

20세기 초반 동아시아는 제국주의와 민족주의가 충돌하던 시기였다. 구체제는 붕괴되고 신체제가 자리 잡기 전의 혼란 속에서 한 인물은 역사 속 거대한 변곡점의 상징이 되었다.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이자, '허수아비 황제'로 불렸던 부의다. 그는 두 차례 황제의 자리에 올랐지만, 단 한 번도 온전한 주권을 행사하지 못한 비운의 군주였다. 그의 두 번째 제국인 만주국은 오직 일본의 군국주의 욕망에서 탄생한 인공적인 국가였고, 부의는 그 정점에 앉은 꼭두각시였다.

부의는 1906년 청나라 황족 누르하치 후손으로 태어나 불과 세 살의 나이에 황위에 올랐다. 하지만 청나라는 이미 내외부의 압력에 흔들리고 있었고, 그가 즉위한 지 불과 3년 만에 신해혁명이 발발하여 제국은 종말을 고했다. 1912년 선통제가 퇴위하면서 수천 년 이어진 중국 황제제도는 막을 내렸다. 이후 부의는 북경 자금성에 머물며 황제의 형식을 갖춘 유폐된 군주로 살아갔다.

하지만 그에게 황제의 자리는 1931년 일본 관동군의 만주사변과 함께 다시 돌아왔다. 일본은 만주를 점령한 후 이듬해인 1932년 만주국이라는 괴뢰국가를 수립하고 부의를 집정으로 옹립했다. 그가 황제로 재등극한 것은 1934년으로 이때부터 '강덕제康德帝'라는 칭호를 사용했다.

겉으로는 만주국은 독립된 자주국가를 표방했다. 수도 신경(지금의 장춘)을 중심으로 법과 행정을 갖추고 국기와 국가도 있었으며 황제도 존재했다. 그러나 정치·군사·외교의 모든 결정권은 일본 관동군이 쥐고 있었다. 부의는 일본의 계획에 따라 움직이는 허수아비에 불과했다.

일본은 부의를 앞세워 만주국을 중국인, 일본인, 만주인, 조선인, 몽골인 등 5개 민족이 서로 협력하며 화합한다는 ‘5족협화의 이상국가로 선전했지만, 실상은 일본인은 대륙 침략의 전초기지로 삼았다. 만주는 풍부한 자원과 전략적 요충지로 일본은 이를 이용해 중국 본토로의 진출을 꾀했던 것이다.

일본은 부의에게 상징적 권위만을 부여한 채, 모든 실권을 박탈했다. 그는 만주국 궁전에서 일본 군인과 고문들의 감시 아래 고립된 생활을 해야 했고, 황제의 권위는 사라진 지 오래였다.

1945년 일본의 패전과 함께 만주국은 붕괴됐다. 부의는 소련에 의해 포로로 붙잡혀 시베리아로 압송되었고, 이후 1950년 중국으로 송환되어 전범 재교육소에 수감되었다.

1959년 마오쩌둥 정권은 부의를 사면하고, 그는 일반 시민으로서 북경 식물원의 정원사로 일하게 되었다. 붉은 중국의 백성으로 전환된 이 마지막 황제는 그제야 비로소 자신의 의지대로 살아갈 수 있는 삶을 살기 시작했다. 그리고 1967년 문화대혁명의 소용돌이가 일던 시기에 조용히 생을 마감했다.

결론적으로 만주국과 부의의 관계는 주권을 잃은 군주의 비극이자, 침략자의 도구로 이용당한 국가의 허상이다. 부의는 분명한 역사적 책임에서 자유롭지 않지만, 동시에 역사의 거대한 파도에 휘말린 20세기 동아시아가 겪은 고통과 혼란을 대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