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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지만 작지 않은 광탄면장의 꿈-신산초 42회 이건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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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광탄면 창만리 송라동에서 5남매중 3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가 6.25사변 때 피난 가다가 기차에서 떨어져 다리 부분이 불구가 되어 일을 전혀 할 수가 없었다,

아버지는 병을 고치기 위해 오직 하나님께 매달리며 기도만 하셨고 어머니 혼자서 가정을 이끌어 가려고 날품팔이와 궂은 일을 밤늦게 까지 하셨으나 끼니를 때울 수 없을 정도로 어렵게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부모님은 막내인 동생보다 체구가 작고 몸이 약한 나를 다른 친구들과의 경쟁에서 뒤쳐지지 않게 하기 위해 9살에 초등학교를 입학시켰다. 집에서 학교까지는 뒷동산을 넘어 논밭길을 지나 쓰레기장 고갯길로 40분정도를 걸어서 다녔다.

초등학교 3학년때로 기억된다. 그 당시 육성회비가 150원 정도였으나 하루 벌어 하루를 살아가는 가정에서는 육성회비를 제때 못내는 학생이 많이 있었다. 선생님은 육성회비 납부를 독촉하였고 심지어 수업을 안 시키고 집에 가서 육성회비를 가져 오라고 돌려 보내곤 하였다.

그럴때마다 나는 많이 위축이 되었고 육성회비를 밀리지 않고 공부를 할 수 있는 친구들을 부러워 했다.

나는 도시락 대신에 등굣길에 딴 아카시아꽃으로 점심을 때우기도 하였고 귀갓길에는 산을 돌아 다니며 새 둥지를 찾아 새알로 끼니를 때운적도 있었다.

현재 양천한의원 앞에 미군부대와 병원에서 배출한 쓰레기장이 있었다  그곳에서 깨진 유리병 조각과 캔 꼭지, 주사기바늘 등을 주워 팔기도 하였고, 광탄삼거리에 위치한 아이스케키 공장에서 아이스케키를 받아다가 "아이스케키, 하~드"라고 외치며 광탄시가지를 돌며 장사를 하였다. 당시 나무로 짠 아이스케키 통에 얼음주머니와 아이스케키 20개를 담아주어 1개를 5원에 팔면 2원이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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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운 여름철 뙤약볕에 앉아 광탄5일장에서 야채 노점상을 하는 어머니에게 제일 먼저 달려가 시원한 아이스케키를 드렸고 돈 대신 감자나 옥수수 등 야채를 받고 아이스케키를 쉽게 팔았다.

체구가 작은 초등학생이 아이스케키 통을 질질 끌고 다니면서도 장사를 잘하자 공장에서 다른 학생들을 데리고 오라 하여 선생님 아들인 우리동네 덩치가 큰  친구를 데려갔으나 그친구는 팔지도 못하고 아이스케키가 녹으니까 통에 걸터앉아 혼자서 다 먹어 치웠다고 한다.

어느날 꼬마 여자 아이가 100원짜리 지폐를 주면서 아이스케키 2개를 달라고 하여 팔고 거스름돈을 바꿔 가지고 그 자리에 와보니 꼬마 아이가 없었다. 그뒤로는 꼬마 아이 부모님에게 혼 날까봐 아이스케키장사를 그만두었다.

겨울철에는 어머니가 솔잎나무를 머리에 이고 광탄시장에 가서 팔았다. 쓰레기장 고개를 넘어갈 때 한번 쉬고 다시 머리에 일 때 나무를 들어주는 역할을 하기 위해 내가 따라 다녔고 나무 한 단에 120원을 받으면 우선적으로 육성희비를 달라하여 밀리지 않고 납부하였다.

집에오면 소먹이용 꼴을 베거나 등거지나무를 하는 등 부지런하게 움직여서 그런지 우리 반에서 팔씨름은 나를 당할 친구가 없었고 뜀박질도 잘하여 운동회때마다 1등을하여 공책3권을 탔으며 반대표 육상선수로 출전 하기도 하였다.

1978년 나는 당시 파주군 공무원이 되었고  2012년  광탄면장으로 발령 받으면서 작지만 작지 않은  꿈을 펼칠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신산초교의 기억들이 나의 인생을 알차게 하는 원동력이 된 것 같다.