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관장군묘에서 보낸 국민학교 시절 - 22회 오수영
나는 서울에서 태어나 생활하다가 일제의 탄압이 심해지자 해방 전에 온 가족이 분수3리로 이사를 왔다. 초등학교 때 이름은 태랑이었고 호적에는 수영으로 되어 있지만, 동창들 사이에서는 지금도 태랑이라고 부른다.
8.15 해방 후 만장산 아래 지금의 광탄중·고등학교 자리에 일제 시대부터 있었던 신산초등학교에 입학했다. 당시에는 풍금, 운동장, 책상과 교실이 있어 지금의 교육환경에 비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교육환경이 좋았다.
6.25 전쟁이 발발하자 학교에 인민군들이 주둔하게 되어 학교를 윤관 장군 묘로 이전했다. 포대에 흙을 담아 낮은 담을 치고 가운데 천막을 쳤으며, 천막 안에는 탄피 상자를 책상처럼 놓고 공부했다. 일부 학생들은 재실에서 공부하기도 했다.
저학년 학생들은 처음에는 윤관장군묘로 오지 않고 면사무소 뒤 과거 양조장 터에 있던 광탄면사무소 소유의 일자형 창고에서 공부했다. 휴전 후 몇 달이 지나자 저학년들도 윤관장군묘로 옮겨와 전교생이 함께 공부했다. 우리는 21회 선배들의 뒤를 이어 다음 해 윤관장군묘에서 졸업했다.
초등학교 입학 당시에는 여학생들도 있었지만, 전쟁 중이라 위험한 상황이 많아 여학생들이 등하교하기에 안전하지 못했다. 졸업 시에는 30명이 졸업했으나 여학생은 한 명도 없었다.
어려운 여건 속에서 학교를 다녔어도 친구들과 친숙하게 화합하며 가족적인 분위기 속에서 즐겁게 생활했다. 공부를 열심히 할 수 있는 환경은 아니었고, 공부는 각자 알아서 해야 했다. 공부를 못하면 1년간 낙제하는 제도가 있었지만, 학교를 7년 다니면 무조건 졸업장을 받았다. 그래서 초등학교를 졸업해도 구구단과 한글을 모르는 친구들이 많았다.
배고프고 힘들었지만 윤관장군 묘에서 공부 대신 함께 어울려 놀기만 했던 시절이었다. 당시 선생님은 엄하셨던 이수열 선생님, 송라동에 사셨던 안도승 선생님, 방축리에 사셨던 심영택 선생님이 계셨고, 후원회 선생님으로 사청에 사셨던 김성해 선생님이 계셨다. 후원회 선생님은 등록금으로 내는 쌀과 보리를 걷는 지금의 행정실 업무를 담당하셨다.
후배들에게는 미 군정에서 분유를 제공해 주어 크게 배고프지 않았으나, 우리는 전쟁 중이라 모두가 배고픈 시기였기에 도시락을 가져오는 학생이 많지 않았다. 그래도 겨울에 우리들이 가져온 장작으로 난로를 피우면 난로 위에 도시락을 올려놓고 데워 먹었던 기억이 난다.
교실, 운동장, 책상도 없고 풍금도 없는 윤관장군묘 시절, 초등학교 생활을 마무리하는 졸업식은 새끼줄을 걸어놓고 사진 찍는 것으로 대신했다.
윤관장군 묘의 재실에서 계속 공부할 수 없어서 후배들은 지금의 광탄농업협동조합과 하나로 마트가 있는 자리(과거 경남기업에서 운영하던 세탁소 자리)에 미군들이 중장비를 이용해 터를 닦아주고 군용 텐트를 제공해주어 학교를 옮겨 공부를 계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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