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산초등학교에서의 축구 지도 - 용관중 교사(1977~1979재직)
이 글은 2005년 홍천군 삼생초등학교에서 테니스를 지도하며 “테니스 레슨 카페”를 만들면서 작성했던 『신산초등학교에서의 축구 지도』라는 글을, 이번 신산초등학교 개교 100주년 기념 원고 모집에 글을 올리고자, 취지에 맞게 고쳐서 작성했습니다.
기억을 되살리기에는 너무 까마득한 일이라 제대로 기억해낼까 하는 걱정이 앞섭니다.
1977년 초임으로 3학년2반 담임을 맡게 되었는데(신산51회 졸업생들)
지금은 말도 안되는 얘기지만 그 당시에는 아이들 성적 올린다는 이유로 손바닥 때려가면서 열심히 가르쳤습니다. 초임 교사라 아이들을 하교시키면, 다음 날 아침 아이들을 볼 때까지 그리워지고, 아침까지의 시간이 너무 길게 느껴질 정도로 아이들한테 정도, 애착도 많이 가던 그런 시절이었습니다.
당시에는 각 학교마다 육성종목을 지정하여 학교 운동부를 지도하는 것을 굉장히 중요시 여겼고, 따라서 젊은 남자 선생님이라면 한 종목씩 맡아, 방과후면 운동장에 나가서 아이들 운동 지도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겨졌습니다.
지금보다 의복이나 난방 시설이 굉장히 열악한 중에도, 한겨울 혹한기에 운동장에 트랙을 그려 눈 치우는 것은 당연하고(그렇지 않으면 서슬 퍼렇던 교육청 장학사의 질책을 엄청 받음), 좀 심하게 나가는 학교에서는 트랙을 빙 돌아가면서 비닐하우스를 만들어 전천후로 운동부를 지도하도록 하였습니다.
당시 젊은 남자 선생님으로는 전주교대(전주인지 목포인지 정확하지 않음)를 저보다 한 해 먼저 졸업한 P 선생님과 인천교대를 저보다 한 해 뒤에 졸업한 K 선생님, 그리고 저, 이렇게 3명이었습니다. 그래서 축구부는 P, 남자 배구부는 제가, 여자 배구부는 K, 그리고 육상부는 우리보다 10세 정도 연상이고 체육주임을 맡고 있던 김용직 선생님이 맡았습니다.
저는 남자 배구부를 지도하면서 당시 신산초등학교는 축구부 위주로 운영되기도 하였고, 중고등학교나 교육대학 시절에 운동을 좋아하다 보니 반대표로 뛸 정도의 실력만 있었지 배구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어서, 그저 그렇게 나름대로 열심히 지도하는 형편이었습니다.
파주군은 축구군이라 불릴 정도로 축구에 대해 열기가 높아 1978년 군 체육대회가 열렸을 때에는 6학년부 16팀, 5학년부 15팀이 참가할 정도였습니다. 현재 국가대표 트레이닝 센터가 파주군에 위치한 것이 아마 그런 열기가 이어져 그렇게 되지 않았나 추측해 봅니다.
축구부는 6학년을 중심으로 저와 연배가 비슷한 C 코치가 지도하고 있었는데, 가을이 되자 광탄중학교를 졸업하고 당시 해외 파견이 인기가 있던 시절이라 중동 지방으로 해외근로자로 일하러 나가기 위해 준비 중이던 정해영(이름은 정확하지 않음)코치가 4학년을 지도하게 되었습니다. 지금부터의 이야기는 정해영 코치와 4학년 축구부를 중심으로 이어집니다.
정해영 코치는 신산초등학교와 광탄중학교 축구부 주장 출신으로 후배 학생들을 지도한다는 입장으로, 지도 방식은 스파르타식이었지만 굉장히 열심히 지도하였습니다.
지금으로서는 축구 실력이 가늠이 안 되지만, 당시 파주군의 축구 실력과 축구 지도 능력으로 보아 뛰어났을 거라고 생각됩니다. 더구나 그 정해영 코치를 신산초등학교에서 지도한 코치 선생님이 부천에서 축구를 가르치고 있었는데, 아주 뛰어난 지도자로 그 분이 가르친 골키퍼 최인영 선수, 수비에 전종선 선수 등이 몇 년 후에 국가대표가 될 정도였습니다.
그 밖에 파주군에는 각 면마다 국가대표 축구 선수를 적어도 2~3명이 배출될 정도로 축구에 대한 열기나 실력이 뛰어났습니다. 그래서 면 대항 축구시합이 열리면 11명 중에는 지금으로 말하면 프로 선수인 실업 선수가 한두 명 낄 정도로 대단하였습니다.
해가 짧아지는 가을부터 4학년 중에서 선발하여 지도하는데 아침 7시 반까지 오라고 합니다. 처음에는 아이들이 늦게 와서 제대로 훈련이 되질 않더니, 며칠이 지나자 아이들이 새벽안개를 헤치며 학교에 오고, 훈련을 제대로 합니다. 코치가 우리가 보는 데서는 별로 무섭게 하지 않는데도 아이들이 무척 열심히 합니다.
나중에는 아침 훈련에 코치가 없는 데도 코치가 있을 때보다 더 열심히 합니다. 실력도 쑥쑥 늘어갑니다. 한두 달이 지나자 기본기가 잡히고, 서너 달이 지나자 5~6학년과 연습 게임을 해도 덩치에서 밀리지 기술은 더 뛰어나게 되었고, 시합을 대등하게 합니다.
정해영 코치 자신이 배운 대로 기본 기술, 운동 감각, 게임 운영 능력을 길러주는 데, 매섭게 가르치고 배우다 보니 실력이 쑥쑥 늘어갑니다. 그래서 하루는 술자리에서 그런 비결을 물어보았습니다.
“어떻게 아이들을 때리지도 않고 욕도 하지 않는데, 아이들이 정코치만 보면 무서워서 쩔쩔매고 그렇게 열심히 축구를 하느냐?” 그랬더니, 아이들이 훈련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여러 사람이 보는 곳에서는 욕도 별로 하지 않고 때리지도 않지만, 체육창고 뒤로 끌고 가서 혼을 내준다고 합니다. “그러면, 코치가 없을 때 주장을 중심으로 코치가 있을 때보다 더 열심히 하는 것은 어떻게 된 거냐?” 이렇게 물었더니 다음과 같이 대답합니다.
개인 사정으로 코치가 아침 훈련에 참가하지 못할 일이 생기면 며칠 전부터 습관을 들인다고 합니다. “내일은 코치 선생님이 서울 갈 일이 있어 아침에 나오지 못하니까, 주장 한걸이를 중심으로 연습해라.” 하고는 연습할 내용을 알려준다고 합니다. 그러고는 다음 날 훈련할 시간에 학교 숲 뒤에 와서 몰래 지켜본다고 합니다.
초등학교 4학년 아이들이니까 당연히 지각하는 놈에, 그 무섭던 코치 선생님이 없으니까 장난치며, 시시덕거리고, 말 안 해도 상황을 눈으로 보지 않아도 뻔해 보입니다. 이 때 코치 선생님이 나타납니다. 물론 창고 뒤로 끌려가서 벌어질 상황은 알고도 남습니다. 이런 일을 몇 번 한다고 합니다. 이렇게 되면 말 그대로 코치 선생님이 없으면 주장을 중심으로, 코치 선생님이 있을 때보다 더 무섭게 합니다.
코치 선생님이 언제 튀어나올지 모릅니다. 주장은 주장대로 코치 선생님이 없을 때 제대로 하지 않으면 엄청 혼나니까 더 쥐 잡듯이 하고, 아이들도 열심히 따르고, 주장의 권위도 점점 세어집니다. 이렇게 되면 주장이 코치 선생님보다 더 무섭습니다. 훈련 강도는 세어지고, 집중력도 높아집니다. 실력은 말 그대로 일취월장합니다.
그런데 사건이 터졌습니다.
다음 해인 1978년 봄, 6학년 한 학생이 파주군 축구대표 골키퍼로 선발되었습니다. 그런데 선발된 어린이가 학교에는 오지 않고 종종 중간에 새는 겁니다. 그런 일이 반복되자 5일장을 돌아다니며 노점상을 하는 아이 아버지가 학교로 찾아와서, 파주군 대표로 선발도 되었는데 중간치기를 자주하고 공부와 훈련은 안하니 아이를 혼을 내서라도 가르쳐 달랬다고 합니다. 그런데 아이가 또 중간치기를 한 겁니다.
아이 입장에서야 군 대표로 선발될 정도로 운동신경은 뛰어났겠지만, 반강제 스파르타식으로 훈련을 하니 그럴 만도 하겠지만, 담당 선생님이나 코치 입장에서는 군 대표로 선발된 마당에 더 열심히 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고 아이 아버지도 부탁한 일이 있어, 본보기를 보이려고 아이를 때려주었습니다.
먼저 C 코치가 엉덩이를 때렸습니다. 다음에는 P 선생님이 혼내주었습니다. 그런데 아이가 매를 맞다가 선생님한테 욕을 했다고 합니다. 당시로서는 상상도 못할 일이 벌어지자 더 때렸겠지요.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 당시 현장에 정해영 코치는 타지에 가 있어 자리를 같이 하지 않았습니다.(제가 현장을 보지 않고 들은 이야기로 다소 차이가 있을 수 있음)
상황은 다음 날 크게 벌어졌습니다.
아침에 출근하니, 아이 아버지가 아이를 리어카에 싣고, 광탄 삼거리 지서 앞에서 난리를 쳐, 학부형들이 학교로 쳐들어온다고 합니다. 그러자 연세 지긋하시던 여자 선배 선생님이 교무실에 있으면 일이 크게 벌어질 것 같아, 운동 지도하는 젊은 남자 선생님들은 모두 피하라는 겁니다. 그래서 피해 있다가 상황이 종료되어서야 교실로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 일로 P 선생님과 C 코치는 의정부 경찰서 유치장에 있다가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육본에서 근무하던 P 선생님의 형 덕분에 사흘만에야 학교로 복귀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당시에는 군인이 득세하던 시절로 더군다나 육군사관학교 출신이면 무소불위의 힘이 있었음)
이제 P선생님은 축구부를 담당할 수 없게 되었고, C 코치도 축구를 지도할 수 없었고, 정해영 코치도 중동으로 떠나게 되어 오롯이 저 혼자 축구부를 떠맡게 되었습니다. 축구부를 떠맡았을 때, 아이들이 저보다 기능도 훨씬 뛰어나고, 축구나 운동에 대한 식견도 부족하여 망막하였습니다.
지금으로서는 너무 세월이 흘러 그 당시 어떤 지도 방향이나 방침을 가지고 지도하였는지 기억할 수 없지만, 아이들을 인간적으로 대하고, 아이들에게 의견을 구하고 합의를 통하여 훈련 프로그램이나 일정을 계획하여 축구부를 지도하였습니다. 지금도 기억에 특히 남는 것은 어릴 적에 운동 감각을 익히는 것이 중요하다고 여겨 기본 기능을 중시하고 또 감각을 키우는 데 중점을 두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마무리 훈련에 볼 리프팅을 많이 하였습니다.
1978년 5월경에 축구부를 떠맡아 지도한 후, 1979년 9월 1일 신산초등학교를 떠날 즈음에는 볼 리프팅을 3,000개 이상 하는 어린이가 5~6명이나 되었고 나머지 어린이도 1000번을 넘게 하였습니다. 볼 리프팅 3000번을 한다는 것은 30분 동안 볼을 한 번도 떨어뜨리지 않아야 합니다.
제기차기는 그만 차라고 할 때까지 하루 종일 찹니다. 그것도 오른발 한 번, 왼 발 한 번, 번갈아 하는 것으로 핸디를 주어하였으므로, 이 정도면 기능이나 감각 면에서는 초등학교 수준에서는 당시 대한민국 최고의 실력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지금도 기억에 남는 것은 어려웠던 가정 살림에도 불구하고 5월 15일 스승의 날에 주장 한걸이를 비롯한 몇몇 축구부원들이 자신들의 용돈을 모아 치킨 2마리를 사가지고 저에게 와, 대접을 받은 것입니다. 1년 5개월이 채 안 되는 짧은 기간 동안 아이들이 따르고 훌륭한 성장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은, 스파르타식 훈련과 강압적인 훈련에 익숙했던 아이들에게, 인간적으로 대하고 아이들 의견을 존중한 것이 가장 큰 요인이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1979년 9월 1일, 저는 저의 고향인 강원도로 전출을 희망하여 홍천에서 출퇴근이 가능한 횡성군 창봉초등학교로 오게 됩니다. 1988년에는 한걸이와 선민이가 홍천읍에서도 버스로 두 시간 이상 걸리는 오대산 골짜기에 있는 명개분교를 방문하여 좋은 인연이 이어지게 되고, 화계초등학교에 근무하던 1998년 여름에는 10여명의 제자들이 신부나 여자 친구들을 대동하고 찾아와 천렵도 하고, 밤새 고스톱도 치고, 새벽같이 일어나 홍천조기축구클럽과 친선 축구경기를 하는 등 사제간의 정도 나누었습니다.
지금은 연락이 소원하지만, 2000년 여름방학에는 제자들의 초청으로 오랜만에 신산초등학교를 방문하여 제자들이 선물한 유니폼과 축구화를 갖춰, 축구도 즐기고 이야기꽃을 피우기도 하였습니다.
세월이 흘러 이제는 50대 후반이 된 제자들. 모두의 이름을 기억할 수는 없지만 지금도 그리운 얼굴들이 떠오릅니다.
이한걸, 이안성, 정운찬, 박용성, 안선민, 이성철, 안선명….
여기까지는 2005년 작성한 글을 조금 고쳐 쓴 글입니다.
안덕기 님이 보내온,
당시 4학년 2반 제자인 경은주 님이 투고한 『용관중 선생님 많이 보고 싶어요』라는 글을 읽고, 그동안 보관하고 있던 60여 통의 편지를 다시 읽으며, 당시에 제자들이 보여준 따뜻한 감정을 느낄 수 있는 귀한 시간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이름을 열거하여 보면
강창숙, 강정원, 경은주, 구정모, 김광자, 김광태, 김명보, 김명숙, 김숙이, 김원례, 김은정, 김정숙, 김하정, 노선화, 백미경, 서정민, 손문희, ○순화(배구부), 안순옥, ○영희, 우경혜, 이경자, 이용미, 이지숙, 이한걸, 임기정, 임인정, 정영애, 정진성, ○정해, 조경찬, 조은혜, 주현정, 최경옥, 최옥희 그 외 많은 제자들이 있으나 이름이 가물가물합니다.
올해 제 나이 71세에 제자들의 이름을 일일이 기억하지 못해 아쉽지만 신산초교에 가면 혹시나 옛 기억이 되살아 날지 기대해 봅니다.
끝으로 신신초교 개교 100주년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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