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신산이란? -41회 안재형
국민학교 졸업 전에 약 1년간 축구 선수 생활을 하였다. 어느날 축구부 김선정 선생님께서 축구공을 주며 차보라고 하셔서 냅다 질렀는데 공이 떠서 좀 날아갔나 보다. 그리고 졸지에 학교 대표 축구선수가 된 것이다.
당시 김선정 선생님께서는 저학년 담임을 맡으셨는데 학부모들이 자녀를 선생님 반으로 넣고 싶어한다는 소문을 들은 적이 있다. 키가 작으셨음에도 축구를 잘 하셨었고 엄격하게 지도하셔서 좀 무섭기도 하였지만 졸업할 때까지 잘 견뎌낸 듯 하다.
선생님 연락처는 스마트폰 주소록에 잘 보관되어 있으며, 몇 년 전 전화통화에서 아직 축구를 하시는데 공격 보다는 센터백을 맡는다고 하셨다. 그 어린 시절 금촌에서 있었던 파주 대회에서 승부차기(난 3번째) 끝에 우승으로 돼지를 선물로 받은 것이 제일 기억에 남고, 한 번은 문산국민학교 키 큰 선수의 왼발 슛을 막아내지 못해 아쉬움을 삼키기도 했었다.
축구를 처음에는 작은 운동장에서, 나중에는 큰 운동장에서 하였는데 축구장 두 개를 만들 수 있을 정도로 크고, 여름방학 중에는 서울에서 전지 훈련을 와서 같이 경기를 치르기도 하였다.
그 때 서울 선수들은 덩치도 크고 콧대가 셌는데, 우리 신산 친구들은 끈질기게 맞서 경기를 대등하게 했었다. 친구 석순이는 골아웃이 될 뻔한 공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킥을 하여 골을 만들어 낸 것이 좋은 추억으로 남아 있다.
신산 국민학교에서의 축구생활은 나에게 인생의 주춧돌이라 여겨진다. 특출나지도 않았고 사교성이 없었던 내가 대학생활을 원만히 할 수 있었던 것은 축구 때문이었다.
축구 동아리에서의 맹활약은 친구 및 선후배들과의 교류를 원활하게 해 주었고, 나 혼자만의 힘은 아니지만 서울시 의과대학 축구대회에서 2회 연속 우승한 것은 대학생활을 잘 하는데 적지 않은 도움이 된 것이다.
그 후 군대와 병원에서도 축구는 내 생활에서 빼 놓을 수 없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축구를 좋아하지만, 나는 그 중에서도 축구를 찐하게 좋아하는 사람들과 많은 인연을 맺고 있다.
여러 축구 대회에서 우승 트로피도 들어 봤고, 개인상도 더러 받아보았다. 외국 여행은 한국을 대표하여 세계의사축구대회에 참석하는 축구투어로 하기도 하였다.
나이가 들어 무릅에 이상이 생겨 축구를 중단하였지만, 어렸을 적에 신산 국민학교에서 축구를 같이 한 친구들과 아직도 정기적으로 만나 소주를 기울이고 있다.
철학자 쇼펜하우어는 행복의 90%는 건강에 좌우된다고 하였는데, 축구를 통해 건강을 유지하는 방법을 터득하였으니 이보다 더 큰 행운이 어찌 있으랴. 축구와 함께 한 반백년이 넘는 인생길이다.
어느날 한글 호를 만들고 싶었는데, 新山국민학교 그리고 廣灘중학교에서 한자씩 그 뜻을 차용하여 뫼여울이라 지었다. 인생 후반부에 어린 시절을 생각하니 신산, 너에게 참 많은 빚을 지었네 그려. 고맙고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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